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버킷리스트를 위하여
오전 7시 반 일찍 잠에서 깼다. 잠결에 숙소 창밖을 보니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 겨울비 느낌이다. 나가보지 않아도 추운 게 느껴진다.
첫 번째 숙소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정이 다 되어 도착했는데 B&B 주인이 기다렸다가 반겨주고 간단한 설명도 해줬다. 숙소는 북유럽 스타일로 아주 깔끔함 그 자체. 전체적으로 화이트에 블랙으로 포인트를 준 인테리어가 공항에서 복잡했던 머리를 심플하게 환기시켜 주는 듯했다.
첫 번째 숙소도 그렇지만 우리가 예약한 7개의 숙소는 모두 Air bnb 형태로 조리가 가능하다. 아이슬란드의 여행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가족처럼 air bnb를 이용하거나, 또는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는 방식이다. 캠핑장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이슬란드의 숙소는 다른 나라처럼 많지 않아서 보통 6개월 전에는 예약해야 그나마 좋은 가격대의 숙소를 잡을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호텔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조식 뷔페가 있는 큰 규모의 호텔이 있긴 하지만 엄청 비싸다. 보통 2인 기준 70-100만 원 이상 되기 때문에 우리 가족과는 거리가 먼 옵션이었다.
전날 우리는 수화물을 잃어버렸다. 언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있는 거라곤 어제 공항에서 꺼내어 입은 옷이 전부다. 갑자기 잠이 확 깬다. 아직 신랑과 아이들은 꿈나라다. 바람막이 점퍼를 챙겨 입고 숙소 밖으로 나가 보았다. 숙소 뒤편 멀리 추운 겨울 바다가 보이고 드문드문 낮은 건물들이 보인다. 춥지만 여름시즌에 해당하는 이곳엔 낮은 풀들과 이끼들이 많다. 해안가 주변을 보니 현무암과 검은 흙이 보이는 게 제주도 느낌도 난다. 그래 여긴 아직도 화산이 분출하고 있다는 화산섬이다. 낯설지만 걱정도 되지만 이 새로움이 오늘 여행을 기대하게 한다.
"자기야! 뉴스 봤어? 하~~ 어떡하지?"
“무슨 일이야?”
“아이슬란드에 화산이 터졌대!!”
“뭐라고?? 그럼, 우리 아이슬란드 못 가는 거야?”
“아니, 공항 쪽은 다행히 문제없다네”
“근데, 뭐가 문제야?!?!”
“우리 일정을 바꿔서 화산 트레킹을 하자”
“뭐라고? 화산? 용암 보러? 아이들이랑? 자갸~ 미안한데 난 무서워~ 싫어 “
한국에서 출발하기 직전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소식을 들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예 입국이 안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했다. 하지만 신랑은 버킷리스트 중 한 가지를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난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분출하고 있다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두 초등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뉴스를 통해 하와이나 이탈리아 화산 분출 관련 사고 소식을 접할 때마다 끔찍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마다 신랑은 본인이 그 장소에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활화산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 화산이 곧 방문하게 될 미지의 세계 아이슬란드에서 터졌다니 신랑이 흥분할 만했다.
아이들과 독일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때 신랑은 몇 개의 화산트레킹 업체에 문의하고 이미 둘째 날 일정으로 예약했던 블루라군 온천에 가는 걸 마지막 날로 변경했다. 평소엔 곰처럼 게으른 그가 정말 일사천리로 여행 일정을 챙기는 거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바르셀로나 여행 중에 신랑한테 연락이 왔다. 예약한 화산트레킹 업체로부터 이메일이 왔는데 현재 화산가스 분출이 심해서 어린이(만 11세 이하)는 허가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화산의 상황이 마치 운명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난 만약 그럴 경우엔 아이들과 숙소 주변을 여행하고 있을 테니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항상 4인 1조 완전체를 지향하는 가족형 신랑이 아닌가? 혼자 가야 한다면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날 다시 온 이메일! 우리가 예약한 8월 19일 기상 상황과 유독가스 수치가 안전해서 11세 이하 어린이도 트레킹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우리는 화산트레킹 길에 올랐다. 이메일로 받은 미팅 장소는 VM8M+G9, 241 Grindavík
화산을 향해 달리는 차 창밖은 그야말로 외계 행성이다. 여기가 화성인가 싶다가 갑자기 아름다운 초원의 풀밭이 나타나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빨간 화산이 그려져 있고 3km라고 쓰여있다. 이상하다. 여기서 다시 화살표 방향으로 3km를 더 가야 주차장이 나온다는 표시였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처음 찾은 주차장은 지난해 용암이 분출했을 때 활용된 주차장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깊게 심호흡 한 번 하고 다시 차를 돌려 가다 보니 넓은 벌판에 차들이 많이 보인다. 이번엔 제대로 찾아온 거 같다. 어떻게 다들 알고 이렇게 찾아오는지 신기하다. 비는 그쳤지만, 날은 여전히 차갑다. 주차를 하고 약속한 가이드 미팅 장소(나무 표지판 앞)로 가는데 바위틈에 회색 뜨개 모자가 떨어져 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추운 날씨에 나의 본능이 움직여 모자를 주웠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내 머리에 써보니 좀 작은 듯하면서도 너무 따뜻하다. 아자뵹! 주운 사람 임자라고 그냥 내가 쓰기로 한다. 아이들은 안 된다고 했지만, 누군가 모자를 보고 자신의 것이라고 하면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운 좋게 주운 이 뜨개 모자는 결국 나의 아이슬란드 기념품이 되었다.)
약속한 나무 표지판 앞에서 화산 전문 가이드 David와 다양한 국적의 10여 명쯤 되는 팀원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환브로 뿐이다. 간단한 소개를 하고 주의 사항을 듣고 바로 출발했다. 처음 1~2km는 easy 코스라고 했고 그 후에 조금 오르막길이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아이들한테 우리 집에서 바닷가까지 2.5km 정도니까 왕복 3번 정도 하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가이드는 비만 안 오면 성공이라고 했다. 평지가 아닌 산을, 그것도 울퉁불퉁 돌산을 걸어야 한다는 건 나도 신랑도 몰랐고 이미 트레킹이 시작된 후에야 걸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가이드 말대로 처음 1.3km 구간은 감당할 수 있는 eazy 코스, 그 후 가파른 등반이 이어졌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길>
처음엔 용암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멀리서 볼 땐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산이 멀리 있어서였다. 3.6km 지점을 통과할 땐 이미 내 다리는 저세상에 있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드러난 용암천. 용암이 흐르다가 굳어져 검은 강물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장관이다. 작년에 터진 용암이 흘러 굳은 거라고 가이드가 설명해 줬다. 입이 딱 벌어진다. 연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보지만 1/00도 담기질 않는다. 용암이 흘러 굳은 걸 보니 환브로의 걸음이 다시 빨라진다. 하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울퉁불퉁한 돌밭이 이렇게 걷기 힘든 건지 처음 알았다. 등산화가 없었으면 나와 우리 가족의 발목은 성하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이런 고된 고행인 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걸어온 길이 아까워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다시 걷는다. 챙겨 온 에너지바와 아몬드를 조금씩 먹기도 하고 물은 아주 조금씩 나누어 마셨다.
돌산을 걷는 7km가 체감으로는 10km 이상을 걷는 느낌이다.
우리가 길을 걷는 동안 이미 용암을 보고 돌아오는 사람들과 간간이 지나치는데 가는 길만큼 오는 길도 힘들기에 서로 조금만 힘내라는 비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Did you see? “
“Yap! Beautiful “
“ How far from here?”
“ Almost”
질문도 짧고, 답변도 간결하다.
한참을 가다가 돌산을 정비하는 포클레인을 만났다.
화산트레킹 하는 길을 만들고 있는 거 같았다.
나도 모르게 포클레인 기사에게 소리쳤다!
“Thank you! Thank you so much!”
기사님이 미소로 화답하셨다.
가이드와 주변 사람들도 크게 공감하는 표정이다.
길이 만들어진 구간에 접어들자 여전히 비포장이지만 발목의 통증이 조금은 완화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더는 못 걷겠다고 주저앉을 때쯤 앞서 가던 사람들 발걸음이 빨라진다. 뭔가를 발견한 그들을 따라 내 발걸음에 다시 힘이 실린다. 그리고 저 멀리, 멀리서 연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헐! 용암이다! 진짜 용암이다!
검은 산봉우리 사이로 진한 오렌지빛의 잉크가 튀어 오른다.
아이들이 외쳤다! "엄마 용암이 '환타색'이야."
점점 가까이 다가가니 가스 냄새가 난다. 하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정말 진한 환타색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도 용암을 관람할 자리를 찾아 앉았다. 거대한 소리를 내면서 팡팡 튀기며 분출하는 거대한 용암은 삼성이나 LG전자 대리점의 UHD 화면 광고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원하던 활화산을 영접하게 된 신랑의 표정은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 신랑은 지구가 다른 방식으로 숨을 쉬고 있는 거 같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바다와 강도 지구의 활동인 것처럼 화산의 분출한다는 건 지구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
실제 용암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려환이는 더 가까이 가 보고 싶어 했지만 가이드가 위험하다고 말렸다. 실제로 위험을 무릅쓰고 더 가까이 가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 화산이 분출하기 시작한 지 벌써 2주 전이다. 8월 초 인터넷에 떠도는 영상에서 일부 사람들이 흐르고 용암 근처까지 간 모습도 봤다. 그래서 나도 사실은 흐르는 용암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2주가 지난 현재 상황은 용암 분출의 거의 마지막 단계라고 했다. 좀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래서 우리 가족 모두가 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실제로 우리가 화산 트레킹을 하고 3일이 지난 후 이곳의 화산 활동이 멈췄다고 전해 들었다.) 현실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려환이도 영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1미터 바로 앞에서 용암을 보고 불장난하듯 종이도 던져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고 한다.
배낭에 챙겨 온 샌드위치와 바나나를 꺼냈다. 펄펄 끓는 용암을 바라보며 먹는 점심의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게다가 우린 이 용암을 보기 위해 7km를 걸어 왔다. 식사를 마치고 한참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쌀쌀한 바람에 몸이 덜덜 떨린다. 이럴 땐 뜨끈한 컵라면이 딱인데... 우리나라 같았으면 화산 트레킹 구간에 컵라면이나 따뜻한 커피와 간식을 파는 매점이 있었을 거라고 신랑과 우스갯소리를 나눴다.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면서 특이했던 점 하나는 사람이 많이 몰리는 유명 관광지에도 이렇다 할 매점이나 상점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자판기는 물론 쓰레기통도 찾기 어렵다. 정말 자연 그대로를 간직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특히, 이 산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만 언제 또 화산이 분출해 용암을 뿜어낼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화장실도 어떠한 편의 시설도 없다. 둘째가 볼 일이 급해져 가이드한테 물었다.
가이드의 답변은 심플했다.
“Everywhere!!”
그렇게 려환이는 활화산에서도 영역표시를 했다.
이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다른 출구는 없다고 했다. 우리가 밟아온 돌밭을 그 길을 그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Oh my 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