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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다가

세상에 라면 레시피가 많은 이유

by 피터

라면 종류만 수십 가지, 각자 개성으로 이렇게 저렇게 끓인 라면 레시피도 수십 가지.

나도 가끔은 더 특별한 라면을 끓이려는 시도를 한다. 처음부터 면과 스프를 다 넣고 끓이면 면이 더 말랑한 식감을 가질 거라거나, 스프에 청양고추 가루를 풀어 한 번 펄펄 끓이면 국물이 더 "청양청양"해질거라거나, 면을 끓일 때 집게로 꾹 눌러주면 면에 깊은 수프맛이 들어 더 맛있다거나. 차돌박이를 굽다가 몇 점 쓱 먹고, 남은 차돌박이 구이에 물 넣고 끓인 차돌박이 라면도 별미의 하나다.

라면 하나 끓이는데 차돌박이까지 들이면, 라면도 계급이다. 세상엔 라면으로 매 끼니를 생각해야하는 세상이 있고, 구운 채끝살을 올린 짜파구리를 먹다 남겨도 그만인 세상이 있다. 그저 라면 하나 끓이다가, 라면 하나가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정성과 레시피가 들어간 라면이면 참 맛 나는 세상이겠다는 상상을 한다.

야들야들한 면발을 만들려고 28cm 면 집게로 휙휙 누르고 젓는다. 라면을 끓이는 가장 소중한 레시피는 분식집 라면이 아닐까 싶다. 분식집 라면은 라면 봉지에 적힌 레시피를 가능한 따라서이기도 하고, 거기 적힌 물의 양과 시간을 지키면 괜찮은 분식집 라면의 맛을 먹을 수 있어서다.


최근에 분식집 라면 끓이는 법대로 라면을 끓였다. 라면봉지에 적힌 용량대로 하는 게 방법이다.


-두 컵 3/4의 물에 후레이크를 넣고 한 번 끓인다. 물의 양이 중요하다.

-스프와 면을 동시에 넣고 3~4분 더 끓인다.

-포인트는 면 집게로 면을 휘휘 뒤적뒤적 들었다놨다 하는 일이다. 그러면 면에 공기가 접촉되 더 꼬들꼬들한 맛을 낸다나.

-그렇게 익은 면 먼저 그릇에 건져낸다.

-남은 육수에 푼 계란을 슬쩍 돌려 넣어 둥둥 풀어지게 만든다. 파 송송으로 마무리.

영양섭취를 늘리려고 계란을 두 개 풀지 않는다. 물 양에 비해 계란 맛이 강해지고 국물이 퍽퍽해진다.

-이렇게 다듬은 육수를 먼저 담아낸 면 그릇에 부어주면, 분식집 라면 끓이기다.


분식집 라면의 맛은, 따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여러분도 몸이 기억할 그 맛이다. 뭐랄까, 라면, 라면, 라면 하는 맛이 깊숙이 밴 그 맛이다. MSG의 최고조랄까.

라면 봉지에 적힌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해본 게 얼마만인지. 특별한 라면 끓이겠다고 이런 저런 갖은 기술 넣은 적은 많았지만 라면 봉지에 적힌 "기본"을 따른 건 정말 손에 꼽을 일이었다. 라면 봉지에 적힌 레시피는 라면 박사(연구원)들이 이렇게도 끓이고 저렇게도 끓이고, 면과 찰짐과 국물맛의 변화를 미식가처럼 따져가며, 만들어낸 공식의 비법일 터. 그동안 내가 뭐라고, 라면만 죽어라 공부한 연구원들의 레시피를 마다하며 잔재주를 피웠을까.

그래서 한 동안은 라면봉지 레시피를 그대로 따르는 라면 끓이기를 하기로 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라면 봉지 뒷면에 적힌 레시피를 찬찬히 읽는다. "기본"이 가장 맛있는 인생의 시작이란 걸 새삼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출출한 날엔, 라면 봉지 레시피대로 라면을 끓이며 "기본"을 잊지 않기로 한다.

내게 라면이 배고파서 간단히 먹는 음식이 아니라, 시간과 규칙을 지켜 정성들인 음식이길 바란다. 분식집 라면을 끓이며, 나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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