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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이야 Nov 08. 2019

육아휴직은 젖먹이보다 초등학교 때가 더 필요하다

제3장 초등학교 교육에 대한 단상

나는 아이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남아있던 3개월간의 육아휴직을 했다. 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5월까지였다. 아이에게 엄마가 가장 필요한 시기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라고 들어왔다. 초등학교에선 1학년과 2학년을 대상으로 돌봄교실을 운영하긴 하지만 돌봄교실이 안 됐다면 적어도 한 달 간은 엄마가 필요했다. 물론 그 대상이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여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한 달 간은 엄마가 옆에서 아이를 챙겨주는 것이 좋다. 일단 알림장이나 숙제 등이 `e-알리미` 등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 부모에게 전달된다. 스마트폰 사용이 익숙한 엄마가 준비물이나 숙제 등을 챙기기 수월하다. 


우리 아이는 돌봄교실을 신청했지만 신청자가 많았기 때문인지 돌봄교실을 이용할 수 없었다. 돌봄교실이 될 경우 정규수업이 끝난 후 오후 5시까지 아이를 돌봐줄 뿐 아니라 아이가 직접 방과후 수업을 찾아갈 필요 없이 선생님이 아이 스케줄에 맞게 방과후 수업 장소까지 데려다 주는 게 보통이다. 초등학교 입학 후 가장 큰 고민은 시계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아이가 방과후 수업 시간에 맞춰 해당 교실로 찾아갈 수 있을까 였다. 우리 아이는 바늘로 된 시계를 볼 줄 몰라 전자 손목시계를 채워줬다. 그래도 아직 5분이 얼마나 되는 시간인지에 대한 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정규수업이 끝나고 바로 방과후 수업이 시작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제 시간에 맞춰 수업에 들어가기 쉽지 않아보였다. 특히 요일별로 아이마다 방과후 수업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른인 나도 적어놓은 것을 보지 않으면 헷갈리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입학 후 하루 이틀은 정규수업이 끝난 후 아이를 데려왔다가 방과후 수업 시간에 맞춰 방문증을 끊고 아이를 방과후 수업을 하는 교실로 데려다줬다. 그러나 이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선 3월 한 달간은 아이가 교실에 있으면 방과후 선생님이 직접 아이를 데리러 와줬다. 일부 선생님은 아이가 스스로 찾아오길 바라기도 했고 대부분의 학교에선 아이가 직접 방과후 수업에 맞게 찾아가야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 돌봄교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엄마가 수시로 학교를 왔다갔다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월, 화, 수, 목, 금요일마다 어떤 방과후 수업이 있는지 그게 어느 장소에서 하는지, 그 장소는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아이가 스스로 익히는 데 한 달 정도가 걸렸다. 공간이 크지 않은 유치원과 달리 초등학교는 아직 8살인 아이가 느끼기에 크고 복잡하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포스트잇을 활용해 오늘은 정규 수업이 끝난 후 어떤 수업을 몇 시까지 들어야 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매일 적어 보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적응해서도 나는 계속 포스트잇으로 방과후 수업 일정을 알렸다. 아이는 “엄마, 오늘도 써줬지?”라고 물으며 안심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아이와 내가 소통하는 창구가 됐다. 포스트잇을 통해 선생님한테 전달할 말을 전하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아이의 하루를 응원하고 내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한 두 줄의 응원 글을 써 보냈다. 


육아휴직은 아이를 초등학교에 적응시킨다는 것 외에 나한테도 오랜 직장 생활 과정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휴식기를 가진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난 직후 출산휴가에 이어 9개월간의 육아휴직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기간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쉼터였던 내 집은 즉각 일터로 변했다. 나는 일터로 변한 집에 적응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집이 일터로 변하니 나에겐 쉼터가 아예 사라져버렸다. 더구나 집이라는 공간에 일정 기간 갇히게 됐다. 그러면서 산후우울증 비슷한 것이 왔다. 아파트 창문을 통해 하루가 가는 것을 보고 느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아가아,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야”라는 말은 이 갓난아이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 아이도 이 세상이 처음인지라..


내가 아이를 낳았던 당시만 해도 `육아`가 힘든 일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별로 없었다. 엄마는 아이가 태어난 즉시, 아니 임신을 하자마자 모성애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모성애를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육아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부도덕한 일 같았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떠들어댔지만 내 노동환경에선 남산 만큼 나온 나의 배를 보고도 담배를 펴대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에 대해 매스컴이 다루는 방식은 아주 단순했다. 드라마 여주인공이 헛구역질을 한다. 그 다음 병원에 누워 방금 낳은 신생아를 한 품에 앉아 눈물을 찍 흘린다. 그게 전부였다. 그 뒤로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의 TV 육아 프로그램이 나오면서 육아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커지기 시작했다. 요즘 같으면 임산부 앞에서 담배를 대놓고 펴기 어려울 것이다. 또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인지 동료들은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나만 발이 묶이는 것 아닌가에 대한 생각들, 불안감이 컸다.  


그러나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한 `두 번째 육아휴직`은 달랐다. 사회생활 경력이 10년을 넘어가면서 직장생활에서의 위치나 경력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졌다. 특히 아이는 엄마에 예속돼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육아휴직 기간 동안 내가 느꼈던 고민거리는 사라졌다. 하지만 또 다른 숙제가 있었다.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이 친구 엄마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 자체가 없었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부담감도 느꼈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육아휴직 기간 자체가 짧기도 했고 모든 인관관계가 친해지고 싶다고 해서 친해지는 게 아니듯이 특히 아이를 매개체로 한 인간관계는 친해지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나는 비교적 남들 눈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통해 맺어진 인관관계에선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등에 예민해졌다. 


나는 차라리 이 기간 동안 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아이가 젖먹이일 때는 아이의 특성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7살, 8살쯤 되면 아이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어떻게 노는지 등이 보인다. 아이의 성격 등을 파악하기 좋은 시기다. 


일로 바쁠 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인지 내 아이를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다. 아이가 대충 어떤 성향의 아이인지는 파악을 했지만 내가 휴직 기간 동안에 바라본 우리 아이는 내가 그동안 파악했던 것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아이가 짜증을 내거나 할 때 `왜 저렇게 나를 힘들게 할까`만 생각했지, 아이 마음이 어떤지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아이의 짜증을 받아줄 만큼 마음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가 짜증이 났을 때 엄마인 내가 아이 마음을 알아주고 토닥여주면 금방 마음이 풀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이는 짜증을 내다가도 내가 감싸주면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하면서 스스로 뉘우칠 줄도 알았다. 그 전까지는 아이의 짜증이 내 짜증이 되면서 서로 짜증을 내고 그 기분 나쁜 감정이 오래갔다. 내가 느낀 것은 ‘우리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아이와 나의 관계도 이전보다 더 좋아졌다. 아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상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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