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 이야기

되돌아 올 수 없는 이별

by 관희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오래돼서 껍질이 마른 귤을 까먹었다. 엄마는 무균 항암 중이라 아직 생과일을 먹지 못했는데, 특히 농약이 묻어 있는 과일의 껍질이 가장 위험했다. 나는 하얀 귤락을 제거하고 얇은 껍질을 까서 상큼한 알맹이만 몇 개 골라내어 엄마 입에 넣어줬다. 그리고 한쪽 다리만 굽힌 채 쪼그려 앉은 엄마와 외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2022년 6월 21일, 외할머니는 천국으로 가셨다. 치매와 당뇨를 앓던 외할머니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병원 침대에서 눈을 감으셨다. 우리 엄마는 급히 연락을 받고 가던 길에 수화기 너머로 할머니의 임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얼마나 서운하고 억울하셨는지, 엄마는 장례식장에서부터 장지까지 울고 통곡하고 또 우셨다.


할머니는 작은 시골 동네 교회의 권사님이었다. 내가 아침에 소식을 듣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갔을 땐 이미 외가 가족들이 모여 추모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를 주도해 주시는 목사 한 분과 같이 온 사모님이 계셨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30년 동안 할머니가 다닌 동네 교회의 목사님 부부였다.


시골의 작은 교회로 부임한 목사님이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가난한 시절, 과일바구니를 이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목사님과 사모님은 어쩌면 우리 어머니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목사님 부임 초기에 우리 외할머니는 이미 교회 신자였으니, 이 동네는 가난하여 목사님 같은 훌륭한 분이 계실 곳이 아니라며 얼른 떠나라고 하셨단다. 그러나 목사님은 권사님 같은 분 한 분만 계셔도 여기에 평생 있으실 수 있다고 하시며, 그렇게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 의지하신 것이다.


목사님은 이별의 연속이었던 할머니의 애타는 세월을 천천히 읊어주셨다. 30대에 일찍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4남매의 자식 중 장성한 큰 아들을 황망하게 사고로 잃고, 막내딸까지 지병으로 먼저 천국으로 떠나보낸 후 둘째 딸인 우리 엄마와 막내아들인 외삼촌을 위해 매일 밤낮으로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더 이상 제 사랑하는 가족을 천국으로 데려가지 마시라고...


목사님이 기억하시길 할머니는 큰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그 한 겨울 맨발로 교회에 뛰어와서 초점 없는 눈으로 정신없이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교회의 식구들은 그런 여인의 일대기를 다 알고 계시니 말씀하나 뱉으실 때마다 같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차마 막지 못하고 울분을 토하듯이 기도해 주셨다.


제 살을 도려내는 슬픔으로 남편과 자식을 떠나보내고 남은 자식과 손자, 손녀들의 행복을 바라던 외할머니는 이제 편히 눈감으셨으니, 목사님은 외할머니가 천국에 가셨을 거라고 했다. 그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애처로운 사람이었기에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와 함께 할머니 집에서 이불과 옷을 정리했던 날이다. 낡은 옷장 서랍 깊은 곳에서 돌아가신 큰 외삼촌의 군번줄이 나왔을 때 엄마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낡은 봉투 속에 고이 접어 놓은 돌아가신 이모의 편지가 나왔을 때, 엄마는 울었다.


“사랑하는 엄마, 막내딸이 주는 작은 정성이야”


엄마는 할머니와 이모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죽은 딸이 생전 엄마에게 용돈을 드리며 적어준 쪽편지조차 버리지 못하고 고이 간직하며 살아간 그 세월이 얼마나 슬프셨을까. 창문에 드리우던 오전 햇살이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는 앉아 있었다. 껍질만 까놓은 귤은 말라갔고, 엄마는 한 번 더 엄마를 불렀다. 엄마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 보였다. 만약 지금 외할머니가 계셨다면, 엄마도 한 번쯤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의 마른 발목이 더 안쓰러워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귤 한 조각을 더 까서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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