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깨고 나오려면 안팎에서 입을 맞추어야 한다
늦은 밤 산책을 한다. 아픈 어깨 스트레칭을 하면서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면서 이병률 시인을 생각한다. <이어도공화국 6 - 서천꽃밭 달문 moon> 시집 원고를 메일로 보냈다. 표사를 이병률 시인이 써주기로 하였다. 참 고맙다. 그동안 연락도 자주 하지 못했는데 선뜻 써주겠다고 하여 참으로 고맙다. 나는 그동안 문단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았다. 나는 다시 문단 안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문학활동을 본격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언제 이 지상에서 떠나게 될지 모르지만 떠나는 그날까지 문인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나의 작은 숨결이라도 보태야만 할 것이다.
나와는 달리 이병률 시인은 그동안 참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외모와 뼛속까지 시인인 그는 마음이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하고 참으로 잘 살아왔다. 그에게서 나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는 선한 영향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길을 알려주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받고 있다. 앞으로 나에게도 선한 영향력으로 나를 깨달음의 세상으로 인도할 것 같아서 마음이 설렌다.
오늘은 자꾸만 '그러데이션'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서천꽃밭 표지 생각을 하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녹색에서 연두색으로 연두색에서 다시 노란색으로 번지는 색상을 생각하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석양의 노을을 생각하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푸른 바다와 붉은 노을과 불타는 구름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생각하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그러데이션'이란 말이 나의 가슴속까지 환한 색으로 번지게 하는 것만 같다.
나는 오늘도 두 편의 꿈을 꾸었다. 꿈을 자꾸 꾼다. 꿈이 많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젊은 문인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운영을 한다기보다는 그냥 아름다운 공간을 내주었다. 많은 시인들이 자유롭게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글을 쓰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꽃씨도 무료로 나누어주고, 물도 주고 간식도 무료로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능표 시인도 만나고 김종순 박사님과 송예진 후배님도 만났다. 조현석 시인도 만나고 나희덕 시인도 만나고 이병률 시인도 만나고 함민복 시인도 만났다. 참 좋은 곳이었다. 꿈속에서 만난 공간은 서울이었는데, 꿈속을 빠져나와 생각하니 무슨 계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에 그런 곳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런 곳을 하나 꼭 만들고 싶어졌다.
요즘 들어 더욱 꿈을 자주 꾼다. 두 번째 꿈은 무서운 꿈이었다. 꿈속은 전쟁터였다. 꿈속에서도 나는 가끔 전쟁을 한다. 정권이 바뀌면서 전쟁에 대한 공포가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꿈속에서도 자꾸만 전쟁을 한다. 정권이 바뀌니 혹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전쟁은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는다. 내가 먼저 살아남기 위하여 짐승이 된다. 짐승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악마가 된다.
밤 산책을 하면서 2년 전 가을에 만남 이병률 시인 생각이 났다. 서귀포예술의 전당에서 <혼자가 혼자에게> 독자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때 받은 책에 나는 메모를 하였다. 선택장애가 있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기획한 책이라고 하였다.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기획한 책이라고 하였다. 부모들의 과잉보호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 할 줄 모르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기획한 책이라고 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줄탁'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줄탁이라는 말은 주로 줄탁동시(啐啄同時) 혹은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로 쓰인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미 닭이 밖에서 쪼고 병아리가 안에서 쪼며 서로 도와야 일이 순조롭게 완성됨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다. 즉, 생명이라는 가치는 내부적 역량과 외부적 환경이 적절히 조화돼 창조되는 것을 말한다.
안에서 쪼는 것이 '줄(啐)'이고 밖에서 도와주는 것이 '탁(啄)'이다. 줄(啐)은 '쫀다'기 보다는 '입으로 뭔가를 빤다'는 뜻에 가깝다. 얼마나 부드러운 동작이면 이렇게 표현을 하였을까. 탁(啄)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듯이 세게 쪼아대는 동작이다. 알껍질을 자세히 본다. 바깥쪽은 거칠고 단단하지만 안쪽은 상대적으로 연하고 부드러운 재질이다. 병아리는 사실 알을 스스로 깨기 위해서 두드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깥을 향해 '여기를 좀 열어주세요'라고 하는 메시지에 가까운 줄(啐)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부리가 있는 곳에 머리가 있기에 그쪽으로 나와야 하는 상황을 알리는 셈이다. 어미는 그걸 알아듣고, 막 소리가 난 그쪽을 세게 쪼아 뚫어준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도 하지만 줄탁동기(啐啄同機)라고도 한다. 병아리가 '줄'할 때를 맞춰 동시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딱 소리가 난 그 자리를 찾아 마치 병아리의 부리와 어미의 부리가 입을 맞추듯 서로를 찾아내는 것이 '동기(同機)'의 의미다. 엉뚱한 데를 쪼았다가는, 병아리가 껍질을 벗는 일이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줄탁동시는, 정말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병아리가 먼저 두들긴 자리를 찾아 어미가 그다음 아기가 쫄 때를 맞춰 쪼는 '타이밍' 포착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모체와 새 생명이 조우하는 순간의 본능적인 동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알을 깨는 일이란 존재의 혁명이다. 스스로를 깨고 나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스트레스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당연히 존재한다. 밖에서는 그것을 살펴 마음의 껍질부터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먼저다. 밖에서 아무리 돕는다 하더라도 안에서 필요한 건 스스로 해야 한다는 자립심도 중요하다. 이병률 시인은 늘 말한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이병률 시인은 어떤 힘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었을까. 나는 그것부터 배워야겠다. 이병률 시인은 출판사 대표로 좋은 책들을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식물들을 가까이 하면서 산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고 시를 쓰고 산문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모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인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특히 그는 사진에 이야기를 담을 줄 아는 시인이다. 나의 꿈이 사진에 이야기를 담고 사진으로 시를 쓰고 사진에서 향기가 묻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는데 바로 이병률 시인이 그것들을 잘하는 것 같다. 나도 좀 배워서 시도를 해보아야겠다.
나는 지금 나의 알을 깨기 위하여 안에서 벽을 쪼고 있다. 아니, 벽을 빨고 있다. 밖에서 나의 알을 쪼아줄 딱따구리는 어디에 있을까. 나와 입을 맞추어줄 어미닭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 나의 어둠 속에도 한 줄기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나의 또 다른 심장 하나가 둥둥둥 북을 치며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