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은 없고 달리만 있더라 >
숙소로 돌아와 내일 피게라스로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싸고 기차표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열었는데 이메일이 한 통 와있다. 8월 17일 밤 8시 예정이었던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리사이틀이 음악가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다른 피아니스트로 변경되었다는 내용. 내가 번역을 잘못했나(?) 하고 몇 번을 다시 읽고 또 읽고,, 공연 하루 전 취소라고? 게다가 환불도 불가하다는 내용이었다.
조성진의 연주 직관을 위해 먼 나라 스페인 그것도 피게라스까지 일정을 잡았는데 공연 취소라니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물론, 조성진의 피아노 리사이틀 관람만을 위해 이곳까지 온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미 내일 아침 피게라스로 떠나는 기차표와 숙소는 물론 달리 박물관까지 예약한 터라 공연이 취소된다 해도 우리의 여행 루트가 변경될 확률은 1%도 없었다.
예정대로 도착한 피게라스는 시골이었다. 오늘도 스페인은 30도가 넘는 무더움의 연속이다. 기차역에서 예약해 둔 숙소까지 택시를 탈 수는 있지만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그냥 걷기로 했다. 푹푹 찌는 더위지만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스페인 시골길을 언제 또 걸어보겠니 라는 생각에서였다. 지도상엔 1km였지만 울퉁불퉁 시골길에 정비되지 않은 보도블록은 훨씬 더 멀게 느껴졌다. 걸어가는 골목길마다 올리브 나무가 잡초 덩굴처럼 지천에 널려있다. 맞다. 스페인 하면 올리브 아닌가? 한국에서는 기르기 어렵다는 올리브 나무. 그것도 완전 오가닉 올리브다. 이런 시골에서 그런 독특한 초현실주의 천재가 태어났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 둔 숙소는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달리 박물관 바로 옆, 아니 딱 붙어있는 건물이었는데 7명의 일행이 여유롭게 쉴 수 있는 방 2개와 넓은 거실, 주방까지 갖춘 완벽한 숙소다.
https://goo.gl/maps/vKxJ2uy9NA2i3p8Y9
여장을 풀고 숙소 문을 열고 나가니 바로 옆문이 달리 극장( 달리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외관부터 압도적인 디자인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달리 작품을 보고 있으면 '내가 생각하고 상상한 건 다 현실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아이들이 달리의 작품을 보는 시선이 궁금했다. 아티스트 살바도르 달리는 본인이 자신을 '천재 화가'라고 부를 정도로 자신감이 있었고 그 자신감은 고스란히 그의 외모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달리의 재미있는 콧수염과 표정에 먼저 빠져드는 것처럼 보였다.
달리는 화가였지만 설치미술과 의상 디자인 등 여러 방면에서 본인의 재능을 선보였다. 아이들과 작품을 감상할 때 선정적이고 파괴적인 작품들이 꽤 많아서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아이들 눈높이에서 각자의 감성으로 해석했으리라 생각한다.
아이들이 박물관을 돌아보며 재미있게 보았던 작품들이다.
1. 달걀
달리 극장의 성탑과 미술관 꼭대기에 큰 달걀들이 올려져 있다. 새로운 삶과 탄생을 의미하는 달걀은 개미처럼 달리의 작품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친형이 죽은 후 형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 달리가 본인이 환생한 존재로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2. 개미
어릴 적 불안정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우연히 개미 떼가 박쥐를 갉아먹는 장면을 본 후부터 달리에게 개미는 '부패와 죽음'의 상징이었고 많은 달리의 작품에 등장하게 된다.
3. 시계
뜨거운 태양 아래 녹아내리는 까망베르 치즈를 떠올려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기억의 지속’에 나오는 흐르는 시계는 워낙 유명한 달리의 작품 중 하나이다. 달리 박물관 주변 기념품 가게들의 시계들도 모두 흐르고 있었다.
4. 메이 웨스트 방
아빠가 달리 박물관을 추천했을 때 "아이들이 꽤 좋아할 거야~" 했던 독창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공간. 보이는 게 다가 아닌 눈을 표현한 액자와 벽난로 코 뒤로 사람의 머릿속 생각을 상상할 수 있는 특이한 작품이다.
5. 패러디한 끔찍하고 기괴한 작품들,,
6. 피카소 패러디
피카소를 동경했지만 동시에 재능을 뛰어넘고 싶었던 달리의 재해석이 독창적이면서도 기괴하다.
조성진 리사이틀이 취소되어 공허했던 마음이 달리 작품들로 어느 정도 채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해서 피게라스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피게라스를 다시 방문하긴 쉽지 않겠지만 달리의 작품을 다시 볼 기회가 생긴다면 그땐 또 다른 느낌으로 감상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날 밤 조성진을 대신해 연주한 만삭의 피아니스트 Claire Huangci. 그녀의 열정적이고 용기 있는 연주는 같은 여자로서 또 다른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 중세 시대로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을 준 시골의 오래된 교회 음악당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고 큰 추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