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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Apr 05. 2024

마라도에서 돌아본다

꿈삶글 115



마라도


태풍이 자주 다니는 길을 따라서 오는데

오늘은 주름치마 입은 파도가 안내를 한다

마라도 등대가 보인다 장군바위가 맞는다

대한민국최남단 표지석 앞에서 물질을 한다

나의 전생의 어머니 숨비소리도 들린다

포작이었다는 할아버지 목소리도 들린다

퉁소를 불어서 뱀들을 몰아냈다는 마라도

늙은 아버지는 오늘도 빈 퉁소를 불고 계신다

늙은 해녀들은 이제 먼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톳짜장에 넣을 톳을 할망 바당에서 뜯고 있다


마라도에서 돌아본다


이어도에서는 젖꼭지만 보이던 한라산이 훤히 다 보인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면 아직도 젖물이 나올 것 같은

한라산의 가슴이 통째로 다 보인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스르르 잠이 올 것만 같다 꿈처럼 살았던 이어도의 생활

마라도에서 돌아보니 이어도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다

서복님과 부처님과 예수님 이야기를 윤동주 시인과 한다


다시 돌아보니 가파도와 송악산과 산방산과 한라산이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항공모함처럼 생긴 마라도가 기적을 울리며 움직인다


마라도에서는 가끔 고구마 굽는 냄새도 솔솔 피어오른다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이어도에서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까지


1.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2.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해(海) 1번지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태평양로 1
이어도 섬을 당신은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이어도를 아시나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섬
하늘과 바다를 이어주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
태평양으로 날아가는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제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꿈꾸어 오던 섬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뿌리 깊은 섬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의 꿈을 아시나요

 3. 노인성이 유숙하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혁신도시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이어도 길을 걷다가 태평양으로 간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을 만나러 간다
남극노인성이 유숙하는 이어도로 간다

바다에서 해(海)를 본다 물이 아프다
인간들의 욕망이 낳은 쓰레기들의 섬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욕망들의 얼굴,

바다 해(海) 글자를 더 자세히 본다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프다
아픈 어머니에게 방사능 오염수까지 먹인다
태평양의 수평선이 트로이목마를 끌고 온다
북극곰의 신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막내아들이
뜨거운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다
유숙하던 노인성도 곁에서 돕는다
서천꽃밭 꽃감관도 불사화를 가져온다

용궁으로 가는 올레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온다 하늘에는 서천꽃밭이 있고 땅에는 마고성이 있고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노인성과 꽃감관도 떠나지 못한다

4.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한 송이 있다

전설이 낳아 기른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가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태평양의 배꼽을 찾았다 태반과 탯줄을 잃은 배꼽을 이어도라 불렀다 이어도는 제주도 사람들의 고향이었다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배꼽을 보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소코트라록(Socotra Rock)'이라 불렀다 하지만 오래도록 이어도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배꼽을 보고 싶었으나 배꼽을 볼 수 없었다 배꼽에 관한 소문만 무성했다

1984년에 비로소 태평양의 배꼽을 볼 수 있었다 KBS와 제주대학교 해양대학이 파랑도 탐사에 성공했다 한국해양소년단 제주연맹의 파랑도 탐사도 성공했다 파랑도는 그렇게 이어도와 만났다 꿈이 현실로 드러났다 1986년에 암초 수심이 4.6m로 측량되었다 이어도 최초의 구조물  ‘이어도 등부표’를 1987년에 설치했다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1995년 해저 지형을 파악하고 조류를 관측하는 등 현장조사를 실시하여 2001년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가 착공에 들어갔고, 2003년 6월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벌써 스무 살 성인이 되었다

해양, 기상, 환경 관측 체계를 갖추고 해양 및 기상, 파고, 수온 등 해상 상태와 어장 정보, 지구 환경 및 해상 교통안전, 연안 재해 방지와 기후 변화 예측에 필요한 자료를 실시간으로 수집, 무궁화 위성을 이용, 관측 정보를 제공하며, 국립해양조사원에서 데이터 검증을 거쳐 기상청을 비롯하여 관련 기관에 실시간으로 자료를 제공한다

해저 지반에 박은 60m의 기초를 제외하고도 수중 40m, 수상 36m, 총중량 3,400t의 구조물이다 400평 규모의 2층 Jacket형 구조물엔 관측실, 실험실, 회의실이 있고 기지의 최상부에 가로 21m, 세로 26m에 이르는 헬기 이·착륙장 외에, 등대시설, 선박 계류시설, 통신 및 관측시설 등과 8인이 15일간 임시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마라도에서 149Km 가장 먼 해상에 설치된 해양과학기지는 평화의 연꽃으로 피어났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끝없는 도전의 상징이 되었다 제주도 생성시기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60만 평의 이어도 소코트라 암초,  그 위에 세워진 76m 높이의 철탑 위에 400평의 섬을 만들었다 사랑의 연꽃을 피웠다 3400톤의 쇳물로 평화의 심장을 만들었다 태평양의 배꼽에서는 이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린다 잃어버린 탯줄과 태반을 드디어 다시 찾았다


5.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이어도는 태평양에 있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는

북위 32° 07′ 22.63″ 동경 125° 10′ 56.81″에 있다


이어도는 한․중․일 3국 중 한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의 유인도 마라도(馬羅島)에서 남서쪽으로 80해리(149km)

일본의 도리시마(鳥島)에서 149해리(276㎞) 

중국의 서산다오(余山島)에서는 155해리(287㎞) 떨어져 있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바다의 거리는 236해리(436㎞)에 불과하다 배타적 경제수역(EEZ) 200해리(370.5㎞)의 두 배인 400해리(741㎞)가 되지 않을 경우 양국은 협상을 통해 해양경계를 획정해야만 한다 일반적인 획정 원칙인 ‘중간선 원칙’을 적용하면 당연히 한국의 관할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자꾸만 자기들 바다라고 우긴다


이럴 때는 시인들이 먼저 나서야만 한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시인들이 손을 잡고

이어도에서 평화의 연꽃을 피워야만 한다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섬이 되어야만 한다


이어도문학회와 이어도연구회가 손을 잡고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이 되어야만 한다


6. 여섬이 되었네


이어도는 최고

대상군 해녀네

깊은 물속으로

한 번 들어가서

나올 줄 모르네

비바람 불어도

모습 안 보이네

태풍이 불어도

나오지를 않네

해양 과학기지

테왁처럼 떠서

님을 기다리네

용궁으로 떠난

님을 찾아 나선

긴 사랑의 물질

끝날 줄 모르네

숨비소리 없이

돌아오지 않네

나도 님 찾아서

이어도로 가네

사랑을 찾아서

여의도로 가네

전복보다 좋은

여섬으로 가네

이어도 여의도

여섬이 되었네


7. 이어도와 여의도


이어도라는 말의 어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여섬>이 변해서 <이어도>가 되었다는 설을 저는 믿습니다

'여'를 길게 발음하면  '이어'가 됩니다

여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말합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어도를 여섬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여섬을 문자로 표기하면서 이어도라고 표기를 했다고 합니다

여섬 이여도 이어도 등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에는 여의도가 있습니다

여의도라는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인 양말산은 홍수에 잠길 때도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말장난처럼 부르던 것이 한자화되어 여의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의도(汝矣島)는 汝(너 여) 자를 씁니다


이어도와 여의도는 재미있는 관계입니다

여의도 또한 <여섬>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데

이어도 또한 '나의 섬' '너의 섬'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어도는 자신의 존재를 물속에 숨기었고

여의도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두 섬의 운명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 이어도(離於島) 이야기


섬을 뜻하는 한자를 보면, 섬도(島)는 바다에서 새(鳥)가 앉아있는 산(山)이고, 섬서(嶼)는 도(島)에 더불어(與) 있는 산(山)이다.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사람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큰 섬은 도(島)이고, 살 수 없는 작은 섬은 서(嶼)이다. 그래서 도서(島嶼)는 ‘크고 작은 온갖 섬’을 뜻한다.


물에 잠겨 섬이 되지 못하는 바위를 초(礁)라 한다. 잠길 듯 말 듯 아슬아슬 애를 태우는(焦) 바위(石)라는 의미다. 드러난 바위가 노초(露礁)이고, 잠긴 바위가 암초(暗礁)다. 배가 다니다가 초(礁)에 올라앉으면 좌초(坐礁)다.


그러면 밀물에 잠기고 썰물에 드러나는 바위를 뭐라고 할까? 간출암(干出巖)이다.


초(礁)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여’다.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다. 썰물에 드러나는 바위가 ‘잠길여’, 드러나지 않는 바위가 ‘속여’다. 물때에 따라 잠기느냐 드러나느냐를 놓고 이름을 다르게 붙인 것이다.


같은 뜻인 '여'와 초(礁)와 rock을 비교해 보면 우리 민족이 바다를 얼마나 유심히 관찰했고, 우리말이 얼마나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라도 서남쪽 149km 지점에 매우 큰 '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서로 1.4km, 남북으로 1.8km의 크기(수심 50m 기준)에 가장 높은 곳이 수심 4.6m 정도라, 파도가 매우 사나워지면 가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들은 이 '여'를 ‘여섬’이라 불렀다. '여섬'은 용궁으로 떠나는 ‘나루터’였다. 그물질 나간 어부나 물질 나선 해녀가 돌아오지 않으면 '여섬'에 들러 용궁으로 갔다고 믿었다. '여섬'은 바닷속에 있는 ‘저쪽 언덕’, 곧 피안(彼岸)이었던 것이다.


소설가 이청준의 작품에는 '여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라고 표현돼 있다.


가수 정태춘은 ‘떠나가는 배’에서 '여섬'을 ‘평화의 땅’, ‘무욕의 땅’이라 불렀다.


민담 속의 '여섬'이 역사의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100년쯤 전이다.


영국 해군이 소코트라 록(Socotra Rock)이라 부른 데 이어 난데없이 일본이 파랑도(波浪島)라는 딱지를 붙였다. 제주대와 KBS는 1984년 공동 탐사를 통해 소코트라 록 (Socotra Rock)과 파랑도(波浪島)가 '여섬'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3년 뒤 해운항만청이 부표를 설치하고 2001년 국립지리원이 지명을 확정하면서 '여섬'은 공식 명칭을 갖게 됐다. 바로 ‘이어도’다. 장모음 ‘여’를 ‘이어(離於)’로 쓰고, ‘섬’을 도(島)로 붙인 것이다.


1993년 김시중 과학기술처 장관은 해양연구소 이동영 박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10년 만에 '이어도(離於島)' 해양 과학 기지를 건설했다.


20년 뒤인 지금 벌어지고 있는 동아시아의 해양 분쟁을 내다본 선견지명(先見之明)이다.


해양 과학 기지 건설을 주도한 한국해양과학 기술원의 심재설 박사는 말한다. “분쟁이라고요? 세계적으로 알만한 해양학자들은 '이어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해양과학기지가 생긴 뒤 '이어도'에 관한 논문이 매년 30편 정도 국제학술지에 실리고 있고, NASA

(미국항공우주국)에도 '이어도'에서 관측한 해양 기상 정보가 시시각각 업데이트 되고 있다.


이 논문과 자료에 ‘이어도 코리아(Ieodo Korea)’라는 출처가 따라붙는다. 민담에서 ‘저쪽 언덕 (저승)’이었던 '여섬'인 '이어도(離於島)'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만든 것은 우리 과학자들이다.


마라도 이야기     


한국 최남단의 섬으로 면적 약 9만 평, 최장길이 약 1.3km, 모슬포에서 남쪽으로 11km 해상에 위치한다. 운진항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소요되는데, 정기 여객선과 관광 유람선이 하루 수 차례 왕복 운항하고 있다. 마라도는 위에서 보면 고구마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평평하나, 등대가 있는 동쪽으로는 해풍의 영향으로 기암절벽을 이룬다. 등대가 있는 가장 높은 곳이 약 해발 39m다. 서쪽 해안은 해식동굴이 발달되어 있으며 섬 중앙에서 서쪽 기슭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주민들은 약 130여 명(2015년 기준)으로, 주로 어업에 종사하나, 관광객이 늘어나면 민박을 겸하는 주민들이 많다. 



마라도에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영세 농어민 4,5세대가 당시 제주 목사로부터 개간 허가를 얻어 화전을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이 이주했다고 한다. 《탐라순력도》(1702)의 麻羅島(마라도:칡넝쿨이 우거진 섬)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라도는 본래 원시림이 울창한 숲이었는데, 화전민 개간으로 숲이 모두 불태워져 지금은 섬 전체가 낮은 풀로 덮여있다. 푸르른 초원 군데군데 작은 건물이 서있으며, 가을에는 억새가 만발하는 장관을 볼 수 있다.

마라도의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마라도등대는 전 세계 해도에 꼭 기재되는 중요한 등대로, 이 지역을 항해하는 국제 선박 및 어선들에게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등대 주변으로는 전 세계 유명 등대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볼거리가 있다. 



마라도는 섬 전체가 가파르지 않아 남녀노소 부담 없이 거닐 수 있다. 섬 한 바퀴를 다 도는 데는 1-2시간이면 충분하다.

마라도에서는 무엇이건 모두 최남단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마라도성당과 기원정사 등 종교시설과 분교, 짜장면집까지 있다. 마라도의 남쪽 끝에는 최남단비가 있어 인증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마라도에 도착해 섬의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 때,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할망당’ ‘처녀당’ ‘비바리당’ 등으로 불리는 마라도의 본향당(本鄕堂) 당이 있다. 당이래야 돌담을 둥그렇게 쌓아두고 그 안에 제단을 마련한 것이 전부지만, 이곳에는 마라도의 잠녀들의 안녕을 지키고 뱃길을 무사히 열어주는 본향신이 모셔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당이 있는 바위에 올라서면 바람이 세게 분다 하여 이를 금기 또는 신성시하고 있다.

'아기업개당'으로도 불리는 이 본향당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날 마라도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 적에 마라도에는 해산물이 풍부하여 모슬포 잠녀들이 배에 식량을 싣고 와서 며칠 씩 물질을 하였다. 어느 해인가 모슬포 잠녀들이 아기와 아기를 돌보는 ‘애기업개’를 데리고 배로 마라도에 바다 일을 하러 왔다. 며칠 간의 바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니까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거세어 삼사 일간 나갈 수가 없어 굶어 죽을 판이 되었다. 그날 밤 상군 잠녀의 꿈에 누군가 나타나 이르기를 애기업개를 놔두고 떠나야 섬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꿈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모두 굶어 죽을 판이라 사람들이 의논하여 꿈에 들은 대로 하기로 하였다. 애기업개를 어떻게 떼어 놓을까 하다가 모두 배에 타고서 애기업개에게 아기 옷을 두고 왔다고 하여, 가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애기업개가 배에서 내리자 바람이 잦아들어 배는 순조롭게 돌아올 수 있었다. 같이 데려가 달라며 손을 흔들고 발버둥을 치는 애기업개를 두고 온 사람들은 내내 마음에 애기업개를 담고 살아야만 했다. 애기업개의 애원을 뒤로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해가 바뀌어 다시 마라도에 바릇잡이를 가보니 애기업개는 돌 엉덕(언덕)에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애기업개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컸던 사람들은 그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마라도를 찾는 잠녀들은 그 자리에 ‘애기업개당’을 짓고 해마다 당제를 지내게 되었다. 애기업개인 자신만을 두고 가서 굶어 죽게 한 사람들에게 원한이 있으련만, 원혼을 위로하는 제를 지내고, 해마다 당제를 지내니 마을의 본향당으로 자리를 잡아 마라도의 생활을 관장하는 당신(堂神)이 된 것이다.



::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 :: (jejumarado.com) : 링크 클릭하면 시설별로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일기(20190919) 2. 마라도 이야기


도박 생각만 해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기분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니 탁 트인 마라도의 풍경이 떠올랐다. 봄과 가을의 마라도가 떠오른다. 여름의 마라도는 너무 습하고 답답하다. 겨울의 마라도는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봄과 여름의 마라도는 다른 관광명소보다 아름답진 않지만 내 가슴속엔 아름답게 남아있다.

그때는 오직 전역 날만 기다리며 생활했다. 나는 전혀 믿지 않았다. 전역하면 군대시절이 떠오르고 그때가 좋았지 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물론 내가 마라도에서 군대를 나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더럽혀진 나는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내 근무만 하면 됐었던 그때가 그립다. 풍경도 몸도 마음도 푸르던 그때가 그립다.

다행이다. 방금까지 도박했던 경험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다 다시 마라도를 생각하니 정신이 맑다. 도박했던 경험을 쓰라면 100장은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천히 쓰고 싶을 때마다 쓰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 글들을 다시 읽으니 마라도 생활 중 정말 컸던 은지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 좀 더 보완을 하고 싶어졌다. 우선 은지 이야기는 뒷부분에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소위 말하는 관종이었다. 관심종자.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예전보다는 관심받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 그렇게 관종인 나에게 있어서 군대를 마라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근무할 때에는 대원이 3명이었다. 2020년에는 의무경찰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제 경찰공무원이 배치되어 마라도 대원노릇을 할 것이다. 의무경찰이 사라진다고 하니 현동이가 떠오른다. 나는 왜 술만 마시면, 부모님 얘기가 나오면 어느 정도 이성을 잡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현동이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하염없이 울고 만다. 현동이가 언제면 나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하는 날이 올까 현동이가 보고 싶다. 현동이는 의무경찰 시험을 계속 보고 있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하루빨리 붙었으면 좋겠고 또 한편으로는 현동이가 입대를 한다면 내가 엄마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빨리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현동이가 입대를 한다면 엄마가 아마 절에 들어가실 것 같아. 벌써 죄책감이 들고 외롭고 쓸쓸하다.

다시 우울해졌다. 아무튼 내가 서귀포경찰서에서 타격대 신병 생활을 하면서 보물섬 이야기처럼 나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이야기가 바로 마라도와 가파도 이야기였다. 섬 이야기는(물론 제주도도 섬이지만) 주로 자기 전 밤에 몰래 몇몇 선임들과 몇몇 후임들끼리만 은밀하게 주고받았다. 일종의 찌라시였다. 이렇게 은밀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후임들이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선임들이 알면 서귀포경찰서에서 도망가는 것처럼 보여 찍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의경은 일주일에 한 번 외출을 나가기 때문에 제주도에 그냥 남아있고 싶거나 여자 친구가 있는 대원들은 마라도나 가파도에 가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난 여자 친구도 없었고 개인정비시간이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자기 계발을 하고 싶었던 나는 정말 가고 싶은 꿈의 섬으로 자리 잡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마라도와 가파도에는 서귀포경찰서에 소속되어 있는 각 3명씩의 대원 중 한 명이 전역을 하거나 다시 서귀포경찰서로 복귀를 해야 다른 대원들이 꿈의 섬(몇몇 대원들에겐)으로 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나랑 내 동기인 혁성이 둘 중에 한 명이 마라도를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말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노골적으로 섬에 가고 싶다고 표현했다. 타격대장은 아마 섬에 가고 싶다는 내 말이 달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격대장 입장에선 힘들어하는 내가 걱정되어 계속 신경을 써야 하는 존재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동기를 미워하고 나를 좋아하던 다른 선임들은 나를 보내기 싫어했다.

나와 같이 생활을 하고 싶어서 내 동기를 섬에 보내고 싶어 했다.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은 고맙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보내줬으면 싶었다. 그때 내가 마라도를 가게 결정적으로 도와주던 선임이 있었다. 그 선임은 바로 서귀포경찰서에 온 둘째 날 나와 내 동기를 혼냈던 무서운 선임이다.

그 선임은 다른 선임들과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물론 그 선임도 나를 훨씬 더 좋아했다. 그만큼 내 동기를 싫어했다. 그 무서운 선임의 생각은 생활 잘하는 친구를 섬에 보내고 못 하는 친구를 서귀포경찰서에 남겨서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내 동기 입장에서는 정말 무서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정말 아이러니하고 세상이 좁다고 생각이 드는 건 그 선임은 몇 달 전 헤어진 리은의 전 남자친구였다. 아무튼 그 선임의 큰 지지와 더불어 덕분에 나는 원하던 꿈의 섬 마라도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꿈의 섬 마라도로 떠나는 날이 왔다. 운이 좋게 배가 외출을 나왔지만, 배가 뜨지 못해 마라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귀포경찰서로 복귀를 한 당시 마라도 선임인 김준현 수경과 같이 복귀를 하게 되었다.

복귀하면서 규정상 그러면 안 되지만 마라도에 처음 온 나를 위해 치킨도 사주고 술도 사준 후 그걸 몰래 갖고 들어갔다. 마라도는 모슬포항에서 25분 정도 배를 타고 가면 나오는데 앞으로 2년간 매주 배를 탈 것도 모르고 그저 마라도에 가는 것이 행복했다. 그래서 멀미도 하지 않았다. 마라도는 자리덕과 살레덕 이렇게 두 개의 선착장이 있는데 처음 온 날은 자리덕에서 내렸다. 이렇게 기억하는 이유는 자리덕에는 살레덕엔 없는 계단이 있는데 서귀포경찰서에서 모든 짐을 가져온 나는 그 계단을 오르는 게 마치 군장을 메고 산을 오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마라도 치안센터에 도착해서 내가 지낼 방을 보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조금 실망했다. 어느 누가 다 큰 성인 남자 셋이 지내게 될 방이 혼자 쓰던 자신의 방보다 작으면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당황스러움을 감춘 채 나는 선임들을 따라 마을주민들에게 인사를 하러 나갔다. 그때 나는 약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지내게 될 곳이라는 것도 모른 체 패기 있게 마을 이장님, 보건 소장님, 우리 의경식당 사장님과 이모, 등대소장님, 기원정사 주지 스님과 보살님, 그리고 식당 영업을 하시던 마을 주민 분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그날 그렇게 인사를 하고 다니면서 내 설렘 때문이었는지 눈부시게 파란 하늘, 내 긴장 때문이었는지 내 볼에 결이 느껴지던 가을바람, 제복을 입은 나를 쳐다보던 관광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이 모든 것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역시 무엇이든 인생의 첫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이게 내 인생의 첫 마라도였다. 그렇게 인사를 끝마치고 난 후 마라도 선임들과 나는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신입이 들어왔다고 우리는 정해진 식당이 아닌 그 옆에 있는 식당 사장님과 가족관계인 분이 운영하시는 중국집을 가게 되었는데 마라도에 처음 온 날 본 광경들도 잊을 수 없지만, 그날 느꼈던 짜장면과 탕수육 맛은 더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로도 수도 없이 먹었으니까. 그 중국집은 철가방을 든 해녀라는 중국집인데 백년손님이라는 예능프로그램에 나오시는 분들이 운영하는 곳이라 그런지 선착장기준 맨 앞에 차지하고 있는 이장님 댁과 더불어 사람이 늘 붐비는 곳이었다. 이곳 이야기를 더 적고 싶은 것이 여기서 일하시는 대부분의 분은 의경 대원들이랑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형들이고 서빙을 하는 분들도 학생이었는데 의경대원들을 친형처럼 대해주셨다. 그리고 내 지인들이 마라도에 놀러 오거나 할 때마다 해산물 등 서비스도 많이 주시고 심지어는 돈도 받지 않으셨다. 우리 엄마도 정말 고집이 만만치 않은데 끝까지 돈을 내겠다는 우리 엄마의 고집까지 꺾어주었던 사장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맨입으로 그렇게 대우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틈틈이 마라도 치안센터로 전화가 와서 심부름을 시킨다면 군말 없이 달려가서 도와드렸고 우리가 점심을 먹고 가게가 아주 바빠 보일 때면 쏜살같이 달려가서 일손을 도왔다.

마라도에서 나는 순찰업무, 관광객 안내, 마라도 입도 현황 파악, 대민지원 등 주로 이런 일을 했다. 마라도에서는 일반인들과 접촉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나에게는 정말 딱 맞는 근무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의경 대원이 외출이나 외박을 나가지 않으면 우린 세 명이 돌아가면서 근무를 섰다. 근무를 선다고 해봤자 컴퓨터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센터를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또 점심을 먹고 난 후나 저녁을 먹고 난 후 마라도를 돌면서 순찰을 하였다.

날이 좋아지면 사람들이 텐트를 치는데 우리는 텐트를 친 사람들에게 텐트를 치지 말고 민박이나 펜션이 많으니 거기서 자야 한다는 얘기를 해야 했다. 텐트를 치지 말아야 한다는 명확한 법은 없었던 것 같지만 이미 치안센터와 주민들이 이야기를 끝낸 부분인 것 같아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은 우리 센터 장님과 순찰을 하다가 밤에 우연히 텐트 하나를 발견했는데 내 또래의 남자 관광객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텐트를 치면 안 되는 상황을 설명했고 그 관광객은 수긍했다.

그러더니 지금 돈이 없기 때문에 텐트를 거두고 자기가 가져온 간이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우겠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그렇게 둘 수가 없었지만, 옆에 경사님이 계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경사님이 그러면 저기 뒤쪽이나 우리 치안센터 쪽에 주민들 눈에 안 띄게 몰래 가서 텐트를 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경사님의 모습이 멋있게 보였고 지금도 2년 동안 같이 지냈던 센터장님 중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감사한 분이다.

마라도는 3명의 의경 대원이 초소에서 생활하고 2명의 경찰공무원이 교대근무를 한다. 작은 섬에서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간섭을 하게 되고 부딪히는 일도 많게 되는데 이렬승 경사님은 부산 분이셨는데 모든 센터장님들 중 가장 간섭을 덜해주시고 우리를 배려해 주시려는 모습이 보이는 센터장님이었다.

또 기억에 남는 건 의경 대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외출이 있는데 대원이 외출을 나갈 때마다 돈을 주시면서 햄버거를 사주셨다.(가끔 몰래 맥주도) 그렇게 저녁을 먹고 난 후 야식으로 햄버거와 맥주를 마시는 것이 요즘 말로 우리들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이렬승 경사님은 내 의경 생활 말년에 인사이동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떠나셨다. 정이 많이 든 이렬승 경사님이 떠나실 때는 정말 슬프고 아쉬웠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그때 나름 군인인 척하고 싶었나 보다.

요즘 만남과 이별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보게 된다.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이별이 따라온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이별하게 된다. 앞으로 현대의학이 얼마나 발전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평생 함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든 연인이든 이별을 할 때의 아픔과 힘들어질 나를 위해 어느 정도는 이별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상상 정도는 해봐야 하는가? 정말 언젠간 혼자가 될 수도 있는 나를 위해 강해 져야 하는가?

현재 23살의 현성이 이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을 해본 결과는 이별을 염두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이별을 염두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다. 지금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시간조차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위해 써야 이별을 하게 될 때도 나 스스로 후회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민 없이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 이 말은 내가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가끔씩은 나 스스로 어떤 것에 대해 질문을 해보고 그 질문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해보는 것은 앞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나침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해볼 기회를 준 아빠에게 감사하고 온전히 글을 쓰고 생각을 할 수 있게 낳아준 엄마에게 감사하고 지금까지 살아서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도 감사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렬승 경사님 다음으로 떠오르는 센터장님은 이웅재 경위님인데 이분도 이렬승 경사님과 같이 고향이 부산이셨다. 하지만 이렬승 경사님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갖고 계시는 분이었다. 우선 40대 후반인 이렬승 경사님보다 10살 정도 많으셨고 사투리를 쓰는 티가 거의 안 나는 이렬승 경사님과는 다르게 누가 봐도 부산사람이다 느낄 정도로 억양이 강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안 그래도 무서운 말투를 가지신 센터장님인데 억양 때문에 정말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이웅재 경위님은 소위 말하는 꼰대의 기질을 가지신 분이셨다. 자신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가차 없이 화를 내셨고 또 그에 따라서 벌을 주셨다. 하지만 또 우리가 생활을 잘하고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으면 그만큼 잘해주시는 분이었다. 이웅재 경위님은 또 정말 깔끔하셨고 무엇보다 일 처리가 확실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자기 신념이 뚜렷한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하고 뭐든 확실하지 못한 나에게는 가장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이었고. 또 이웅재 경위님을 보며 나에 대해 돌아보기도 했었다. (물론 그때는 많이 싫어했지만) 이웅재 경위님은 이렬승 경사님과 같이 이 인사이동으로 인해 마라도를 떠나셨는데 우연히 내 외출 날과 이웅재 경위님이 마라도를 떠나는 날이 겹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용기 있게 건넸다. 그때 당시 선임이 이웅재 경위님에 대해 한 말이 있었는데 그 말에 크게 공감을 했기 때문에 똑같이 전해드렸다. 센터장님 덕분에 배운 점도 많고 군인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센터장님은 이웅재 경위님과 이렬승 경사님이 떠나고 난 후 부임하신 고석창 경위님이다.

고석창 경위님은 정말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사람을 좋아하셨고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남아계신 분이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하지만 그에 따라서 말도 많으셨다. (이건 안 좋은 쪽으로) 같이 생활한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고 가끔 우리에게 음식도 직접 해주시면서 잘 챙겨주셨다. 또 전역을 한 후에 나에게 안부 전화도 해주셔서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센터장님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자꾸 내 주위에 사람들에 대해 적게 되는데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에게는 주위 사람들을 평생 잊지 않게 해주는 나만의 일기장이 되는 것 같아 정말 좋다. 또 약 1년 반 동안 같이 지냈던 동료 의경 대원은 가장 오래 지냈고 일도 많았던 선임이었던 김현승 대원과 후임이었던 이우용 대원이 떠오른다.

우선 현승이는 나와 중학교 동창이다. 심지어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내가 처음 서귀포경찰서에 왔을 때 눈앞에 중학교 동창이 있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고 내가 먼저 갔지만, 마라도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나보다 3달 먼저 입대한 선임이었는데 마라도에는 내가 한 달 정도 먼저 왔기 때문에 일이나 생활은 내가 가르쳐주었다. 현승이는 소심한 편이었지만 할 땐 하는 화끈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외모에 대해 말하자면 피부는 눈에 띄게 하얀 편이었다. 체구는 약간 통통한 편이었고 또 눈에 띄는 특징은 머리가 컸다. 그래서 별명도 가리였다. 대가리의 가리만 따서 지은 별명이란다. 현승이는 우리 셋 중에 가장 깔끔한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생활하는 방 청소도 주로 현승이가 하자고 했고 일 처리도 셋 중에 가장 깔끔했다. 학교는 성균관대학교를 다녔는데 노는 것도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9월에 처음 마라도를 왔고 10월에 현승이가 왔다. 다음 12월에 이우용이라는 후임이 처음으로 생겼다. 마라도에서의 첫 후임이었다. 우용이는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좋아했다. 또 성격은 현승이와 마찬가지로 소심한 편이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했다. 나와는 다른 점이 많은 친구였다. 그리고 우용이는 서강대를 나왔다. 외모는 우선 굉장히 말랐고 코가 큰 편이었다.

그리고 또 우용이는 말을 많이 더듬었다. 처음에는 내가 우용이가 말을 더듬는 것을 매일 듣다 보면 나도 말을 더듬을까 봐 무서울 정도였다. 우용이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는 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아주 답답하고 듣기가 힘들었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이해도 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201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세 동갑내기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나와 우용이가 조금 부딪히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서로 이해를 많이 해줬고 그다음부터는 싸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우용이와의 사이를 통해 아 나랑 맞지 않는 사람이라도 서로 이해를 하면 맞춰갈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와 우용이 사이와는 다르게 현승이와 우용이는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싸우고 부딪혔다. 보통 다른 부대였으면 상하 관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고 그럴 일이 있다고 해도 하극상이었을 상황들이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하자고 했던 우리 셋에게는 참 곤란한 상황으로 다가왔다. 선임과 후임이 싸우는 사이에 나는 항상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려 노력했다. 사실 나는 나름 군대의 상하 관계를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군대에서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용이가 이해가 안 됐다. 물론 우용이에게 할 말이 있으면 했다. 하지만 전적으로 현승이 편을 들지는 않았다. 내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용이가 다시는 우리와 어울리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용이는 융통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리고 군대의 상하 관계를 무척이나 싫어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다 같이 생활하면서 우용이는 많이 변해갔고 또 말이나 행동으로 보여줬다. 난 우용이에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또 우용이는 장점도 많은 친구였다. 여가시간에 현승이와 나는 게임을 하고 놀기 바빴을 때 우용이는 늘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그런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우용이를 보며 많은 걸 느꼈다. 언제 그런 공붓벌레와 같이 생활할 수 있겠는가? 글을 쓰는 지금도 우용이의 그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현승이와 우용이 둘에 대한 마음은 그리움이 아닌 고마움이다. 얌전한 둘 사이에 얌전하지 않은 내가 사이에 껴있었으니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그리고 마라도에서 힘들 때마다 가장 의지가 되었던 건 당장 옆에 있는 선임과 후임인 현승이와 우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현승이와 우용이가 나를 이해하려 많이 노력해 준 것 같아 더 고맙다. 

마라도에서 있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들이 몇 개 있다. 마라도에서는 몇 달에 한 번씩 바지선으로 물이 들어온다. 들어올 때 대부분 가구마다 몇십 개씩 주문을 하니 물의 양이 많지 않을 수 없었다. 마라도에는 젊은 남자가 거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은 우리가 물을 가구마다 배달해 주었다. 바지선으로 정말 큰 트럭이 들어오고 그 트럭에 있는 포장된 삼다수의 비닐을 벗기고 전부 바닥으로 내린다. 그리고 마을트럭으로 가구마다 주문한 개수에 맞춰 직접 날라 배달을 해준다. 정말 종일 했다. 그래도 그때는 물을 나르는 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운동도 됐고 또 무엇보다 일이 다 끝나면 저녁에 치킨도 이장님이 많이 사 와주시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도 주셨다. 저녁에 있을 치맥 파티를 위해 낮에 고된 노동을 버텼다. 또 기억에 남는 일은 어버이날에 진행되었던 마을행사였다. 그날은 저녁부터 밤새 마을 어르신들의 고기를 구워드렸는데 정말 뿌듯했다. 그때 한우 소갈비를 먹었는데 태어나서 먹어본 고기 중에 가장 맛있었다. 이런 게 마을잔치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던 날이었다.

또 기억에 남는 일은 마라도 치안센터의 외벽을 페인트로 칠했던 날이다. 2017년 봄에 제주지방청장님이 방문하시기로 되어있어서 센터장님과 의경 대원들이 발 벗고 나섰다. 페인트칠은 정말 힘들었고 고됐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마라도에 있던 덕분에 페인트칠도 할 줄 알게 되었다. 내가 마라도에서 근무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2의 고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라도 주민들은 마라도에 있던 어떤 대원보다 나를 사랑해 주었고 나는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었다. 그것만으로 나의 군 생활은 행복했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마라도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여기에 적고 싶다. 하지만 그러려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빙산의 일각을 제외한 빙산의 몸통은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하나씩 꺼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나의 제2의 고향인 마라도를 생각해야겠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마라도 대원들은 두 번 다시는 마라도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유일하게 나만 나는 다시 한번 꼭 올 거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 은지와 마주쳤다. 은지는 나의 마라도 생활의 거의 전부였다. 은지와 10개월 정도 만났는데 그 10개월은 가장 지루하고 힘들 수 있었던 마라도에서의 10개월이었기 때문이다. 또 은지는 나를 많이 위해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단 몇 시간 볼 수 있었는데 왕복 3시간을 나를 위해 모슬포로 와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고맙다.

내가 지금 이렇게 뇌리에 은지가 강하게 박혀있는 것은 은지가 다른 사람과 임신해서 애를 낳았기 때문이다. 정말 놀랐다. 얼마 전까지 몇 번 인가 마주쳤을 때는 산후조리 때문인지 몸이 많이 부어있었다. 전혀 내가 은지에게 마음이 남아있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만났던 아이가 임신을 했다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콘돔 없이 섹스를 해본 것이 은지였기 때문에 나에게 은지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나에 대해서 또 나의 삶에 대해서 한 번 더 돌아보게 해 주었다. 생리날에는 정말 희박한 확률을 제외하면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안 후 합의 후에 콘돔 없이 처음 해보게 되었다, 생리 중이라 좀 찝찝했던 기억이 강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용감했는지 궁금하다. 그때를 떠올리니 신기하다. 벌써 2년 전이다 그 후로 벌써 2명의 여자를 더 만났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다는 것을 생각하니 새삼 내 나이가 느껴진다. 벌써 25살이다. 어렸을 때의 내가 생각하던 25살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본다. 정말 한심하다. 25살인데도 이런 기분이다. 아빠와 엄마는 어떤 느낌일까 아직도 학생 때의 자신과 같은 기분일까 내 한 몸 챙기기도 이렇게 힘든데 가족들까지 부양한다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기계가 된 기분일까? 혼란스러운 기분이다.



https://www.visitjeju.net/kr/detail/view?contentsid=CONT_000000000500171

::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 :: (jejumarado.com)


마라도 馬羅島, Marado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


『대동여지도』(22첩 1면)의 마라도(마라) 일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해안에 있는 섬이다. 대한민국 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모슬포항과는 11㎞ 정도 떨어져 있다. 섬 안에 34m의 작은 구릉이 있을 뿐 대부분 저평하다. 해안은 암석해안이 대부분이며, 곳곳에 깎아 세운 듯한 해식애와 해식동굴이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대정)에는 '마라도(麽羅島)'라 했다. 『탐라지』(대정)에는 '마라도(摩蘿島)'라 했는데, 둘레는 5리가 된다고 했다. 『탐라순력도』(한라장촉), 『영주산대총도』 등에는 '마라도(摩蘿島)', 『제주삼읍도총지도』에 '마라도(麻羅島)', 『제주삼읍전도』에 '마라도(摩羅島)', 『대동여지도』에 '마라(摩羅)' 등으로 표기했다. '마래섬'의 마래의 의미는 확실치 않으나 관(冠)의 뜻을 지닌 만주어 차용어 '마흐래'와 유사하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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