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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레카 Nov 09. 2021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2)

화목하고 평화로운 줄 알았던 날, 사고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그날은 그 해 겨울 들어 첫 한파가 시작된 날이었다. 

원래 김장하는 날은 추운 거라고 할머니가 그랬던 것 같은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없이 처음  모여서 하는 김장 날이 하필 딱 그날이었다. 


시작은 평범했다.

가족들은 할머니 집에 도착한 순서대로 각자 할 일을 찾아서 분주했다. 

엄마와 숙모들은 김장거리를 다듬고 아빠와 삼촌들은 마당과 집안을 오가면서 여러 잔 일들을 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들과 와글와글 떠들기 바빴고. 


할머니 생전 김장하던 집안 모습과 딱 그대로였다. 

할머니만 안 계셨을 뿐. 


할머니의 평생 기도 제목이었던 형제들 간 우애 있게 화목한 가정되게 하시고..

비록 할아버지의 무능함이 가장 큰 흠이었던 집안이었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선한 할머니 덕분에 아들 오 형제 모두 제 밥벌이하면서 부모 공경하고 각자 가정 이루어서 누구 하나 큰 걱정거리를 만들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이렇게 형제들이 모여서 김장을 하고 있으니 할머니 기도는 성공적이었다 할 만하다. 


내 기억으로 우리 가족들은 참 화목했다. 

아빠 엄마 나 동생으로 구성된 우리 가족만 그랬던 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삼촌들 그리고 숙모들 사촌들까지 모두 어울려서 잘 지냈다.

일 년에 설, 추석 명절 말고도 모두 모여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아빠를 비롯한 삼촌들 모두 비교적 온화한 성품이었고 며느리로 맞은 숙모들도 다들 유순한 성격이었다. 

때문에 할머니가 굳이 때때마다 불러 소환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늘 모여 함께 했다.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랬다. 

지금에 와서야 그 화목함이 어쩌면 엄마, 숙모들의 일방적인 희생 탓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긴 했지만.


나는 이 집안에서 장남의 장녀로 태어났다. 

딸이 없었던 할머니에게 나는 첫 손주로서의 무한한 사랑과 관심을 독점할 수 있었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삼촌들에게도 나는 첫 조카였기 때문에 첫째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꽤 오랫동안 누렸고  지금도 그 사랑은 여전하다.   

더구나 할머니는 46세에 나를 보았기 때문에 업고 나가면 막둥이냐 하는 소리를 매번 듣곤 했다.

다행히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단다. 본인은 딸이 없었으니 내가 자기 딸이었겠지 뭐.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할머니에 대한 나의 마음도 당연히 각별했다. 

심지어 엄마도 너는 할머니 딸이잖아 할 정도로 나와 할머니의 관계는 돈독했다.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첫 손주의 역할은 다양했다. 

내 나이가 많아지고 사리 분별할 만큼 어른이 되었을 때가 되어서는 할머니의 어려웠던 옛 시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주 역할이었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할아버지가 얼마나 무능한 사람인지 정 없는 사람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식들을 길러낸 경험담들.


젊은 나이에 뇌졸중 후유증으로 평생을 투병만 하면서 경제 능력 없이 당신 잘한 일은 오직 아들 다섯 씨 뿌린 것 밖에 없는 사람. 

올망졸망 다섯 아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도 날 일해서 끼니 때울 걱정보다 자기 먹을 약 한 알이 더 급한 사람.

천성이 게으르고 이기적인 데다 자존심만 세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전형적 유교 시절 아버지로서 아내와 자식들의 존경 속에 호위 호식할 수 있는 사람.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류의 레퍼토리들은 무한 반복 재생이다. 

나중에는 거의 세뇌 단계에 이르러서 나에게 할아버지는 그냥 나쁜 사람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의 모습으로 그렇게 나에게 각인되었다. 


할아버지는 젊어서 얻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한쪽 몸이 불편했고 안면근육에도 일부 마비가 왔었기 때문에 발음이 신통치 않았다.  

어눌한 말투 때문에  할아버지는 어느 새부터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몸짓 발짓이 동반된 일상적 의사소통 외에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의사소통은 항상 할머니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들들도 며느리들도 손자 손녀들도 할아버지와 직접 대화를 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마 할아버지가 제일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날도 그냥 말을 안 하기로 한 것일까?


가족들이 북적북적 어수선한 데 왠지 할아버지의 거동이 수상찮았다. 

편마비와 노화로 불편해진 걸음 때문에 밖에서만 사용했던 지팡이를 집안에서도 쓰기로 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날은 앉아 계신 소파 자리에서 꿈적도 안 하시는 거다. 


비록 할아버지가 말씀은 안 하셨지만 북적거리는 집안 분위기를 항상 좋아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모처럼 활기차게 모두들 분주했기 때문에 단순히 그 시끌벅적함을 즐기시나 싶었다. 


마침 이른 오전 시간이라 오랜만에 며느리들이 차린 아침 밥상을 받으시라고 식탁으로 모셔오려는데 몸을 일으키려 뒤척일 때마다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장하게 훌쩍 큰 사촌 녀석이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일으키는데 고통스러운 비명에 일순간 가족들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할아버지께 시선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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