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우개연필 May 16. 2017

누구보다 즐겁게

노래를 부르던지 춤을 추던지 하면서

나는 한적한 산골 생활을 하긴 전,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도시의 일상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세상의 많은 일터들처럼, 한때 내가 근무하던 연구실에서도 일이 몰리는 시기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연구사업이 시작되기 전 사업계획서를 발표하는 시기와 중간보고를 해야 하는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업 종결 후 최종보고서를 쓰고 사업보고를 해야 하는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한 번에 하나의 연구사업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통 내가 맡아서 관리해야 하는 사업은 3개 정도 되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어느 정도 연차가 쌓여 담당하는 일들이 많아지게 되면 교수님께 끊임없이 불려 가 계획서와 보고서를 수정하는 일을 끝도 없이 반복해야 했다. 완벽을 추구하시는 우리 교수님 마음에 드는 완벽한 결과물은 아마도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언제나 무엇인가가 모자란 채로 나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중간보고와 최종보고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일이 몰리는 시기가 되면, 특히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고 발표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가 되면 야근은 당연한 것이 되고 새벽 출근도 마다할 수 없었다. 새벽에, 그러니까 보통 출근시간보다 겨우 한두 시간 전일 뿐이지만 엄청나게 새벽이라고 느껴지는 어두컴컴한 6시 정도가 되어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서면 내가 세상 모든 일을 다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이러다가는 정말 나도 성공이란 것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으로 지하철을 탄다. 어쩌면 첫차일지도 모를 그 지하철을 탄다. 그러면 그 안에서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자랑스러워하던 나의 열심이 사실은 얼마나 일상적인 것인지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새벽 첫 지하철을 타도 언제나 그곳엔 나보다 먼저 집은 나선 이들이 있었다. 그 새벽부터 무언가를 외우느라 열심인 학생들도 있고 피곤해 보이지만 동시에 단호해 보이는 얼굴로 출근하는 아주머니들도 계신다. 직장인도 많고 때론 밤새 일을 하고 그 시간에 집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역에서 내려 연구실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길에서도 나는 새벽잠을 마다하고 나와 일찍부터 부지런히 인쇄기를 돌리고 있는 인쇄소 직원들과 환경미화원, 장사를 준비하는 식당의 불빛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결코 비상하게 일찍 일어나지도, 혼자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만나게 된다. 새벽에 출근한다는 것이 반드시 많은 일을 하는 것과 직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출근조차 하기 싫어 늦장을 부리던 날도 많았던 나에게 야근과 새벽 출근은 '열심히 사는 삶'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가끔인 새벽 출근을 일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그 이른 시간에 나가보면 알게 된다. 그리고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여전히 많이 게으르다고 살짝 부끄러워하며 서둘러 조용히 연구실로 들어가곤 했다. 


정신없이 바쁘던 도시를 떠나 산골에서 산지 5년 차. 그러나 산골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더 부지런하다. 해가 뜨기도 전부터 밭에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고 나서도 집에 돌아와 가축을 먹이느라 바쁜 농촌의 일상. 나는 모종 몇 개를 얻어 놓고 이제야 겨우 작은 농사를 시작해볼까 궁리를 하는데 남의 밭엔 이미 농번기가 찾아와 있다. 아무리 보아도 나는 남보다 부지런히 일해서 성공할 운명은 아닌 듯싶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란 것을 꼭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나 스스로를 대견해할 만큼 열심히 사는 것 같은 순간에도 언제나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열심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가끔은 김이 좀 빠진다 싶기도 하다. 그래, 열심히 사는 것으로 최고가 될 수 없다면 나는 다른 전략을 세워야 한다. 나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즐겁게 사는 것에는 최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들이 찾아와도 불평하지 않고,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부지런하되 그 누구보다 즐겁게 사는 것 말이다. 그거라면, '즐겁기'이라면 '부지런하기'보다는 훨씬 자신 있다. 해볼 만하다.


오늘은 땅을 일구고 비닐을 깔아 밭을 만들고 이 모종들을 심어야 할 텐데 이걸 누구보다 즐겁게 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겠다. 누구보다 빨리 심는 것도, 누구보다 많이 심는 것도, 누구보다 예쁘게 잘 심는 것도 할 수 없다면, 나는 누구보다 즐겁게 심는 사람이 될 테다. 챙이 넓은 모자를 찾아 쓰고 나가 노래를 부르던지 춤을 추던지 하면서 올해 농사를 시작해보자.




* 그저 그런 평범한 모종이지만, 특별히 즐겁게 심은 올해의 모종 대표선수들.



매거진의 이전글 옥수수,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