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산 Apr 06. 2024

가파도 청보리 축제

꿈삶글 116



가파도에서


마라도 살레덕선착장에서 배를 타도 되지만

나는 이어도에 살던 진인답게 바람으로 간다

서핑보트를 타듯 파도를 타고 가파도로 간다

가파도 주변에 젊은 해녀들이 소라를 잡는다

가파도 짬뽕에 들어갈 뿔소라, 망사리 가득하다

나는 가오리 꼬리를 잡고 가파도 등에 오른다

가파도는 갈수록 젊어져서 힘도 좋고 싱그럽다

가파도에서는 청보리 밭에서 파도소리 들린다

가파도 올레길은 바람도 자전거를 타고 돈다

가파도 올레길에서 보는 송악산 산방산 한라산

황홀함에 이끌려 모슬포 운진항으로 가지 않고

송악산으로 간다 산방산으로 간다 한라산으로,



* 축제명 : 2024년 제13회 가파도 청보리 축제

* 축제일 : 2024년 4월 6일 ~  4월 28일



가파도 청보리축제


제주도 부속섬 중 4번째로 큰 섬, 가파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다를 헤엄쳐가는 가오리 모양을 하고 있는 섬이다.
이름은 가오리(가파리)를 닮아 가파도가 되었다는 설과, 덮개 모양을 닮아 '개도(蓋島)'로 부르던 것이 가파도라 굳어졌다는 설 등이 있다.


축제명 : 2024년 제13회 가파도 청보리 축제

일시 : 2024년 4월 6일 ~  4월 28일

  - 상세일정 : 매주 토, 일요일 운영 4.6 ~ 4.7 / 4.13 ~ 4.14 / 4.20 ~ 4.21 / 4.27 ~ 4.28

장소 : 대정읍 가파도 일원

주최 : 대정읍

주관 : 가파도 청보리 축제 위원회

프로그램 : 청보리밭 탐방, 올레길 걷기, 소망돌탑 쌓기, 작은 버스킹 등

문의 : 가파리사무소 064-794-7130 / 대정읍 064-760-4085


※ 자세한 내용은 서귀포시 통합 축제 홈페이지를 참고해 주세요!

https://www.seogwipo.go.kr/festivals/cheongbori/info/intro.htm



가파도는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뱃길로 20여분, 남쪽으로 5.5㎞ 해상에 있는 섬으로 18만 평의 청보리 물결 위로 동쪽으로는 한라산을 비롯한 5개 산(산방산, 송악산, 고근산, 군산, 단산 )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국토 최남단 마라도가 보이는 비경을 간직한 섬이다. 가파도의 청보리는 국토 최남단의 땅끝에서 가장 먼저 전해오는 봄소식으로 3월 초부터 5월 초순까지 보리잎의 푸른 생명이 절정을 이루며, 특히 가파도 청보리의 품종 향맥은 타 지역보다 2배 이상 자라는 제주의 향토 품종으로 전국에서 가장 먼저 높고 푸르게 자라나 해마다 봄이 되면 18만여 평의 청보리밭 위로 푸른 물결이 굽이치는 장관을 이룬다.



가파도 청보리축제 [ 加波島靑-祝祭 ]


가파도 청보리축제는 2009년부터 매년 3월~5월 사이에 개최되는 축제로, 가파도를 널리 알리기 위해 주민들의 의지로 만들어낸 축제이다. 가파도의 청보리는 국토 최남단에서 가장 먼저 전해오는 봄소식으로 3월 초부터 5월 초순까지 보리잎의 푸른 생명이 절정을 이룬다. 특히 가파도 청보리 ‘향맥’ 품종은 다른 지역 보리보다 2배 이상 자라는 제주의 향토 품종으로 전국에서 가장 먼저 높고 푸르게 자라나 해마다 봄이 되면 18만여 평의 청보리 밭 위로 푸른 물결이 굽이치는 장관을 이룬다. 역사 문화와 학술적 가치가 높은 숨겨진 매력의 섬 가파도에서는 청정 해역의 싱싱한 해산물과 해풍을 벗 삼아 자라난 보리밭의 경관을 널리 알리고자 가파도 청보리축제를 개최하게 되었다.


연원 및 개최 경위

2009년 제주특별자치도가 도서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정한 ‘가파도 방문의 해’를 맞이하여 ‘제1회 가파도 청보리축제’가 3월 28일~29일 2일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일원에서 개최되었고 그 후 매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10년에는 4월 1일~5일까지 5일간 개최되었고, 청보리축제에 맞춰 가파도 올레길 10-1코스가 개장되어 청보리밭을 걸으며 제주 본도의 한라산·산방산·송악산 등의 아름다운 풍광을 멀리서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2011년에는 5월 6일~8일까지 3일간 개최되었다. 축제 기간에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모슬포항에서 가파도까지 여객선 삼영호가 하루 10여 회 이상 운항된다.


행사 내용

가파도 청보리축제는 가파리 일원에서 매년 3월~5월 사이에 2~5일간 개최된다. 행사 내용이나 절차는 해마다 다양하게 구성된다. 주요 행사는 가파도 방문 환영 길놀이·농촌 문화 체험 마당·어촌 문화 체험 마당·공연 마당·상설 운영 행사·부대 행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사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농촌 문화 체험 마당에서는 보리밭 산책로를 따라 풍물놀이 공연이 펼쳐지고, 청보리밭 걷기·청보리밭 보물찾기·청보리밭 연날리기 등이 펼쳐진다. 어촌 문화 체험 마당에서는 전통 낚시 체험·보말 까기 대회·해안 어장 체험·소라구이 무료 시식·해녀 물질 공연·해산물 요리 만들기 등 체험 행사가 펼쳐진다. 그리고 국악 공연·일반 가요제 등 지역 예술 공연이 펼쳐지며, 소망 기원 돌탑 쌓기·서예 및 사진 전시·어린이 그림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가 상설 운영된다. 그 밖의 부대 행사로는 특산물 전시와 판매, 가파도 향토 음식점과 보리 찐빵 판매장 운영 등이 있다.


현황

2011년 제3회 가파도 청보리축제는 5월 6일부터 5월 8일까지 3일간 가파도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주요 프로그램은 개막식 및 가파도 방문 환영 길놀이에서 대동 화합의 길놀이 및 풍물 공연이 펼쳐졌다. 또한 청보리밭 걷기·청보리밭 보물찾기 등을 비롯하여 어린이 대상 행사로는 로켓 만들기 행사인 ‘나는야 과학자’와 어린이 그림 전시회가 행해졌다. 어촌 문화 체험 행사로는 선상 낚시, 보말 까기 대회, 문어·소라 잡이 체험, 어장 체험, 소라구이 무료 시식 등이 있었다. 아울러 해녀 물질 공연·국악 공연·일반 가요제 등 예술 공연 행사가 펼쳐졌고, 소망 기원 돌탑 쌓기·해산물 요리 만들기·사진 및 그림 전시 등 다양한 행사가 상설 운영되었다. 그 밖에 가파도 특산물 음식점, 보리 찐빵 판매장 및 특산물 판매장 등이 운영되었다.

청보리축제 기간 동안은 모슬포에서 가파도까지 방문객의 원활하고 안전한 수송을 위해 대형 여객선[21 삼영호, 199톤, 승선인원 294명]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10회 증편하여 운항하였다. 서귀포시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 편 지명

가파도 [ 加波島 , Gapado ]


이미지 크게 보기

『지승』(제주)의 가파도 일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섬이다. 제주도와 최남단 마라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5.5㎞ 떨어진 곳에 있다. 최고봉은 약 20m로 구릉이 거의 없이 평탄하며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을 이루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대정)과 『남사록』, 『지영록』 등에는 '개도(盖島)'라 했다. 『탐라지』에는 '개파도(盖波島)', 『제주삼읍전도』에 '가파도(加波島)', 『대동여지도』에 '개파(盖波)', 『조선지형도』에 '가파도(加波島)'라 했다. 『제주삼읍전도』에는 가파도의 위치가 송악산 서쪽에 있는 것으로 잘못 그려졌다.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 섬이 가오리처럼 생겼다 하여 '가파섬'이라 했다는 설, 파도가 섬을 덮었다는 뜻에서 '가파도'라는 설, 물결이 더한다는 뜻에서 '가파도'라 했다는 설, 섬의 모습이 덮어진 모양이어서 '더바섬'이라 했다는 설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가파도 [ 加波島 ]


이칭별칭                

더우섬, 더위섬, 더푸섬, 가파섬, 개도(蓋島), 개파도(蓋波島), 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


동경 126°16′, 북위 33°10′에 위치한다. 모슬포항에서 남쪽으로 5.5㎞ 지점인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와 제주도 본섬 중간에 있다.

제주도의 부속 도서 중 네 번째로 큰 섬이다. 가장 높은 곳은 높이 20m 정도이며, 구릉이나 단애가 없는 평탄한 섬으로 전체적 모양은 가오리 형태를 이루고 있다.


명칭 유래

이 섬은 다양한 지명을 가지고 있는데, 섬 전체가 덮개 모양이라는 데서 따온 개도(蓋島)를 비롯하여, 개파도(蓋波島)·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더위섬·더푸섬 등으로도 불린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무인도로 버려진 곳이었으나, 국유 목장의 설치를 계기로 마을이 들어섰다. 1751년(영조 27)에 목사 정연유가 소를 이 섬에 방목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 후 18세기말에 개간을 허락되면서 경주김 씨, 진주강 씨, 제주양 씨, 나주나 씨, 김해김 씨 등이 ‘황개’와 ‘모시리’ 일대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가파도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인데, 바로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된 계기가 된 곳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1653년 가파도에 표류했으리라 짐작되는 네덜란드의 선박인 스펠웰로, 그 안에 타고 있었던 선장 헨드릭 하멜이 ‘하란선 제주도 난판기’와 ‘조선국기’를 저술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비교적 정확히 소개된 계기가 되었다.


현황

면적은 0.87㎢이고, 해안선 길이가 4.2㎞이다. 2008년 말 현재 인구는 312명(남 145명, 여 158명)이고 세대수는 132호이다.

주요 농산물은 고구마·보리이다. 겨울 농사로 보리를 재배하고, 여름 농사로 고구마 등을 재배한다. 고구마는 수익성이 높은 경제작물로 개경 초부터 재배해 왔다. 땅이 한정되어 있어 호당 경지 면적이 적다. 따라서 농업은 부업이며, 어업이 주산업이다.

주요 어획물로는 소라·전복·해조류·해삼·성게 등이 대부분이다. 해녀들에 의하여 김, 굴, 해삼, 전복, 소라 등이 채집된다. 근해에는 자리돔 어장이 형성되고 있다.

법정 1개 마을인 가파도는 상동과 하동 등 2개의 마을로 되어 있고, 북쪽에 위치한 하동포구(下洞浦口)는 연륙 교통의 요지로 항만시설이 되어 있으나, 간만차가 심하고 수심이 낮아 불편하다.


가파도 해역은 예로부터 거센 기류와 조류가 부딪쳐 나가는 수역이므로, 이곳을 지나는 외항선들의 표류와 파선이 잦았던 곳이다. 교육 기관으로는 가파초등학교가 있다. 이곳은 최남단인 마라도를 연결하는 요지이다. 모슬포항·가파도 구간 하루 2회의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한국의 섬 - 제주도

가파도


바다 위 오지 섬마을


[ 加波島 ]

요약 바다 위 오지 섬마을 가파도는 총면적 0.9 km2, 해안선 길이는 4.2km이며, 최고높이는 20.5m에 불과하다. 가파도는 마라도의 2.5배 크기에 129 가구 246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관광명소로는 동동리 해변과 하동항, 고냉이돌이 있다.      

이미지 크게 보기


가파도 개요


제주도 주변에는 조그만 섬이 많이 있다. 무려 62개의 섬이 마치 본섬인 제주도를 호위하는 병사들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다. 그중에 8개 유인도와 54개 무인도가 있다. 어미 섬인 제주 본섬과 아주 가까운 유인도는 가파도, 마라도비양도우도이며, 현경면에 있는 차귀도는 1970년대 말까지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제주도 본도와 48km 떨어진 추자군도에는 상추자도하추자도횡간도추포도가 있다. 추자군도의 4개 섬들은 해남 반도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마지막 빙하기 때 물속에 잠기면서 남은 땅이다.


제주도 주위에 있는 우도나 비양도, 마라도와 가파도 등의 섬들은 화산섬이다. 가파도는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5.5km 떨어진 섬이다. 하루에 3회 여객선이 운행되는데 약 20분 걸린다. 36톤급의 작은 여객선은 성수기를 제외하고 하루 세 번 뭍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총면적 0.9 km2, 해안선 길이는 4.2km, 최고높이가 20.5m에 불과하다. 가파도는 마라도의 2.5배 크기에 129 가구 246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지 않은 섬이다. 가파초등학교는 전교생이 7명이며, 마라도에 있는 초등학교는 가파초등학교의 마라도분교로 현재 1명이 공부하고 있다.


가파도는 제주도의 부속 도서 중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전체적인 섬 모양이 가오리가 넓적한 팔을 한껏 부풀리며 헤엄치는 형상이다. 그래서 섬 이름도 섬 전체가 덮개 모양이라는 데서 따온 '개도(蓋島)'를 비롯하여 '개파도(蓋波島)', '개을파지도(蓋乙波知島)', '더위섬', '더푸섬' 등이다. 이외에도 하멜의 캘파트(Quelpart)는 제주도를 가리키는 표기인데 가파도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섬의 최고점은 높이 20m 정도로 구릉이나 단애가 없는 평탄한 섬이다. 섬이 작고 나무가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해수담수화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물 사정은 좋다.


하동 선착장


가파도 단절의 역사


가파도는 1750년(영조 26) 제주 목사가 나라에 진상하기 위하여 소 50마리를 방목하면서 소들을 키우려고 40여 가구 주민들의 섬 출입을 허가했다. 오랜 세월 동안 무인도였던 가파도에 이때부터 다시 사람들이 살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실은 그전에도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나 왜구들의 약탈로 인하여 해상 방위 목적으로 아예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다. 70-80년대 남북대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 인구가 아주 작은 섬들은 간첩들의 잦은 출몰로 인한 피해 등을 방지하기 위해 주민들을 육지나 큰 섬으로 이주시킨 사례가 적지 않았다. 현대판 공도 정책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제주 한경면에 있는 차귀도이다. 옛날에 어렵게 섬에서 밭을 개간하여 터전을 잡았지만, 공도 정책에 의해 제주 본도로 쫓겨나갔다. 멀고 외딴섬들의 역사는 자주 단절되는 수난을 겪었다. 국가의 공도 정책으로 섬에 살던 주민들이 강제로 쫓겨나기도 했지만 반대로 섬을 탈출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도록 하는 시절도 있었다. 이주의 자유가 제한된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기고 살아야만 했다.


제주도는 1629년부터 1830년까지 소위 '출륙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가혹한 공납과 관리들의 수탈에 못 이겨 본도를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출륙 금지령은 제주도 주민들을 섬사람이라고 가볍게 여기고 전체 주민들의 거주 자유까지를 통제함으로써 마치 모든 주민을 유배인으로 취급한 것이다.


가파도는 고부 이 씨를 비롯해 경주 김 씨, 김해 김 씨 등이 많고 과거에는 섬 내 혼인이 자유로워 겹사돈을 맺는 경우도 많아 친인척들로 구성된 '남이 안 사는 섬'이다. 특히 가파도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많이 남아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살았던 내력은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도 내에는 180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그중 135기가 가파도에 있을 정도다. 가파도 주민들은 이 고인돌을 '왕돌'이라 부른다. 이 왕돌은 전형적인 남방식의 고인돌로 판석도 없이 지하 묘실을 만든 다음에 돌을 놓고 그 위에는 큰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이 특징이다.


가파도의 목장


가파도는 문헌사료의 기록을 보면 가파도(加坡島), 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 개파도(盖波島)로 시대에 따라서 지명이 다르게 변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종실록』권 12, "또 전일에 제주 가파도의 아마(兒馬) 3 필이 좋은 말이어서 별도로 목양하였는데····", 『중종실록』중종 20년 10월 임진(1525) "정의와 우도와의 거리 및 대정과 가을파지도와의 거리가 모두 멀지 않아 처음에 읍을 설치할 때 반드시 두 섬을 가까이한 것은 상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신 증동국여지승람』권 38은 "가파도는 현 남쪽에 있다. 가파도 이하는 모두 목장이다." 『탐라지』효종 4년(1653) "개파도는 현 남쪽 바다에 있다."


『제주읍지』(1780~1789)에 "가파도 별둔장이 나온다. 그곳은 가파도에 설치된 소 목장으로 주위가 10리이며, 소 103두를 두어 감관은 모슬포조방장이 겸하여 색리(色吏) 1명, 군두(群頭) 1명, 목자(牧子) 8명이 배치되었다. 신미년 목사 정언유의 건의로 설치되었으며 1년마다 점락하여 관리했다."라고 기록되었다. 『헌종실록』권 48(1840년) "제주목사 구재룡이 첩정(諜呈)하기를 '대정현 모슬포 가파도에 영길리국 배 2척이 와서 정박하여 감히 포를 쏘고 소를 겁탈하는 변까지 있다'하고····" 『탐라지』헌종 14년(1848) "가파도는 국우장으로 영국선이 정박하여 소 수십 두를 약탈 하여 그 후 목장을 옮기는 것을 허락했다."


가파도에 소와 말을 기르는 목장이 설치된 배경에는 방문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섬 지형이 평탄하고 풀이 많이 자라기 때문이다. 울타리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는 바다가 자연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예전의 말은 전쟁할 때나 사람이나 집을 운반할 때, 파발마로 사용되는 것으로 오늘날의 차나 탱크 역할을 한 것으로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그래서 고려나 조선조 때에는 섬에 말을 많이 키우는 목장들이 많았다.


여객선이 닿는 상동 선착장


가파도 목장에 대한 문헌기록에 보면 1491년(성종 22)에 말 3 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1750년(영조 26)에는 정언유 제주목사에 의해 가파도 별둔장이 설치되면서 소를 사육해 매년 조정에 진상한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사마랑호가 1840년에 가파도에 무단 침입하여 소를 강탈당해 갔다.

헌종 8년(1842)에 제주 목사 이원조는 제주도민에게 가파도 개간 입도를 허가하였는데 토지가 비옥하여 농지에 적당하여 처음 입도한 사람들은 농번기에만 농사를 짓고 왕래했다. 고종 2년(1865) 제주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서 이때부터 가파도에 들어가 살았으니 지금부터 약 140년 전 일이다. 처음 입도하여 개간에 참여한 사람은 대정읍 상모 씨를 비롯하여 총 33명이었다.


초기에 가파도 개척민들은 마제포라고 부르는 '말을 싣고 가는 포구'에서 마을을 형성했다. 이곳은 남쪽 방향으로 북풍을 막아주고 배들이 안전하게 댈 수 있는 장소로 살기에 적당한 곳이다. 그러나 1923년에 북쪽의 하동 포구 일대가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가파리는 상동과 하동 2개의 자연마을이지만 원래는 '모시리'(상동)로 모슬포와 이어지는 유일한 포구였다. 그러나 동력선이 출현하면서 모슬포와 더 가까운 '항개'(하동) 포구가 가파도를 대표하는 항구로 변했다. 이 동네가 갑자기 번창하여 지금은 하동의 경제권이 가파도의 중심으로 변했다.


가파도의 봉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섬들은 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풍선으로 다니던 시절, 바람이 많이 불거나 계절풍이 불어대는 겨울에는 생사를 넘나들면서 항해를 했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가파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만약 사람이 많이 살면 관에서도 지원하거나 주민들이 서로 힘을 모아 도선을 취항시킨다. 하지만 인구가 극소수인 섬들은 개인배를 이용하여 가끔 육지를 드나들었다. 전화가 없던 시절에 주민들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파도 맷돌


1973년 내무부에서 펴낸 '도서지'에 보면 가파도에는 상동에 83 가구, 배의 정박지인 하동에 110 가구 총 193 가구, 950명이 살았다. 초등학생은 171명으로 이 조그만 섬에 밭농사만 약간 가능한데도 수산 자원 때문에 인구 밀도가 대단히 높았다. 그래서 교통수단이 없을 때 가파도 주민들은 급한 일이 생기면 제주의 모슬포와 봉화를 통하여 연락을 했다고 한다. 풍선에서 동력선으로 변했지만 배는 적고 기술의 미비로 정기 여객선이 들어오기까지는 오지 중에 오지였다. 당시에 장을 보려고 간다거나, 자녀들 교육 또는 무슨 급한 일이 생기면 어업을 하던 개인배가 드나들었지만 모슬포를 오가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주 봉화를 이용했다.


옛날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알리거나, 말을 타고 달려가서 소식을 알리는 파발이 있었다. 봉화는 전달이 빠르지만 그 대신에 자세한 내용을 전할 수 없고, 파발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반면에 자세한 소식을 전할 수가 있다. 봉화불이 1개 올라가면 적이 나타났다는 뜻이고, 2개 올라가면 적이 육지에 상륙했음을 의미했으며, 3개면 적군과 전쟁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행정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먼 섬들은 왜적과 해적들에게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 조정에서는 반드시 봉화를 이용하여 긴급한 사항을 전달받고 대책을 수립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가파도 주민들의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워서 소식을 알리고, 밤에는 보릿대에 불을 붙여서 올렸다고 한다. 물과 식량이 부족하고 환자가 생기면 봉화를 하나 올리고, 물과 식량이 다 떨어지거나 위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봉화를 두 개 올리며, 사람이 죽거나 죽을 위험에 처하면 셋을 올렸다고 한다. 이 봉화를 보고 모슬포에서는 즉시 알았다는 신호를 보낸 다음 필요한 배와 물자를 가파도에 보냈다. 마라도는 가파도보다 외해에 속한 섬으로 중간에 가파도를 통하여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초상이 나면 두 섬이 서로 신호를 보내 오가면서 사이좋게 초상을 치렀다고 한다.


1973년 당시 마라도의 인구는 30 가구 130명, 초등학생은 25명이었다. 인구가 많지 않은 마라도는 쉽게 가기가 힘들어서 각 가정마다 봉화 올리는 장소가 달랐다. 가파도에서 바라볼 때는 어느 집에서 봉화를 올렸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가까운 친척이 마라도에 배를 보냈다. 가파도에서 봉화를 올렸던 곳은 상동 '가린대'라고 하는 곳인데 지금은 도로로 변했다.


과거에는 교통의 불편으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가 대강 짐작이 간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더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원한다. 그러나 반드시 과거의 이런 역사를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종종 가파도와 마라도 간에 교육용으로 봉화를 올려서 학생들에게 부모 세대의 아픔을 알게 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 중 하나이리라.



하동마을 빨래터


해녀들을 위한 불덕


가파도 개척과 김우석


가파도 개척은 경주김 씨 가문이 주도를 했다. 가파리 출신 경주김 씨는 김우석, 김성숙, 김한정 등이 있다. 제주대학교 김동전 교수의 '제주 가파도 개척사'라는 제하의 논문에 보면 가파도의 선각자들의 이름이 여러 명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김우석은 가파도에 동력선 12척을 들여왔으며, 이때 일본인 나가사키 길촌과 그의 가족 일행 120명이 들어왔다.


김우석의 아버지는 대정좌수라고 한다. 김우석은 가파도 개척에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사람으로 일찍부터 재능이 있고 풍채가 좋았다고 한다. 1886년도에 김우석이 가파도의 구장으로 있을 때이다. 이 당시에 가파도 주민들은 길촌 일행의 이주를 반대하였으나 김우석이 홀로 그들에게 가서 입도 의도를 알아내고 돌아와 가파도 주민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이주를 허락하면서 도와주었다.


그들의 가파도 정착의 목적은 잠수기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내 최초로 잠수기를 이용한 사업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해김 씨 김성숙은 하동에서 출생하여 국회의원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는 1921년 가파도에 최초로 신교육기관인 신유의숙이란 학교를 세웠다. 이곳이 나중에 가파초등학교의 모체가 된다. 김한정은 신유의숙이 창설되자 교원이 되어서 8년간 가파도 주민의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했다. 청렴결백하고 인품이 좋아서 가파도 주민이 잘 따랐다고 한다.


하동 신당


일제 잠수기 어업의 가파도 어장 침탈


인간은 물속에 들어가 오랫동안 있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계를 개발해 왔다.

호흡기를 사용하지 않고 1회 잠수를 하는 시간은 2~3분이며, 깊이 10~20m이다. 그래서 바닷속에서의 활동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러한 잠수방법으로 해녀들은 어패류와 해조류 등을 채취한다. 수중에서 오랜 시간을 활동하기 위해서 고안된 기계가 잠수기인데 수상의 펌프와 공기압축기로 고무호스를 통해서 공기를 보내 호흡을 하면서 수중 활동을 한다. 잠수기 어업은 오랜 시간 동안 작업할 수 있기 때문에 해녀들보다 월등한 작업의 능률을 보이는 것이다.

가파도에서 잠수기 어업의 시작은 1884년 일본인 나가사키 길촌 일행이 가파도 항구에 막사를 짓고 전복 · 소라 · 해삼 등을 마구 잡아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현재 가파도 어촌계 사무실 뒤편에 요시무라의 비석이 하나 있는데 5-6년간 정착하면서 잠수기를 가지고 해산물을 채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가사키 길촌은 동력선 12척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말린 전복을 일본으로 싣고 가서 비싼 값에 팔고 술과 광목, 곡식 등을 실어왔다. 이 사람은 2~300여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던 부자였다. 그러나 그 아들이 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했고, 나중에 가파도에서 자살을 했다고 전해진다.

19세기말에는 기술력을 앞세운 일본의 나가사키 현 잠수기 배들이 제주도 일대에 무단으로 출몰해 해산물을 대량으로 채취하여 지방관민과 충돌이 많았다. 고종 13년(1876)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잠수기 어선들의 출어는 더욱더 심해졌고 1883년에는 드디어 한국통어권을 획득하여 제주도 연안에서 전복을 채취해 갔다.

이에 제주도 주민들은 어장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항의를 했다. 섬의 규모가 큰 제주도 본도보다는 작은 섬인 가파도 어장 침탈은 계속되었다. 전복과 소라 등 풍부한 가파도의 공동어장을 침범하는 범죄행위가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살인과 약탈까지 했다. 고종 24년(1887)에는 가파도에서 전복을 채취하던 일본 잠수기 어선 6척이 모슬포에 가서 닭 · 돼지를 약탈하고 주민 이만송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일본대리공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배상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 가파도의 주요 해산물은 전복과 소라, 해삼, 미역, 톳, 성게이다. 전복과 소라는 1월~12월까지 사철 계속 채취하는데 전복은 7cm 이하, 소라는 5cm 이하는 채취를 금하고 있다. 청정 해역에서 거센 파도에 시달리면서 자라는 양질의 미역과 톳, 감태는 고소득 해산물에 속한다. 미역과 톳은 몰래 채취하는 것을 금하며 늘 감시를 한다.

톳은 일본으로 수출하는 고소득원이라서 1974년부터는 마을 공동 구역을 정하여 공동으로 채취하고 건조하여 판매 대금은 균등하게 분배한다.


테왁을 수리하는 주민


가파도 둘러보기


21년 전에 처음 방문했던 가파도, 이 섬 북쪽에는 상동마을이 남쪽에는 하동마을이 있다. 그 당시는 하동 선착장만 있었다. 가파도의 모든 배들이 여기에 안전하게 정박하면서 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채취했다. 정기 여객선도 물론 하동으로 다녔다. 상동은 겨울에 바람도 많이 불고 배도 접안할 수 없는 외진 곳이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듯이 지금은 상동에 선착장 시설을 마련하여 여객선이 여기에 닿고 마을의 중심이 상동으로 옮겨간 것이다. 상동은 어미섬인 제주도가 훤히 바라다 보이고 모슬포와 거리가 한참 더 가까워졌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일주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마라도와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전동카트가 즐비한 마라도는 진짜 관광지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가파도는 바로 이웃 섬이지만 전혀 다른 기분을 느꼈다. 모슬포와 마라도 가는 중간에 위치한 가파도는 마라도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쳐다만 보고 가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마라도는 오직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덕분에 볼거리가 별로 없지만 방문객들 덕분에 유명한 섬으로 변했다. 그러나 상혼에 닳고 닳아 이해타산으로 때가 묻은 섬이기도 하다. 어디 마라도뿐이겠는가. 전국의 유명한 관광지는 대부분 이와 같다. 마라도에 비해 가파도는 고향 같은 섬이면서 순박한 인정이 넘치는 섬이었다.


제주도라는 커다란 섬 속의 섬 가파도를 가던 날 바다가 더없이 잔잔하고 파랬다. 가는 길에서 제주도를 보면 투구처럼 우뚝 솟아오른 삼방산과 웅장한 송악산이 보인다. 그 산 너머 푸른색으로 단장한 한라산이 여행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이 떠 있다. 날씨가 좋아 산과 바다 섬들의 모습이 선명하여 과연 제주구나 하는 감탄이 나온다.


가파도 상동선착장에 내리면 해안을 따라가는 길과 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있다. 이국적인 풍광을 만드는 야자수 사이를 지나 밭이 있는 길로 접어든다. 가파도는 지형이 낮아서 바다와 거의 수평선을 이룬다. 섬 전체가 산과 언덕이 없는 평평한 곳이다. 섬의 가장 높은 곳이 불과 20.5m이다. 파도가 심하게 치면 섬은 물에 잠길 것만 같다. 옛날 가파도는 지형상 물 사정이 좋지 않았다. 식수는 지하수이며 빗물을 큰 통에 받아 사용했다. 2005년에 해수담수화 시설이 완공되어 하루 150톤의 물이 생산되기에 물 문제는 해결되었다.


동네는 윗마을(상동)과 아랫마을(하동)로 나눠지는데 윗마을에는 자연방파제로 운치가 넘치는 부두가 있다. 섬의 중심지는 하동마을로 두 개의 구멍가게, 경찰초소, 복지회관, 초등학교, 보건 진료소, 해수담수화 시설, 태양광 발전소, 식당이 있다.


하동마을 주변에는 뒤시여, 불락코지, 멸통안, 까마귀돌 등도 있다. 등대는 남부르코지에 있다. 상동 포구에는 작은이끈여, 이개덕, 평풍덕, 개엄주리코지, 큰옹짓물 등이 있다.


상동의 그 위쪽 언덕배기에는 걸터앉기만 해도 날씨가 나빠진다는 '보름바위'가 있다. 가파도 사람들이 날씨에 무척 민감함을 말해주고 있다. 보름바위를 신주 모시듯이 조심히 모셔야 바다에 나가 일할 수 있는 좋은 날이 이어진다니 바다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섬은 대부분 암석해안을 이루고 있으며 제주 본도와 이웃 마라도와 같이 화산석인 까닭에 돌출적으로 그려내는 자연풍광이 여느 섬과는 분명 다르다. 이 가운데 검은 조약돌이 널려있는 서북쪽 '조약돌 해안'은 으뜸으로 꼽힌다.


주변 해역에는 어로자원이 풍부하다. 연안 일대에는 자리돔 어장이 형성되었으며, 모슬포의 일미로 꼽는 '자리회' 산지이기도 하다. 이밖에 갈치, 소라, 성게, 오징어, 전복, 해삼, 해조류 등이 많이 난다. 연안의 다양한 어족으로 인하여 가파도 해변을 찾는 낚시꾼들이 날로 많아져 가고 있다.


가파도 주변 바다는 옛날부터 제주도의 황금어장으로 손꼽는 곳이다. 이 어장은 구한말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정치 현안 문제로까지 대두되었던 곳이다. 특히 1886년 일본 잠수기업자들이 정착하면서 잠수기선이 불법으로 드나들며 노략질해 가곤 했는데 그 도가 지나쳐 가파도 주민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였다. 지금도 불법어로 선박의 출몰은 빈번하다고 한다. 한두 시간만 작업해도 굉장한 양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쪽에 있는 하도 포구는 약 30t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시설을 갖추고 있으나 만조 및 간조 때에는 바다 깊이의 차이가 비교적 크고 수심이 얕아서 큰 불편을 겪는다. 거기에다 불쑥불쑥 불규칙적으로 돋아난 바닷속 화산암초는 간 큰 선장이라 해도 마음 놓고 접근하지를 못한다.


북쪽에 있는 하도 포구는 약 30t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시설을 갖추고 있으나 만조 및 간조 때에는 바다 깊이의 차이가 비교적 크고 수심이 얕아서 큰 불편을 겪는다. 거기에다 불쑥불쑥 불규칙적으로 돋아난 바닷속 화산암초는 간 큰 선장이라 해도 마음 놓고 접근하지를 못한다.


유적으로 조개무지 · 선돌 · 고인돌군 등이 있다. 해녀 노젓는소리, 방아질소리, 맷돌질소리 등의 민요가 전해진다. 민간신앙으로는 음력 정월에 천제와 풍어제를 지낸다.


섬 전체를 통틀어 식당 하나에 민박 하나가 전부다. 낚시꾼이 아니라면 길을 잘못 든 여행객만이 찾는다는 가파도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락없이 바다 위 오지마을이었다. 남태평양 거센 바람에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돌담은 그대로 물결 모양을 이루고, 마을 중심에 있는 교회 옆에서 육지와 다른 독특한 모양의 고인돌을 볼 수 있으며, 근처에는 봉분 주위에 돌담을 둘러놓은 제주도 전통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유채꽃


가파도와 청보리


어릴 적의 청보리를 잊지 못하고 살았는데 2015년 4월 11일, 그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가파도의 청보리축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약 1달 정도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2만여 명 관람객들은 커플자전거대회, 소라 잡기, 보말 빨리 까기 대회, 전통낚시대회, 뿔소라 구이 및 젓갈 무료시식, 나는 가수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전날 추자도에 최영 장군의 사당제와 당산제가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일정을 하루 앞당겨 갔는데 행운을 맞았다.


광주에 사는 사진작가 김용대 선생과 등대호를 타고서 사수도와 추포도 횡간도 등을 답사하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갑자기 배가 고장이 나서 객선으로 추자도에 들어갔다가 축제현장을 목격했던 것이다. 가파도도 마찬가지이다. '청보리축제'를 알지 못한 채 시작하는 첫날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었다. 오전에 들어가려다가 여객선 표가 매진돼 오후에 들어갔지만 가파도 탐방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가파도는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나 우도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는 섬이었다. 특히 가파도는 바로 전방에 있는 마라도의 인기에 가려져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우리나라 국토의 최남단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마라도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가지게 되지만, 가파도는 어디에 있는 섬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마라도보다 아름답고 멋진 섬들이 수두룩하지만 국토의 최남단이라는, 마침표 섬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그러나 이제는 옛날 얘기가 되었다. 청보리가 한창 피고 있는 봄이 되면 가파도에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청보리 축제'와 함께 '탄소 없는 섬'이 추진되면서 세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18만 평이나 되는 보리밭으로 유명한 섬 가파도는 우리나라 섬 중에서 가장 낮은 해발 20.5m이다. 제주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과 가장 낮은 가파도 섬이 자리 잡고 있다. 가파도를 찾는 여행객들은 대부분 올레길을 걷기 위하여 온다. 예전의 가파도는 이웃 섬인 마라도를 가면서 그냥 지나가거나 잠깐 들르는 섬이었다. 올레길이 생긴 다음 마라도와 우도처럼 사철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온다. 해양성 기후로 인하여 밭작물이 잘 되는데 겨울철에는 가파도의 자랑인 청보리가 푸릇푸릇하다. 4월이면 다른 지역보다 일찍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다.


가파도의 청보리 재배는 56만 m 2(17만 평)로 섬 전체 면적 89만 m 2(27만 평)의 60~70%를 차지할 정도이다. 가파도에 있는 보리밭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은 보리의 키 때문이다. 다른 지역 보리는 무릎 높이 정도의 크기이지만 가파도의 보리는 재래종으로 1m가 훌쩍 넘는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전체의 흔들림이 너울처럼 보리물결을 만들어 넘실거린다.


이곳에서 나는 보리는 맥주나 식용으로 쓰이는 '향맥'이라는 품종이다. 나그네들은 육지에서 사라진 보리를 아직도 심느냐고 묻는다. 가파도 주민들이 천덕꾸러기 농사인 보리를 계속 고집하는 이유는 일손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물질을 하다 보니 농사일에 신경을 쓸 새가 없다. 그래서 씨만 뿌려 놓으면 문제없이 자라는 보리농사가 제격인 셈이다. 묵은 밭으로 놓아두기는 아깝기 때문이다. 요즈음 드넓은 보리밭과 돌담,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보리 색깔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매년 약 3주 동안 청보리 축제가 열린다. 벌써 6년이 넘었다. 축제기간 동안 보리를 주제로 하여 가파도의 역사와 자연과 독특한 생업문화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청보리밭 사이 걷기, 소망기원 돌탑 쌓기 등 여행객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됐다고 한다.


가파도 청보리 밭


이 보리는 가파도 사람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식량이다. 배가 고플 때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끼씩 식사를 제공했고, 점심은 고구마를 삶아 먹었다. 보리를 가루로 만들어서 떡이나 빵처럼 즐겨 먹기도 했다. 논이 한 평도 없는 지형 탓으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보리는 식량과 땔감과 소의 먹이로 유용하게 쓰였다. 보리 수확이 끝나면 그 자리에 고구마나 콩을 심는다. 가파도 사람들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과 요즈음 건강식품으로 최고 인기를 누리는 값비싼 보리와 고구마를 많이 먹어서 다른 곳 사람들보다 병이 없이 건강하다고 한다.


가파도의 보리밭 사이로 만들어진 제주올레 10-1코스가 조성돼 힐링공간으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올레길은 보리밭 사이로 난 들판을 따라서 섬 한가운데를 가는 길과, 해안선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코스가 있다. 두 길 다 2-3시간이면 한 바퀴 돌아보는데 충분하다. 특히 해발고도가 20m로 오르막이 없어 숨이 차거나 땀 흘릴 일이 없다. 보리밭 사이 길을 걸으며 봄날의 정취를 느끼면서 동지나해의 쪽빛 바다로 그냥 들어가 버릴 것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다. 가파도의 올레길은 상동포구-냇골챙이-청보리밭인데 B코스는 가파초등학교-청보리밭이고, A코스는 개엄주리코지-하동포구로 이어진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사진도 찍어주고 청보리밭 길을 신나게 달리다 보니 갑자기 나도 모르게 흥겨워져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가 귓가에 들려온다/
둘러봐야/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박화목 시인은 이 노래를 작시하여 일약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곡 '보리밭'과 동요 '과수원길'의 작사가로도 유명하다. 황해도 황주가 고향인 그는 6.25 때 부산으로 내려온 실향민이다. 그 당시 피란 생활이 무척이나 고달팠을 것이다. 멀리 두고 온 고향 산천과 보리밭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를 윤용하 님이 작곡해 '보리밭'이라는 노래가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와 작곡에도 외로움과 한이 풍겨난다. 이제 가파도를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나에게 나가는 뱃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그런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막 배를 타기로 하고 보리밭을 걷고 또 거닐었다.


보리밭 노래를 부르면서 보리밭과 보리밭 사이의 돌담길 사이를 거닐다 보니 문득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파도 사람들이 살다가 죽어서 묻힌 돌로 울타리를 만든 무덤이요, 여기저기 방치된 고인돌 군이었다.


가파도의 또 하나의 매력은 청보리와 함께 제주의 봄을 상징하는 유채꽃도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점이다. 유채꽃이 활짝 피어 청보리와 함께 노란 꽃세상을 이룬다. 청보리 수확을 마치면 그 자리에 고구마를 주로 심는다. 특히 고구마는 대부분 대정읍 전분공장으로 납품하는데 품질이 아주 좋아 수익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가구당 경지 면적이 적은 탓인지 다른 섬에서는 쉽게 눈에 띄는 폐농된 밭은 볼 수 없다.


한국에 있는 섬 중에서 가장 낮게 자리한 섬, 탁자처럼 펼쳐진 평평한 대지를 걸어가 보니 가슴이 시원하다. 구멍을 크게 뚫어 쌓은 밭의 돌담들이 정겹다. 돌과 돌 사이의 구멍을 촘촘하게 쌓으면 양지바른 밭이 되지만, 반대로 태풍이 몰아쳐 오면 무너져버리기 때문에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어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곳이다. 하느적거리는 억새풀들 위로 설치된 바람개비 풍력은 바람이 불지 않아 돌아가기를 잠시 멈추고 기다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멜과 가파도


가파도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한 사람들이 도착한 곳이다. 주변 바다는 파도가 거칠어서 가끔 지나는 배들이 파선하는 경우가 있었다. 화란의 동인도 회사는 세계의 바다를 누비면서 대서양과 인도양 남중국해의 바시해협을 그들의 정규 항로 코스로 잡고 일본과의 무역을 하고 있었다. 하멜 일행이 일본의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중 풍랑을 만나 가파도까지 밀려와 난파하게 된 것이다.


화란선이 가파도 부근에 나타난 것은 1653년 8월 중순이다. 스파르웨르호가 나가사키를 목적지로 두고 항해하다가 태풍을 만나 풍랑에 난파되어 이곳에 밀려왔다. 그 배에는 화물 관리인이던 헨드리크 하멜이 타고 있었다. 무역선이자 무장한 군선이기도 한 이 배는 선원이 64명으로 규모가 매우 큰 배였다. 제주도 바다에서 64명 중 28명이 실종되고 36명만이 살아남아 제주도 대정현 판관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뜻밖에 포로 신세로 변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세계의 바다인 대서양과 인도양, 남중국해상 등의 항로를 오가며 일본과의 무역을 활발하게 해 왔다. 화란의 무역선은 멀리 대만해협에서 풍랑을 만나 가파도까지 밀려온 것이다. 그들의 항해술은 당시 최고였지만 거센 풍랑 앞에서는 낙엽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 당시에 8월 중순이었으면 태풍을 만난 것이 틀림없다. 폭풍에 난파된 배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물결이 치는 대로 가파도 근해로 떠밀려 왔던 것이다. 조선에게는 임진왜란 이후 하나의 커다란 자극을 준 사건이다. 세계는 중국과 왜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이 거기에서 새롭게 나올 수 있었다.


둘레길


하멜 일행이 탈출을 시도하게 되자 불안을 느낀 제주목사는 이들을 한양으로 호송하게 한다. 26년 전에 조선에 와 이미 자국 말을 잊혀가던 같은 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이(한국명 박연)의 통역으로 효종을 만나지만, 그들은 신문화를 가진 문화의 전달자가 아니라 서양의 이상한 춤과 노래를 하는 광대 역할만 할 수 있었다. 효종 역시 왕자로 있을 때 청국에 인질로 끌려가 굴욕의 날들을 경험한 적이 있었건만 색목인(色目人) 36명을 접견하고, 어전에서 기이한 춤과 노래에 대한 보상으로 푸짐한 상품을 주는 선에서 만남을 끝내고 만다.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된 이들은 외교적 문제로 인해 한양에서 다시 호남의 오지로 보내져 거지 행색으로 조선의 문물을 자유롭게 관찰했다. 1669년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당시의 생존자 22명을 순천, 남원,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분리 수용했다. 그들은 구걸과 품팔이로 돈을 모아 당시 생존자 16명 중 8명이 탈주하여 일본의 히라도에 도착했다. 1666년 9월의 일이다.


하멜은 일본에서 고국으로 가기 위한 배를 기다리는 2개월 동안 기억을 더듬어 13년 동안의 나포된 체험기를 써 바타비아 총독에게 보냈는데 이 글이 하멜표류기이다. 13년간 조선에 체류한 선원인 하멜은 배의 난파와 포로 신세, 탈출 과정들을 상세하게 적은 <난선 제주도 난파기와 조선 국기>를 저술함으로써 조선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한 것이다. 하멜표류기에는 가파도를 '올파도'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아래의 용머리해안 입구에 '하멜의 표착기념비'가 있다.


그 당시 아시아로 진출한 유럽의 열강들은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슬로건 아래 미래의 주인공을 키웠다. 이들에게 일찍부터 도전과 모험심을 길러서 세계로 향해 나아간 결과 해양국가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돌아오는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가면 명예와 함께 사회적인 신분도 올라갔다. 난파 당시 선장인 에그베르츠는 네델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해금정책을 실시하며 바다로의 진출을 막았고, 섬을 비워 외부인의 접촉을 막는 공도정책도 시행하고 있었다. 그들과 우리의 생각은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는 중국과 왜국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들자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건만, 조선의 관료들은 그들이 가져온 총포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다.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다. 조선의 지배세력이 주자학적 세계관에 빠져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반면 일본인은 그들의 조선술과 항해술과 신문화를 배워 난학(蘭學)이라는 독특한 학문체계를 만들었다. 그것이 근대 일본의 개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똑같이 난파된 배를 통해 한편은 그들을 광대나 부랑자로 취급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그들이 가진 신기술을 배워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었다. 기회는 있었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 만일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가파도 상동에서 청보리 축제 장면


최부와 표류기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최부(崔溥, 1454~1504)가 쓴 '표해록'에는 제주에서 육지로 건너가다가 풍랑으로 표류되었을 때 제주도 사람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뿐이겠는가. 섬사람들은 작은 풍선을 타고 고기를 잡다가 자주 난파당하고 표류하다가 바다에 수장되기도 했고 멀리 떠밀려 가면 쉽게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없었다. 최부의 '표해록'에 "우리 제주도는 아득히 바다 가운데 떨어져 있어 수로로 구백여 리나 되고 또 파도가 어느 바다보다 흉포하기 때문에 공물 실은 배와 장삿배가 끊임없이 표류하고 침몰하는 것이 열에 대여섯은 됩니다"라는 제주도 사람의 탄식을 볼 수 있다.


이는 비단 제주도 사람만의 고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항해술과 조선의 조선기술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해 보면 섬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느 지역이나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하멜이나 문순득처럼 물고기 밥을 기적적으로 면하고 일본, 중국, 유구국 등의 바다로 표류했더라도 살아서 돌아오는 경우는 20% 정도도 안 되었다. 해적선에게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최부 일행처럼 때때로 그 나라 관군에게 붙잡혀 해적으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운명은 자기들이 사는 섬을 떠나 고기잡이나 육지에 나갈 때나 돌아올 때면 풍랑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 그러니 배를 타고 바다에 나온 순간부터 생명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섬사람들은 뼛속까지 이런 숙명적인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연에 맞서는 게 불가능함을 알 수밖에 없는 환경 탓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섬나라 일본에서는 육지 사람들보다 우상 숭배가 많으며 당산제와 용왕제, 풍어제 등을 통하여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가파도 관광명소


동동리 해변과 하동항


동동리 쪽 해변과 하동항에서는 하와이에서나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다.


고냉이돌


가파도의 하동항에서 5분 정도 나가면 고냉이돌(바다 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다. 마치 바위모양이 고양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낚시하기에 좋은 곳이다.



https://www.visitjeju.net/kr/detail/view?contentsid=CNTS_000000000018432#



먼지 무덤


먼지는 날마다 쉬지 않고 쌓인다

날마다 먼지 청소를 하지 않으면

나는 나도 모르게 먼지에 묻힌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나의 삶이 현성이의 삶을 망쳐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삶이 보내는 신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성이보다 내가 먼저 변해야만 한다. 나의 삶이 먼저 변해야만 한다. 내가 먼저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모범적으로 변해야만 한다. 내가 먼저 변해야 나도 살고 아들도 살 수 있다. 내가 잘 살아야 아들이 잘 산다. 아들은 나의 그림자다. 아들은 내가 찍어놓은 발자국을 먹고 자란다. 아들은 내가 길에 벗어놓은 발자국을 먹고 자란다. 내가 벗어놓은 발자국이 아들의 밥이 되고 아들의 옷이 된다.


아들이 지금 많이 아프다

나의 마음이 많이 아프다


깍지벌레를 잡아야만 한다

마음속에 깍지벌레가 많다


인생일기(20190919) 1. 도박 인생 1


우선 전에 쓴 글들을 수정 보완하고 새로운 글들을 덧붙여 내 글들을 써내려 갈 예정이다. 그리고 진짜 내가 쓰고 싶을 때 또 쓰고 싶은 것들을 쓸 예정이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우선은 전에 썼던 글을 가져오기에 앞서 얼른 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힘들었던 지난 도박인생을 기록하고 싶다.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요즘 항상 떠오르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일 때쯤 잠자기 전 잠을 잘 거라는 것이 너무 좋았다. 기분이 좋았다. 정말 순수하고 예쁘다. 다음 날 가기 싫은 학교에 갈 건데 그저 잠을 잘 수 있어 좋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 약간의 엔도르핀을, 살면서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도박을 하고 나서 잠은 주로 힘든 것을 잊기 위해, 또 잠이 들고난 후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 글은 정말 쓰레기 같고 한심한 경험의 글이다.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자취방에 울리는 타자소리가 스스로를 서글프게 한다. 스스로를 동정하게 한다. 물론 이런 기회를 준 분께 감사하다. 하지만 내 지금의 상태는 심적인 고통 이외에 다른 기분을 느끼기 힘들다. 지금도 도박을 하고 싶다. 정말 솔직히 글을 쓰고 싶다. 앓는 소리를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들과 고통들이 나를 성장할 수 있게 한다면, 성장하고 싶지 않다.

정말 내가 성장하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예전의 나를 영영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요즘 자꾸 도박을 떠올리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마리아상이 떠오른다. 꿈에도 나온다. 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데 이상하다. 각종 미디어의 영향일까. 왜 피눈물을 흘리는 성모마리아상이 떠오르는 것일까.

1년 정도 지났다. 처음 도박을 시작한 지, 나아진 것은 없다. 오히려 내가 많이 망가졌다. 많이 망가진 정도가 아니고, 그냥 폭삭 망가졌다. 좋은 것을 봐도 우울한 생각을 먼저 한다. 돈을 벌기 위한 궁리를 한다. 일단 살이 많이 쪘다. 한 10킬로가량 찐 것 같다. 살부터 빼야겠다.

도박에 관해 글을 쓰기 싫어졌다. 떠오르는 기억들이 고통스럽다. 어떤 것부터 써야 할까. 시간의 순서대로 쓰고 싶지 않다. 떠오르는 순서대로 써야겠다. 우선 내가 했던 도박에 대해 써야겠다. 가상축구. bet365라는 세계적인 배팅사이트에서 만든 가상 축구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가상축구경기를 한다. 예를 들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토트넘이라고 치자. 그럼 배당이 있다. 승 무 패에 각각 배당이 있다. 예를 들어 맨체스터유나이티드가 강팀이라면 배당률은 대충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승 2.0 무승부 3.4 토트넘 승 4.0 실제 축구가 아닌 가상축구다. 이 가상축구를 지긋지긋하도록 많이 했다.

글을 쓸수록 자괴감이 든다. 해외사이트에서 만든 것을 국내 도박 사이트들은 그 경기 결과들을 가져와 사이트에 올려놓는다. 가상축구가 없는 도박 사이트들도 많다. 국내 프로그램이 아니라서 사다리 이런 것들보다 조작이 없고 괜찮을 거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아직도 기억에서 지우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한 때 나는 이 가상축구의 프로그램을 완전히 간파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처음 집에서 나가겠다고 했을 때였다. 만경이네 집에 갔다. 10만 원인가 20만 원이 있었다. 수중에는 아마 받은 것이었을 것이다. 새벽에 만경이와 용성이 자취방에서 몰래 스마트폰으로 가상축구를 하는데 10만 원이 몇 십만 원이 되었다. 수 십만 원이 되었다. 수 십만 원이 되었는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멈추지 않고 계속하였다. 그러다 10만 원이 남게 되었다. 결국에는 수 십만 원이 있었는데 10만 원만 남게 된 것이다. 그때 또 마침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었다. 새벽에서 아침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옷을 입고 제주대 후문 근처 피시방에 가게 되었다.

기억이 난다. 10만 원이 전부였는데, 나는 바이에른 뮌헨 승리 1.9 무승부 3.4 패배 4.0 정도의 배당이었다. 한마디로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팀이 이긴다에 걸어서 맞추면 19만 원 무승부에 10만 원을 걸어서 맞추면 34만 원 진다에 걸어서 맞추면 40만 원 정도였다. 나는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던 바이에른 뮌헨 승리에 돈을 전부 걸었다. 맞췄다. 19만 원이 되고 그 돈은 조금씩 올라 다시 수 십만 원이 되었다. 그리고 제대로 하기 위해 그 이른 아침에 제주대학교 후문 피시방에서 인문대학 학생회실로 내려갔다. 그날은 귀신에 홀린 날이었다. 다시 수 십만 원이 된 내 잔고는 200만 원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200만 원은 다시 100만 원이 되었다가 운이 좋아 500만 원이 되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잠도 못 잤고 나는 나쁜 짓을 하고 있는데 10만 원을 걸어 따지 못하면 잔고가 없었을 나인데 수중에는 500만 원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배팅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500만 원을 따니 완전히 프로그램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학생회식인가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만경이네 집이 불편했다. 4만 원 정도 주고 시청 근처 모텔 숙소를 잡았다. 기억이 난다. 그 방의 분위기와 밝기, 아 모텔은 며칠을 잡았다. 그날 하루가 아니라. 그 500만 원은 원예를 만나기 전까지의 도박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원예를 만나기 직전까지 나는 도박을 했다. 원예는 피시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 피시방에 진작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원예가 맞은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예가 보이지 않게 도박을 계속하고 있었다. 정말 용기가 대단한 것 같다. 그 번화가인 시청 피시방에서 불법사이트를 버젓이 켜놓고 도박을 하다니. 그렇게 내 500만 원은 1,000만 원이 되었다. 몽롱했다. 마약을 한 것처럼 도박은 희한하다.

정말 많이 따게 되더라도 그렇게 기쁘지 않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돈도 언젠간 내가 다 날릴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원예와 데이트를 했다. 원예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데이트할 당시에는 1,200만 원 정도가 되었었다. 오늘 귀신에게 홀린 것 같다고 했다. 10만 원이 1,200만 원이 되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맥주 집에서 먹고 싶은 안주들을 전부 시켰다. 그래도 5만 원이 안 되었던 것 같았다.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넋이 나가 있었다. 나는. 그동안 원예와 정말 많이 싸웠다. 그날도 어김없이 싸웠다.

싸우고 집으로 가는 길에 현동이와 통화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고. 이러이러하게 되어서 지금 돈이 많이 있다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돈 필요하면 말하라고 그랬다. 현동이는 그때 돈이 없어서 돈을 빌릴 수 있겠냐고 하길래 당연히 빌려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원예와 헤어지고 다시 모텔로 갔다. 지금부터는 떠올리기 싫다. 갖고 있던 1,200만 원은 그날의 프로그램은 내가 완전히 파악하고 이해했기 때문에 다시 1,700만 원이 되었다. 이게 내 가장 큰 불운이었다.

1,700만 원은 그때 당시의 내가 까먹은 돈을 다 합하고 엄마에게 있던 500만 원의 빚을 다 갚아도 오히려 흑자였다. 거기서 멈췄으면 정말 예전의 나로 돌아갔을 것이다. 새벽에 또 1,700만 원으로 도박을 하였다. 대체 어느 정도까지 땄어야 나는 멈출 수 있었을까? 도박의 무서운 점 중 하나다. 따도 잃어도 멈추지 못한다. 해가 뜰 때까지 도박을 했다. 정말 그야말로 밤새 했다. 1,200만 원을 잃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못했다 현동이에게 미리 보내놓은 엄마에게 갚아야 할 500만 원을 다시 달라고 하였다. 현동이는 내가 줬었고 내가 계속해서 부탁을 하니 다시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 500만 원도 다 썼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무표정으로 글을 쓰지만 당시의 심정은 세상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고 허무했고 화가 났다. 마지막 베팅을 하고 틀렸을 때 모텔의 벽을 발로 찼다. 벽이 뚫렸다. 걱정이 되었다. 물어줘야 할까 봐 이미 나는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다시 또 이 돈을 물어줘야 한다면 정말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텔에서 다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세상을 잃은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일단은 집에 오라고 하였다. 일단 가장 기억에 크게 남아있는 단편적인 장면이다. 일단 도박이야기를 떠올리고 다시 글로 쓰니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잠시 다른 글을 써야겠다.




이전 15화 마라도에서 돌아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