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친구까지 만들어줘야 한다니..
제4장 “사실 엄마도 정답이 뭔지 잘 몰라”
시어머니는 아이가 친구랑 놀고 싶어 하는 나이가 된 이후부터 종종 우리 아이가 친구네 집에 가서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단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옛날 시어머니가 남편을 키울 때는 옆집에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놀았는데 우리 아이는 같이 놀만한 친구를 만드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다보니 안쓰러운 것이다. 시대가 변한 것인지 엄마인 내가 일을 해서 인지는 모르겠다. 반대로 아이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온 적도 없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유치원 등에서 보는 게 전부였다.
미취학 아동의 교우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엄마들의 친분에 따라 좌우된다. 내가 일을 하다 보니 어린이집이고 유치원이고 제대로 아는 엄마가 없었다. 일 년에 한 두 번 가는 참관수업에서 잠깐 스치는 엄마들과 친해지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아이가 다녔던 어린이집, 유치원에선 워킹맘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워킹맘을 배척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굉장히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한 발 짝 다가가려 하면 두 발은 쓱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보통 아이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나는 인관관계를 구걸하기 싫었다.
그러던 중 걱정했던 일이 발생했다. 7살 때 일이다. 시어머니를 통해 듣기로는 유치원 끝나고 주변 놀이터에서 우리 아이를 포함해 삼삼오오 노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친해진 아이들 중 우리 아이만 할머니가 돌보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들끼리도 친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아이를 빼놓고 나머지 아이들이 A라는 아이의 집에 놀러가기로 했던 모양이다. B가 우리 아이에게 “오늘 유치원 끝나고 A네 집에 놀러 갈거야”라고 얘기했고 아이는 당연히 유치원이 끝나면 자기도 A네 집에 간다고 생각했나 보다. 유치원이 끝난 후 우리 아이를 빼고 나머지 아이들은 A네 집으로 가는 상황. 그 상황을 대충 눈치 챈 어머님은 우리 아이를 억지로 끌고 집에 왔다고 한다. 아이는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자 울고불고 난리를 폈다. 퇴근 후 집에 가보니 아이도 울고 어머님도 속상해하셨다.
이런 상황을 전해 들은 나는 아이를 앉혀놓고 엉뚱한 말들을 쏟아버렸다. “나는 너한테 미안하지 않아.” 무슨 소리지? 엄마가 일한다는 이유로 아이와 놀만한 친구를 만들어주지 못한 죄책감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방어막으로 아이한테 미안하지 않다고 항변을 늘어놓고 있는 꼴이었다. “엄마는 이 일을 하기 위해 10년 이상 열심히 공부해왔어. 너를 낳았다고 해서 내가 이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닌 거 같아. 그게 아마 너한테도 좋을 거야. 물론 네 옆에서 계속
너의 모든 것을 챙겨주면서 살 수도 있지만 너한테 자기 일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 연이어 이상한 말들이 내 입에서 쏟아졌다. 아이를 다독여줘야 하는 상황인데 아이가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상관없이 엉뚱한 말들을 늘어놨다. 나도 내가 아이에게 왜 이런 말들을, 더구나 이 상황에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내 품에서 충분히 울고 난 다음에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말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이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뭐지? 자기 감정을 추스르고 내 말까지 다 이해한 거야?`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 엄마들과 친해지지 못해 우리 아이만 소외당하게 한 게 미안한 일이라고 인식되면 앞으론 더 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의 인관관계는 엄마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만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아이는 아이 스스로 자기 친구들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엄마의 몫이 아니다. 그럼 그때 가서 충분히 아이들끼리 잘 놀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무리에 끼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것보다 아이 스스로 다른 아이들에게 매력적인 친구가 되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쳐주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나의 생각이 먹혔던 것일까. 아이는 그 해가 지나가기 전에 생애 처음으로 `남의 집 놀러가기`에 성공했다. 유치원 같은 반 엄마가 자기 아이가 우리 아이랑 놀고 싶어 한다며 어머님한테 얘기했단다. 그래서 유치원 끝나고 그 아이네 집에 가서 놀았다. 우리 아이의 생애 첫 단독 남의 집 방문에 플랜카드라도 걸고 싶었다. 내가 자랄 때는 수시로 옆집에 놀러가 밥 얻어먹고 놀았는데 이게 하나의 빅 이벤트가 됐다는 게 한편으론 씁쓸했다. 남들에겐 별 거 아닌 일이겠지만 워킹맘인 나에겐 하나의 사건이었다.
워킹맘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할머니나 베이비시터 등의 손에서 자라기 때문에 ‘버릇이 없다’거나 엄마의 무관심으로 ‘학업이 부진하다`는 것이다. 나는 7살 유치원 참관수업에 갔을 때 이런 시선들을 느꼈다. 유치원에서 아이와 가장 친하다는 C의 엄마는 나에게 “아이가 할머니 말을 너무 안 듣더라, 우리 애도 할머니 말은 잘 안 듣는데 할머니를 자주 보진 않으니까..우리 애는 영어 공부 이렇게 하는데 그러면 좀 나아요. 시켜보세요”라고 말했다. 이 엄마가 할머니 말씀도,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를 평소에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 가늠이 됐다. 이 엄마는 자기 아이와 우리 아이가 최대한 같이 놀지 않기를 바라는 듯 했다. 엄마들의 친분과 관계 없이 아이가 친구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기 위해선 `공부를 잘 하거나 인기가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자기 아이가 너무 좋아하고 같이 놀고 싶어 한다면 엄마 입장에서 그 아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놀게 해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워킹맘이라 친구들을 제대로 만들어줄 수 없는 환경에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 자체를 친구들이 좋아하는 매력적인 아이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