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속의 그녀와 약속을 잡고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사실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오래전이지만 날짜와 시간을 정한 것은 어제의 일이다. 두근거리며 갑자기 찾아올 진통을 기다리게 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내 예상을 뒤엎었다. 마지막달이 되기까지 바른자세를 유지하던 그녀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막달에 거꾸로 돌아 앉았기 때문이다. 다시 정자세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고양이자세를 열심히 해 보고 짐볼을 타보기도 했지만 그녀는 한번 정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물론 역아라고 해도 자연적인 방법으로 만날 수 있지만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날짜를 잡아 수술을 하기로 했다. 전체 아기의 4%가 역아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녀는 남다른 포즈를 좋아하는데다가 깜짝 놀래켜주는 일을 즐기는 사람인가보다.
39주가 되는 4월 5일 오전으로 우리는 약속을 정했다. 안타깝지만, 약속시간을 잡는데 그녀의 의견을 들어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몸무게가 3kg이 넘었다고 하니 그녀도 준비가 어느정도 되었으리라 짐작하며 우리는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 약속을 정했다. 식목일 아침에 우리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의 생일이 식목일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나무를 심어야 할 것 같아서 우리는 오늘 기념식수를 하기로 했다. 식목일 당일 아침에 그녀를 낳으러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나무를 심을 수는 없기 때문에 아직 자유의 몸인 오늘, 그러니까 식목일 이틀 전 우리는 나무를 심는다. 나무시장에 가서 꽃이 많이 맺힐 것 같은 아기산수유를 골라 데려와서, 이 아기산수유를 집 마당 볕이 잘 드는 한적한 공터에 고이 심을 것이다. 마침 식목일 아침에는 비가 내린다고 하니 하늘에서 내려주는 비를 머금고 뿌리도 잘 내리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지난 시간 내내 '기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처음 존재를 드러내었을 때부터 그녀는 나의 그리고 남편의 기쁨이었고 가족 모두와 동네 어르신들의 기쁨이 되어주었다.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채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던 이유 중 하나가 어쩌면 이 이름때문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부를 때마다 어디선가 정말 알 수 없는 기쁨이 생겨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름과 별도로 평생을 그녀가 가지고 살아갈 또 다른 이름을 주고 싶었다. 여러 후보를 정해놓고 남편과 나는 즐거운 고민을 했다. 그녀가 쑥쑥 크는 동안 그녀의 이름은 이것이었다가 저것이었다가 여러번 바뀌고 또 돌았다. 수십개의 후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손에 꼽을만큼의 소중한 단어들을 두고 이리저리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된 하나의 이름.
봄. 김봄.
이름의 뜻은 말 그대로 '봄'이다. 생명이 가득한 봄, 따뜻한 봄, 꽃이 피는 봄. 우리가 봄이 오면 느끼는 모든 좋은 것들을 품고 남편과 나는 아이의 이름을 김봄으로 정했다. 이름을 정하고 나니 다른 의미들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본다'는 의미를 함께 담고 싶기도 하고 남북의 화해분위기 속에 평양에서 개최된 공연의 제목이 '봄이 온다'라는데 그것도 어쩐지 남다르게 여겨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맘에 깊이 와 닿은 한가지가 있다. 이름을 정하고 난 어느 예배시간에 불렀던 찬송가의 가사이다.
만유의 주재 2절
화려한 동산 무성한 수목 다 아름답고 묘하나
순결한 예수 더 아름다와 봄같은 기쁨 주시네
봄같은 기쁨이라니. 세상 어떤 아름다운 것들보다 그 분이 더 아름다와 봄같은 기쁨을 주신다니. 어찌보면 너무나 흔하고 평범한 것이 마음에 살짝 걸리던 '봄'이라는 이름이 이 순간 이후로 단 하나의 이름인 것처럼 특별하게 여겨졌다.
2018년의 봄. 남편과 나는 여전히 철이 없지만, 그는 봄이 아빠가 나는 봄이 엄마가 되었다. 일단 시작은 좋다. 배는 좀 아프겠지만 지나갈 고통이고 그에 비해 봄이는 너무 예쁠테니까. 나 스스로에게, 잘 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더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묵묵히 나를, 그리고 그를 응원해주기로 했다. 진정한 팀플레이가 필요한 장기프로젝트의 시작, 우리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곧 울릴 본게임의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