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군가의K Oct 09. 2020

잘 지내? 나의 어여쁜 강아지야

산책의 계절에는 네 생각이 나

우리가 처음 만났던 건 화창한 여름날이었지. 아홉 살 밖에 안 되었던 내가 겨우 한 살도 안 된 너를 만나 친해지고는 싶은데 서로를 경계하며 잔뜩 어색해했던 그때가 나는 아직도 너무 생생한 거 있지. 집에서 막내인 내가 제일 먼저 하교해서 텅 빈 집의 적막을 깨며 현관을 열면, 신발을 채 다 벗기도 전에 온몸을 부비며 아낌없이 나를 반겨주던 너.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러 할머니 강아지가 되어서 뛰쳐나올 기력이 없어도 너는 꼭 귀가한 내가 바깥공기를 풍기며 다가가면 느릿느릿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해줬지. 서로에게 가족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지 못했던 우리 식구들도 너를 어여뻐하는 그 마음으로는 늘 하나가 되고는 했었다. 개털 날린다며 너를 타박하곤 하셨던 할머니께서도 이따금씩 네 얘기를 꺼내신다면 말 다 했지?


네가 없는 세상에 사는 나는 외로워질 때면 너를 떠올려. 고요한 집에서 너와 단 둘이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며 졸던 여름과, 어쩐지 나를 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너를 품 안에 꼭 끌어안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던 겨울을 생각해. 한적한 공원의 잔디밭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순간들과, 목욕이라면 질색하다가도 따뜻한 물줄기가 온몸의 털을 적시면 부르르 떨며 시원해하던 너의 그 표정들을 기억해. 산책을 마치고 들어와 얼른 발 닦아 달라며 보채던 눈빛과, 나 혼자 맛있는 걸 먹을 때 너 혼자만 먹냐며 낑낑대던 그 칭얼거림을 그리워해. 가끔은 깊은 새벽 물그릇을 향해 착착착, 걸어가며 적막을 깨던 너의 그 귀여운 발톱 소리마저 그리워져서 사무칠 때가 있단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집으로 가는 길이 외롭고 지치지 않았던 건 다 네 덕분이었어. 한 자리 숫자였던 나이가 두 자리가 되고, 그 두 자리 숫자의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뀌는 지난했던 성장의 시간들을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행복했어. 미숙한 내게 공감하는 방법을,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서 참 고마웠어. 나에게 공감해주고 의지해준 점 또한 참 고맙구나.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니야. 지나간 일은 지나간 그대로의 모습인 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어쩐지 너를 떠올리면 너의 그 새까만 발바닥에 삐죽삐죽 자라난 털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히며 장난을 치던 그때로는 참 돌아가 보고 싶다. 똑똑한 너는 늘 나보다는 엄마를 더 좋아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내가 보고 싶지 않더냐?


Oamul Lu <Chilean Desert>


나의 어여쁜 강아지야, 잘 지내? 세상에서 함께할 때 미처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해 미안해. 내가 더 많이 잘해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참 미안하다. 나의 어여쁜 강아지야, 너는 내 마음 속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씨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를 만난 건 정말이지 행운이구나. 다시 만나면 그곳에서 제일가는 반려인간이 될 수 있게 이곳에서의 남은 하루하루를 잘 살아볼게. 우리의 가을이 다시 시작되면, 매일매일 시원한 바람에 눈썹을 휘날리며 신나는 산책을 하러 가자.


잘 지내. 나의 어여쁜 강아지야.



2020년 시월의 밤 산책을 하다가

단 하나뿐인 나의 강아지를 떠올리며 K가 쓰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 번째 계절엔 흐려도 맑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