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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제주 Oct 22. 2023

[5]. 입덧은 계속된다

12주의 기적은 언제 오는가

9주 2일

 평안아 안녕?


 요새 엄마는 잠이 많아졌어. 원래도 잠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쉽게 피로감을 느껴서 잠이 많아지는 것 같아. 회사에서 퇴근하면 잠시 기절해 있는 게 일상이 되었고, 밤에 자려고 누워서도 이제 잔다라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어. 아무래도 평안이와 함께 하게 되면서 몸에 많은 변화가 생겨서 그렇겠지?


 그리고 최근의 변화 중에 가장 심한 건 몇 주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입덧인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의 입덧은 소문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로 심한 건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입덧이 생긴 건 확실해. 밥 짓는 냄새도 싫어하고 집에서 요리하는 냄새도 싫어하게 되었단다. 이전에는 계란을 엄청 좋아했는데 요새는 계란 특유의 비린냄새가 맡기 싫은가 봐. 식욕도 많이 줄어들었어. 엄마랑 아빠랑 맛있는 걸 먹는 게 큰 즐거움이었는데 약간의 제약이 생겼단다. 그래도 아무것도 못 먹거나 그런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나마 칼칼하고 매콤한 음식이나 상큼한걸 주로 먹고 싶어 하고 기름지고 느끼한 음식은 별로 생각이 안 나는 것 같아. 심지어 TV에 나오는 기름지고 느끼한 음식영상도 싫어하더라고. TV에 고춧가루가 안 들어간 하얀 백김치 김치찌개 영상이 나오니까 느끼해 보인다면서 채널을 돌려버렸지 뭐야 


 주로 공복상태에서 입덧이 심한데, 특히 공복에 차를 타면 멀미와 유사한 증상이 심하게 나는 것 같아. 오늘은 교회 다녀오는데 속이 안 좋다고 해서 밥을 준비하기도 전에 집에 오자마자 상큼한 주스랑 달달한 빵을 급하게 먹어야 했지.


 그래도 엄마는 계속 평안이를 위해 건강한 음식을 골고루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고기를 냄새 안 나게 구워보려고 수비드기계도 사용해 보고 조리시간을 줄이려고 고기를 깍두기처럼 썰어서 요리도 해보고 있어. 비린내가 심한 생선요리는 반조리 형태로 나온 걸 사서 먹고 있고 그나마 엄마가 지금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상큼한 제철과일도 많이 먹고 있단다


 엄마랑 아빠도 평안이가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고 많이 부족하지만 평안이를 위해 많이 노력 중이란다. 나중에 생색 한번 내보려고 오늘의 편지를 쓰고 있단다 ㅎㅎ 세상에 나오면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자


- 아빠가 




9주 3일

 평안아 안녕?


오늘은 엄마랑 아빠의 결혼 2주년 기념일이란다.


 엄마랑 아빠는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등산하는 것도 좋아해서, 얼마간 여행이나 나들이를 다니지 않으면 답답해하는 스타일이란다.  막 활동적인 취미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요새 표현으로 코에 바람 쐬는 것을 좋아하지.


 그런데 우리가 결혼했을 때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져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사망자도 많이 나오던 때였어. 우리나라도 전 국민이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녔음에도 전 국민의 절반이 넘게 감염되었단다. 그때는 실내·외에서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니던 때라서 엄마아빠의 결혼식에서는 모든 손님들이 마스크를 끼고 사진을 찍었고, 해외여행길이 사실상 막히면서 신혼여행도 해외로 길게 가지 못하고 30년 전 부모님 세대의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로 가게 되었지. 아빠는 엄마를 만나기 전에도 제주의 매력에 빠져 일 년에 몇 번씩 제주도를 들락거렸는데, 웨딩촬영도 제주도에서 하더니 결국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가게 되었어.


 그리고 결혼하고 줄곧 주로 국내여행을 많이 다녔단다. 해외여행은 쉽지 않은 시절이었기도 했고, 평안이가 살게 될 대전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서 전국 어디든 여행 다니기가 좋거든


 하지만 평안이를 만나고는 엄마가 안정기가 될 때까지는 멀리 떠나지 않고 조심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결혼기념일에는 어딘가를 다녀와야겠다 싶어서 비교적 가깝다고 생각한 전주를 다녀오게 되었단다. 사실 가깝기도 했지만 굳이 전주를 선택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단다. 


 지난주에 예배가 끝나고 엄마가 비빔밥이 먹고 싶다고 했어. 그런데 주일이어서 휴무인 곳이 많기도 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근처에 영업하는 비빔밥집이 없어서 한탄하다가 그럼 다음에 전주에 비빔밥을 먹으러 가자!라고 조금은 엉뚱한 결정을 한 거란다. 엄마아빠는 먹는데도 진심이거든


 그래서 전주에 가서 먹을 계획을 성대하게 세우고 여행을 다녀왔단다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먹고, 바로 한옥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유명한 디저트가게에서 빙수를 먹고는 부른 배를 소화시키려고 경기전도 구경하고 2주년 기념사진도 찍었어. 그리고는 바로 점심으로 엄마가 가고 싶어 했던 베테랑칼국수를 먹었어. 기대하고 멀리까지 가서 먹을 만큼 맛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전이 맛집은 없지만 칼국수는 꽤 잘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단다. 

 점심을 먹었으니 디저트를 먹어줘야 하니까 객리단길 카페에 가서 딸기케이크를 먹으려고 했는데 마침 케이크가 없어서 음료만 마시고, 전주에서 유명한 빵집인 이성당에 가서 초코파이도 사고, 여름에 연꽃이 예쁘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추위가 깔려있는 덕진공원도 산책하고 대망의 비빔밥을 먹었단다. 비빔밥이 다 똑같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기대하고 간 만큼 훌륭한 맛이었어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돌아다녔지만 엄마에게는 차를 타고 오래 돌아다니는 게 힘든 일정이었어. 아빠도 내심 좀 불안했어. 평소에는 전혀 못 느꼈는데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까  차량의 진동이 꽤나 많이 느껴졌어. 그게 혹시 평안이한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려고 해.


 평안아 아빠는 여행 설계왕이거든? 요새 유행하지만 엄마아빠는 도통 모르겠는 MBTI라는 것으로 보면, 아빠는 파워 J 성향이라 계획적으로 돌아다닌 것을 좋아해. 평안이가 세상에 나오면 엄마랑 같이 아름다운 세상구경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니자


- 결혼 2주년에 아빠가




11주 4일

 평안아 안녕


바깥세상은 그동안 벚꽃이 한창이었단다. 평년보다 더운 날씨 때문에 개나리가 2주 정도 빨리 피어서  벚꽃과 함께 함께 절정을 이루었지


 엄마가 아직은 몸이 힘들어서 평소처럼 멀리 놀러 가지는 못했지만 대전 근교의 명소는 알차게 돌아다녔단다

일찍 와버린 봄이 가는 게 아쉬워서 카이스트, 대청호, 동학사, 탄동천, 테미공원의 벚꽃을 눈에 담느라 평안이에게 편지도 한동안 못썼단다. 세상에 나오면 저 흐드러진 분홍의 축제를 같이 감상하자꾸나


 세상은 분홍의 벚꽃으로 일렁거리고 있지만 엄마의 속은 입덧으로 몇 주째 울렁거리고 있단다. 11주 차 들어서면서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밤이 되면 속이 안 좋아서 고생하고 있어. 아빠는 멀미를 잘하는 편이라 멀미할 때의 기분 나쁜 울렁거림을 싫어하는데 엄마는 그런 느낌으로 계속 속이 안 좋은 것 같아. 몇 주째 지속적으로 그러니 얼마나 컨디션이 안 좋을지 아빠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단다. 12주가 넘어가서 중기에 접어들면 입덧증상이 좀 완화되고 식욕도 돌아온다고 하는데 엄마가 컨디션이 좋아졌으면 좋겠어


 밖에는 오랜 가뭄 끝에 메마른 대지를 적셔줄 단비가 내리고 있어. 내리는 비처럼 엄마의 몸상태도 상쾌해졌으면 좋겠다


평안이가 엄마 뱃속에서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줘서 너무 고맙고 든든해. 다음 검진 때도 건강한 모습으로 춤추고 있는 평안이를 기다릴게


창밖에 내리는 봄비 소리를 들으며

- 아빠가




12주 6일

 오늘은 한 달 만에 평안이를 보고 온 날


 이제 팔다리도 제법 자라서 엄마뱃속에서 다리도 쭉 폈다가 앉았다 일어났다 자세를 바꾸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신기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아무 탈없이 조용히 잘 크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고 뭉클했어.


 하지만 아직 엄마는 입덧과의 전쟁 중이야.

 임신초기에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려고 소고기를 너무 자주 먹어서 그런지, 소고기는 tv에 나오는 걸 보기만 해도 속이 안 좋다고 해서 소고기는 안 먹은 지 꽤 됐어. 그리고 냄새에 민감해져서 집에서 요리하는 냄새도 거북하게 느끼고 김치 냄새나 향이 강한 음식에 거부감을 느껴서 집에서 밥 해 먹기는 쉽지 않단다. 밥 짓는 냄새도 싫어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작은방에서 밥을 잔뜩 해서 얼려놓고 먹고 있단다. 햇반도 먹어봤는데 가격도 그렇고 집에서 직접 만든 밥을 따라오진 못하는 것 같아.


 음식을 먹는 양도 예전보다 훨씬 줄었어. 음식을 먹으면 딱 첫 입만 맛있다고 하기도 하고, 먹는 중에 배가 부른 느낌보다는 목이 막히는 느낌(?)이 든다고 해. 밥을 먹고 나서도 체한 느낌이 든다고도 하고, 그러다가도 속이 비면 울렁거리는 느낌인 드는 고초를 겪고 있단다.


사람들이 12주가 넘어가면서 입덧증상이 완화되고 식욕이 왕성해진다고 그걸 12주의 기적이 온다고 하는데, 엄마에게는 아직인 것 같지만 그래도 그날을 기다리고 있단다. 


 평안아 엄마랑 아빠는 먹는 것에서도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란다. 엄마의 컨디션이 좋아지면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닐 거고, 그날이 오면 엄마뱃속에서 지금보다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을 거야


그날이 빨리 오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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