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도 흔들릴 수 있어요.
크루즈 여행을 간다고 하니 지인들이 " 며칠 동안 배를 타는데 멀미 안 해요? 배가 흔들려 어지럽지 않아요?"등의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다섯 번의 크루즈를 경험해 봤지만 미세한 흔들림은 간혹 느낄 때가 있긴 하지만 메스꺼움을 느낄 만큼의 멀미가 나거나 어지러움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65,000톤의 큰 배가 움직이는데 그까짓 해풍정도에 기우뚱거릴 리가 없었다. 1912년 타이타닉이 침몰한 사건도 풍랑이나 기상악화가 아닌 빙산에 충돌하면서 생긴 사고였기 때문에 대형 크루즈선을 타는 걸 안전면에서 두려워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젯밤 뮤지컬을 관람하고 선실로 돌아오는데 "워~ 워~"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심한 흔들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잡이를 부여잡고 아이들을 봤다. "엄마~ 배가 많이 흔들리는 거 같아. 무서워~"
"무섭긴~ 바람이 많이 부나 봐. 그래도 밤이라 다행이다. 빨리 가서 자자."라고 했지만 너무 무섭다.
이렇게 흔들리는 배는 처음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배에 누워서 갈 정도로 멀미가 난다고 하길래 "에잉~ 크루즈는 안 그래요."라고 했었던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순간이다.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상황에서 현재 우리가 위치해 있는 바다의 기상이 어떤 상태인지 알 길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들도 복도에서 만난 크루들도 반갑게 인사하는 걸 보니 해상에서 이 정도 흔들림은 있을 수도 있나 보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다행히 하루종일 배안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터라 피곤한 아이들은 금세 잠이 들었다. 아마 베이비 요람처럼 흔들리는 배가 자장가 역할을 해줬을 수도 있다.
필요 없는 상상을 하다가 겨우 잠들었던 난 점점 출렁임이 심해지는 새벽이 되자 잠이 깼다. 아니 눈은 여전히 감고 있다. 어느새 난 머릿속의 움직임으로 흔들리는 배를 타고 서핑을 하는 것처럼 파도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타이타닉 영화에서 배가 침몰하고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쓸데없는 공상이라고 나 자신을 탓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배가 뒤집히면 차갑고 짠 물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창밖을 보니 검은 바다 위에서 열심히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우리 배의 옆면이 붉은 조명 탓에 파도 괴물로 보였다.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이들은 간간히 뒤척이긴 하지만 깨지는 않았다.
오만가지 상상으로 울렁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일출을 맞이했다. 적어도 어둠 속에서 배가 침몰하는 최악의 상황은 비껴간 듯했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어젯밤 극장에서 선장의 인사가 있었는데 밤새 얼마가 고생했을지 다시 한번 기립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선실이 있는 8층은 뱃머리와 연결되는 복도로 통한다. 용기를 내어 단단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배가 뒤집힐 위험에 있어도 지금의 상황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나의 욕구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직업 정신 투철한 기자가 되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여전히 배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중심을 잡아가며 가판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어제와 다름없이 썬베드를 펴는 크루들, 카페로 출근해 모닝커피 서비스를 준비하는 직원들. 그들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각자의 아침을 맞고 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저들을 보니 적어도 배가 침몰해 CNN뉴스에 나오거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일은 생기지 않을 거 같았다. 또다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섬에 가까이 왔는지 와이파이도 다시 연결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 크루즈배가 흔들리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이젠 "기상에 따라 흔들릴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