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과 물의 땅 골든서클>
아침 일찍 눈이 떠진 이유는 신랑의 코골이 때문이다. 평소에도 코골이가 심한 남편이지만 피곤한 날은 지진이 났나 싶을 정도로 심해서 새벽에 깨기도 한다. 작은 캐빈에서 4명이 함께 자려니 편하진 않았다. 그래도 따뜻한 히터에 빨래를 널어 가습 효과까지 주었으니 이 정도면 편안한 밤이었다고 해야겠다.
오늘 일정은 골든 서클을 돌아보고 다음 숙소가 있는 비크까지 가는 것이다. 예약한 비크 숙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 수화물이 도착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닝커피를 마시며 야무진 상상을 해본다.
오늘은 좀 여유 있게 움직이자며 천천히 아침을 보낸 후 10시쯤 숙소를 나왔다. 첫 번째 목적지는 싱벨리어 국립공원이 아닌 케리드 분화구로 정했다. 보통 골든 서클의 기본 루트는 싱벨리어 국립공원- 게이시르 간헐천- 굴포스지만 케이드 분화구가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기도 하고 백두산 천지는 아니더라도 예쁜 호수가 만들어진 화산 분화구를 아이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케리드 분화구로 가는 길. 파란 하늘이 어제와 다르게 아주 예쁘다. 오늘은 날씨가 도와주는 게 분명하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로변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살짝 지나치고는 신랑이 차를 세웠다.
"태워줄까?"
아이들은 창밖을 돌아보며 어리둥절해 한다.
"혹시 코로나 걸렸으면 어떻게 해?"
"그럼, 그냥 가자!!" 다시 신랑이 출발하려는 순간
"아냐,, 태워주자"
그러고 보니 유럽 여행을 하면서 2주가 넘게 코로나를 거의 잊고 있었다. 하지만 만 2년이 넘도록 지속된 코로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 조심"이 각인되어 잘 모르는 타인에 대한 거리감과 의심을 심어 놓은 듯하다. 괜히 아이들 앞에서 뻘쭘해졌다.
창문을 열어 오라는 손짓을 하니 빠른 속도로 뛰어온다.
"Thank you!!"
"Where are you going to?"
" Just let me know where you go to then I am gonna tell you where I get off."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똑똑한 대학생처럼 보이는 이 여자는 알고 보니 18세 아일랜드 소녀로 교회에서 일하고 매일 도보로 2시간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한다고 했다. 그래서 히치하이킹도 자주 한다고,,
10여 분 달렸을까? 그녀가 원한대로 갈림길에서 내려주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국 사람의 친절을 전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무엇보다 여행하면서 환브로에게 '히치하이킹'이 무엇인지 그리고 언젠가 환브로가 좀 더 자라면 배낭여행을 하다가 히키하이커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리고 우리 가족처럼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좋겠다고 얘기해 줬다.
케리드 분화구는 기원전 4,000년경에 형성된 분화구인데 빙하가 녹은 물이 파란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호수를 이루고 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파란 하늘에 진한 블루의 아이슬란드 국기가 아주 멋스럽게 펄럭이고 있다. 아이슬란드 국기의 파란색은 바다를, 흰색은 아이슬란드를 뒤덮고 있는 눈과 만년설을, 빨간색은 화산을 상징한다.
나무로 지어진 작은 캐빈 매표소에 가서 티켓을 샀다. 입장료 성인 400 ISK / 12세 미만 어린이는 무료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 분화구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화산 지형의 식물과 꽃을 관찰하고 흙과 돌을 구경하는데도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다. 오늘은 입은 바람막이 점퍼를 벗어도 될 정도로 날씨가 따뜻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늘은 파랗고 햇살이 빛난다. 어제 아이슬란드가 초겨울이었다면 오늘은 봄의 기운이 물씬 난다.
에메랄드빛 호수까지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지만 잘 조성되어 있다. 호숫가로 내려간 아이들은 작은 돌을 주워 물수제비를 한다. 려환이는 차가운 호숫물도 만져보고 손으로 물총을 만들어 노는 모습이 평화롭다. 무엇이든 잘 먹는 지환이는 호수의 맛도 궁금해한다. 아이들은 자연과 함께 있으면 심심하지 않다. 호기심과 관찰력이 총동원되어 창의적인 활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지금 만나고 있는 아이슬란드가 우리 아이들에게 나중에 어떤 의미로 기억될지 궁금해진다.
게이시르 간헐천은 티브이 프로그램에도 많이 나온 곳인데 약 10~15분에 한 번씩 땅속에서 모인 뜨거운 수증기 압력에 물이 하늘 위로 솟구치는 걸 직접 볼 수 있다. Haukadalur 계곡에 위치한 간헐천 지대인데 케리드 분화구에서 차로 35분 거리에 있다. 게이시르 주자창 입구로 들어오는 도로 주변에서부터 여기저기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간헐 온천 (間歇溫泉)
- 일정한 간격을 두고 뜨거운 물이나 수증기를 뿜었다가 멎었다가 하는 온천. 화산 활동이 있는 곳에서 많이 나타난다.
-영어로 gerser의 뜻이 간헐온천인데 이 단어에서 Geysir(게이시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인기 관광지답게 사람도 많고 차도 많다. 가장 신기했던 건 기념품 가게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어제 방문했던 화산도 오늘 오전에 들린 케리드 분화구에도 기념품 가게는커녕 나무 간판과 매표소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마다 여행하면서 수집하는 기념품이 있는데 우리 가족은 마그넷을 지환이는 핀을 수집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가볍고 작기 때문이다. 몇 개국을 다니는 긴 여행의 경우엔 작은 짐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도 꽤 부담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기념품 가게가 그것도 꽤 큰 규모로 주차장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먼저 게이시르에 왔으니 간헐천이 폭발하는 걸 봐야 했다. 안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는 길에도 온천 온도가 80~100도라고 조심하라는 팻말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땅의 색상도 굉장히 묘한 색들이다.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 아래로 졸졸 물이 흐르길래 살짝 손을 내밀었다가 델뻔했다. 많은 간헐천 중에서 가장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스트로쿠르'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폭발의 순간을 기다렸다. 잠시 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솟구쳐 오른다. 그러고는 높이 뿜은 물들이 순식간에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지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목격하는 순간이다. 멋지다. 한 번만 보고 가기엔 당연히 아까울 수밖에,,
여러 차례 간헐천 활동을 지켜보고 있자니 물기둥 솟는 크기와 높이 간격이 조금씩 다른 걸 알게 됐다. 시간이 짧을수록 낮고 넓게 시간 간격이 길수록 높이 솟구친다. 그래서 오래 기다릴수록 기다림이 즐겁고 짜릿하다. 우리는 가장 높이 더 힘 있게 폭발하는 걸 볼 때까지 머물렀다. 몇 번의 반복 끝에 만족할 만한 영상을 찍고 나서야 아이들의 발걸음이 떨어졌다.
게이시르 간헐천 맞은편에 있는 식당과 기념품 숍은 유혹의 장소다. 예쁜 기념품들과 북쪽의 추운 지역답게 울 소재 의류 제품과 아웃도어 용품들의 퀄리티가 참 좋다. 하지만 인건비 비싼 나라답게 가격 또한 사악했다. 사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고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아침에 준비해 온 도시락이 있으니 굴포스로 가는 차 안에서 먹기로 했다.
<평생 볼 폭포는 다 보고 간다.>
2년 전 빅토리아 폭포를 보기 위해 아프리카 짐바브웨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 지금 생각해 보니 빅토리아 폭포를 직관하는 것도 알고 보니 신랑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아찔한 절벽에서 100m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했던 1월은 건기라 절벽으로 떨어지는 물의 양이 비교적 적어서 수압의 웅장함은 크게 느끼지 못했었다.
굴포스는 아이슬란드 최대 규모의 폭포이다. 높이 32m, 평균 유속 140m/s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흘러와 떨어지는데 주차장에서 폭포로 들어가는 산책로는 쉬지 않고 생기는 물보라 때문에 상당히 미끄러웠다. 우리는 바람막이 점퍼로 무장하고 조심조심 가장 가까운 폭포 지점까지 들어갔다. 폭포 소리가 얼마나 웅장하고 물줄기가 센지 의사소통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 거대한 폭포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대자연이 멋지고 위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을 순식간에 삼켜버릴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인간이 간섭할 수 없고 다듬어지지 않은 그야말로 야생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아이슬란드어로 Gull은 황금빛 Foss는 폭포라는 의미로 '황금빛 폭포'라고 이름 지어졌는데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1907년 굴포스가 접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토마스도티르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수력발전소를 만들겠다는 외국인 회사에 설치 권리를 팔아 넘겨줬다고 한다. 얼마 후 그의 딸 시그리두르 토마스도티르는 아빠의 결정에 반대해 여러 차례 레이캬비크에 있는 정부에 가서 항의를 하고 폭포에 뛰어들겠다고 선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긴 싸움 끝에 결국 수력발전소 설치가 취소되고 그때부터 굴포스는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의 보물, 금빛폭포를 지킨 그녀의 동상을 입구에서 볼 수 있었다. 당시 그녀를 변호하던 변호사는 아이슬란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오후 3시쯤 굴포스 탐방을 마치고 다음 숙소가 있는 아이슬란드의 최남단 도시 비크 (Vík í Mýrdal)로 향했다. 굴포스에서 비크까지는 2시간 남짓 소요된다. 여름 시즌이라 그런지 우려했던 것과 다르게 도로 상황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간혹 길이 폐쇄되거나 노면 상태가 좋지 않은 구간도 있었지만 운전하기에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링로드 ( 1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보는 차 창밖의 풍경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한 시간 넘게 이 대단한 풍경을 보면서 이동하니 웬만한 멋진 풍경엔 첫날 같은 리액션이 덜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경이롭다. 굴포스에서 아이들은 에너지를 많이 쏟았는지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비크로 가는 길에 구글맵에 표시해 둔 폭포가 몇 군데 더 있었지만, 아이들도 꿀잠을 자고 있고 비크에서 저녁을 해결할 장도 봐야 했기에 그냥 패스하고 목적지로 바로 가기로 했다. 게다가 오늘 만난 굴포스가 워낙 거대하기도 했고 며칠 후 데티포스에 갈 예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루트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으로 차를 렌트해서 1번 국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이다. 1번 국도는 아이슬란드 섬의 가장자리를 동그란 모양으로 두르고 있어 링로드 ( Ring road)라고 불린다. 링로드로 여행하다 보면 웬만한 주요 관광지는 다 볼 수 있는데 그중 크고 작은 폭포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관광지로 지정될 만한 규모의 폭포도 이곳에선 이름도 없는 그냥 동네 폭포에 불과한 곳들이 많다.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즐기며 가고 있는데 건너편 방향에서 꽤 높은 산에서 폭포가 떨어지는데 장관이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지나치기로 했던 '셀야란즈 폭포 Seljalandsfoss'였다. 셀야란즈 폭포는 61m 높이로 화산 빙하에서 흘러나온 물이 떨어지는 거라고 했다. 폭포 뒤 동굴 같은 곳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냥 지나치기엔 좀 아쉬웠다. 아이들이 자고 있으니 주차장 근처에 가서 잠시 사진이라도 찍고 가자며 차를 돌렸다.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차량들이 꽤 많이 있었다. 알고 보니 2004년 이 폭포가 있는 싱벨리어 공원 전체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폭포 옆으로 무지개가 떠 있다.
살짝 아이들을 깨워 본다.
"얘들아~ 일어나 봐~ 우리 다른 폭포 앞에 왔는데 무지개도 있어. 사진 찍고 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는 아이들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 볼래요."
"사진 찍을래요."
단잠을 깨워 눈이 벌건 아이들인데 귀찮아하지도 않고 고맙다.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관리를 받고 있어서인지 주차비도 받고 (700 ISK) 매점과 화장실도 있다.
잠이 덜 깬 아이들이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폭포 뒤쪽까지 들어가 보겠다고 한다. 우리는 우비도 없고 ( 안타깝게도 받지 못한 수화물 안에 있다.) 오후가 되면서 기온이 꽤 떨어지고 있어서 혹시나 감기에 걸리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 엄마, 우리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곳은 가봐야지. " 적극적인 아이들의 모습에 걱정은 접어두기로 한다.
있는 옷 모두 껴입고 폭포 가까이로 갔다. 바람도 많이 불고 폭포 뒤로 들어가는 길은 거의 소낙비를 맞는 수준이다. 생활 방수가 되는 바람막이 점퍼를 입었지만, 우리의 청바지와 신발은 그야말로 홀딱 젖어 버렸다. 그런데 너무 신이 난다. 60m 높이 산에서 떨어지는 빙하수를 폭포 바로 뒤에 근접해서 볼 수 있다니,, 황홀할 지경이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이곳에 방문한 대부분 사람들이 폭포수에 홀딱 젖어 있는데도 아주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여벌 옷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라 매점에서 따뜻한 핫초코와 커피를 사서 주차장으로 돌아와 히터를 높였다. 청바지가 홀딱 젖어 벌벌 떨면서도 즐겁고 씩씩하게 모험을 즐기는 환브로가 참 대견하다.
이제 다시 vik를 향해 출발~~ 대자연의 파노라마가 이어진다.
저 멀리 산봉우리가 하얗다.
빙하다!! 빙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슬란드는 정말 하루하루가 대단한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