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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Apr 21. 2024

공작꼬리금붕어

순례 003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윤동주 시인과 함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 드디어 별이 되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도

바로 눕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죽어서도 땅만 보고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부른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나도

이제는 그 아득한 길을 걸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 부처님과

서불선생과 설문대할망과 마고할미와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윤동주 시인과 나는 함께

이어도 문을 열고 나와서 순례길에 나선다

설문대할망의 고향으로 간다

마고할미의 고향으로 간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으로 간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한라산으로 간다

지리산으로 간다 백두산으로 간다 북간도로 간다

다시 처음부터 세상을 깊이 읽으며

멀고도 긴 순례를 떠난다

30년 넘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내 삶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제주도에서 온 영혼들이 함께 따라나선다

정방폭포에서 온 영혼들이 먼저 따라나선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없었고 땅도 없었고

하느님도 없었고 말씀도 없었다

태초라는 말도 없었다


빛도 없고 어둠도 없는 허공에

아무도 모르는 씨앗 하나 날아왔다

그 작은 씨앗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


처음은 그렇게 하나로 시작되었다

하나의 껍질을 벗으니 둘이 되었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 넷이 되었다


어느 맑은 날 문득 하늘이 생겼다

하늘은 텅 빈 없음이니 없음이

자꾸만 무엇인가를 낳기 시작했다


먼지를 낳고

바람을 낳고

구름을 낳고

어둠을 낳고

별과 달과 지구를 낳고

뜨거운 태양을 낳았다


하나가 둘이 되면서 빛과 어둠이 생겼고

둘이 넷이 되어 동서남북을 낳아 길렀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나서 팔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처음의 세상은 너무나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세상에

구름은 물이 되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물과 흙은 생명을 낳았고

생명들은 물에서 흙으로

흙에서 허공으로 퍼졌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따뜻함을 중심으로 모였다

손에 손을 잡고 돌기 시작했다

따뜻함은 가득한 사랑이니

사랑은 사랑을 낳아 길렀다

세상은 그렇게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신들을 낳았다


공간이 만든 신들은 죽고

인간이 만든 돈이 빛났다

신들의 시대는 지나가고

인간의 시대도 지나가고

화폐의 시대도 지나가고

지구는 병이 깊이 들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거나

메타버스를 타고 가상공간으로

서둘러서 떠나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죽었고

스스로 신에 등극한 돈이

인간들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과 사람과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옹달샘의 숲이 되어 숲으로 살아간다


이어도에서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봄꽃


봄꽃은 백일사진이 없다

죄를 지을만한 시간이 없다

봄꽃은 늙을 시간이 없다

아,

영정사진 속 4월의 봄꽃들



이어도 문을 나서며


이어도에서는 수평선이 둥그렇게 보인다

파도가 하늘을 살짝살짝 들어 올린다

하늘과 바다의 틈으로 보니 지퍼가 보인다

더 먼 곳에서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한 송이,

이어도해양과학기지가 지퍼를 열고 있다

태초에 빛과 어둠으로 갈라졌듯이

태초에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졌듯이

수평선의 지퍼가 조금씩 더 열린다

설문대할망이 만들었다는 한라산이 보인다

하늘에서 다시 보니 럭비공으로 보인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불안하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 다투어 발로 차더니,

미국과 중국이 다시 다투어 함부로 찬다

그래도 둥근 공은 끝까지 알이 되고 싶다

해양과학기지 주변으로 배들이 몰려온다

과학기지 날개 위에서 헬기가 날아오른다

바다의 지퍼가 열리고 하늘의 지퍼도 열린다

설문대할망은 한라산 백록담을 노래하고

마고할미는 지리산 노고단을 노래한다

윤동주 시인은 오늘도 서시를 읊조리고

나는 연어의 종착역으로 가는 연어가 된다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해(海) 1번지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태평양로 1

이어도 섬을 당신은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그런 이어도를 아시나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섬

하늘과 바다를 이어주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

태평양으로 날아가는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제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꿈꾸어 오던 섬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뿌리 깊은 섬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의 꿈을 아시나요



노인성이 유숙하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혁신도시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이어도 길을 걷다가 태평양으로 간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을 만나러 간다

남극노인성이 유숙하는 이어도로 간다


바다에서 해(海)를 본다 물이 아프다

인간들의 욕망이 낳은 쓰레기들의 섬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욕망들의 얼굴,


바다 해(海) 글자를 더 자세히 본다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프다

아픈 어머니에게 방사능 오염수까지 먹인다

태평양의 수평선이 트로이목마를 끌고 온다

북극곰의 신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막내아들이

뜨거운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다

유숙하던 노인성도 곁에서 돕는다

서천꽃밭 꽃감관도 불사화를 가져온다


용궁으로 가는 올레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온다 하늘에는 서천꽃밭이 있고 땅에는 마고성이 있고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노인성과 꽃감관도 떠나지 못한다



여섬이 되었네

   

이어도는 최고

대상군 해녀네

깊은 물속으로

한 번 들어가서

나올 줄 모르네

비바람 불어도

모습 안 보이네

태풍이 불어도

나오지를 않네

해양 과학기지

테왁처럼 떠서

님을 기다리네

용궁으로 떠난

님을 찾아 나선

긴 사랑의 물질

끝날 줄 모르네

숨비소리도 없이

돌아오지 않네

나도 님 찾아서

이어도로 가네

사랑을 찾아서

여의도로 가네

전복보다 좋은

여섬으로 가네

이어도 여의도

여섬이 되었네


* 이어도와 여의도는 둘 다 여섬이었다


마라도에서

   

순례에 따라나선 영혼들이 서두르자고 한다

제주도가 고향인 영혼들이 서두르자고 한다

정방폭포에서 온 영혼들이 서두르자고 한다

하루속히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사정을 한다

전설이 피워 올린 연꽃은 다음을 기약하고,

서둘러서 제주도로 간다 정방폭포로 간다

아니, 가장 가까운 마라도부터 먼저 간다

태풍이 자주 다니는 길을 따라서 서둘러 간다

오늘은 주름치마 입은 파도가 안내를 한다

마라도 등대가 보인다 장군바위가 맞는다

대한민국최남단 표지석 앞에서 물질을 한다

(대한민국최남단은 이어도가 되어야만 한다)

(대한민국최남단은 대마도가 되어야만 할까)

나의 전생의 어머니의 숨비소리도 들린다

포작이었다는 할아버지 목소리도 들린다

퉁소를 불어서 뱀들을 몰아냈다는 마라도

늙은 아버지는 오늘도 빈 퉁소를 불고 계신다

늙은 해녀들은 이제 먼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톳짜장에 넣을 톳을 할망 바당에서 뜯고 있다

마라도에서 일단 한숨 돌리고 쉬어가기로 한다

이어도에서는 젖꼭지만 보이던 한라산이 훤히 다 보인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면 아직도 젖이 나올 것만 같은

한라산의 가슴이 통째로 다 보인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스르르 잠이 올 것만 같다 꿈처럼 살았던 이어도의 생활

마라도에서 돌아보니 이어도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다

서복님과 부처님과 예수님 이야기를 윤동주 시인과 한다

다시 돌아보니, 가파도와 송악산과 산방산과 한라산이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항공모함처럼 생긴 마라도가 기적을 울리며 움직인다

마라도에서는 가끔 고구마 굽는 냄새가 솔솔 피어오른다


 고사리 장마

   

제주의 사월은

고사리 장마에 젖는다

그때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

이제 겨우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다     

제주도 고사리 장마는 잊지 않고 찾아온다

사월이면 잊지 않고 한라산으로 올라간다

그날 밤에 올랐던 봉화 불 연기처럼

안개 가득 몰고서 다 함께 찾아온다

한라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들

해마다 잊지 않고 밤마다 고개를 내민다

고사리 멜빵으로 제사음식 지고 올라가서

죽어서도 굶고 있는 영혼들에게 나눠준다

오늘도 제주는 고사리 장마에 젖으며 자란다

제주의 사월의 안개비에는 봉화불이 숨어있다     

입춘이 지나도 봄은 오지 않았다

제주의 봄은 4월에 비로소 비처럼 온다

하얀 겨울을 입고 있던 붉은 동백이

관덕정 광장에 떨어져 피를 흘렸다

소문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뼈만 남은 억새들이 불타올랐고

불안한 눈빛들도 이글거렸다

섬 안의 모든 동백꽃들이 불을 켰다

호롱불도 있었고 촛불도 있었다

별빛도 있었고 횃불도 있었다

밤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꽃비가 내리고

고사리 장마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집에 있지 못하고

한라산으로 올라가

어린 고사리처럼 고개를 깊이 숙인다

오늘도 고사리 장마에 어깨가 젖는다

                                                                                                                                              


가파도에서 송악산으로


마라도 살레덕선착장에서 배를 타도 되지만

나는 이어도에 살던 진인답게 바람으로 간다

서핑보트를 타듯 파도를 타고 가파도로 간다

가파도 주변에 젊은 해녀들이 소라를 잡는다

가파도 짬뽕에 들어갈 뿔소라, 망사리 가득하다

나는 가오리 꼬리를 잡고 가파도 등에 오른다

가파도는 갈수록 젊어져서 힘도 좋고 싱그럽다

가파도에서는 청보리 밭에서 파도소리 들린다

가파도 올레길은 바람도 자전거를 타고 돈다

가파도 올레길에서 보는 송악산 산방산 한라산,

황홀함에 이끌려 모슬포 운진항으로 가지 않고

송악산으로 간다 산방산으로 간다 한라산으로

간다 송악산에 도착하여 다시 한번 돌아본다     

‘절울이’란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송악산

늘 물결이 운다는 송악산 주위의 절벽들

절벽에서도 자세히 보면 길이 보인다

낭떠러지에도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마라도와 가파도 사이, 물결이 사납다

저 바다 밑 물길 속에는 이어도로 가는

고속도로가 뚫려 있다 이곳에서 탑승한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어도에 살고 있다

나는 이어도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들었다

모슬포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보목 자리보다 모슬포 자리가 억센 이유를

방어 축제 준비하다 이어도로 떠난 사람들,

아무리 지독한 빚쟁이도 순해진다는 전망대

가파도 되고 마라도 되는 우리들의 빚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시인을 만났다

어머니가 지금도 물질을 한다는 시인을 따라서

전복이 많은 바당, 소라가 많은 바당을 지나서

해녀들의 불턱에서 나도 이제 옷을 갈아입는다



봄꽃이 속살을 찢는다


햇빛의 칼날이 반짝인다

망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눈을 찔끔 감고

숨도 잠시 멈추고

햇빛 칼날을 쓰윽 긋는다

투명한 피가 흘러나오고

비명소리도 터지면서

봄꽃은 속살이 찢어진다

아, 환한 봄꽃이 피어난다

봄꽃은 지혈도 하지 않는다

빈혈에 시달리는

벌과 나비들에게

아낌없이 헌혈을 한다

봄꽃은 환하게 아프다

봄꽃은 환해서 더욱 아프다

세상이 빈혈로 아프다

나도 봄꽃처럼 환하게 찢는다

너도 봄꽃처럼 환해서 더욱 아프다



사계리와 용머리해안


아주 먼 옛날에도 사람들이 살았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화석으로 남았다

나는 송악산에서 산방산으로 간다

산방산은 백록담 안쪽을 엎어 놓았다

저 산 안의 방에서 살아도 좋겠다

산방산 안으로 간다 상모리에서

사계리 해안으로, 봄바람으로 간다

죽솥에 빠진 설문대할망 뼈를 보고

이곳까지 와서 매일 삼천 배를 올린다는

오백장군 형제들의 막내 형제를 보면서

사람발자국 화석에 나의 발을 맞춰본다

소와 사슴 발자국에 나의 발을 대본다

매머드의 발자국에 나의 발을 넣어본다

나는 먼 옛날에 무엇으로 살다가 갔을까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의 모래밭에서

사랑하는 그대를 찾고 있는 것일까

아주 먼 다음에도 사람들은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며 나는 용머리해안으로 간다

이어도로 가고 있는 용이 한 마리 있다

하늘로 가지 않고 바다로 가려는 용

고종달이 잘라버린 날개 때문에,

바닷속 고속도로를 달려갈 용이 있다

섬나라를 건국한 서복이 그리워하는 산방산을

업고 이어도로 가려는 용 한 마리, 하지만

산방굴사에 앉아계신 부처님께서

지금은 여기가 더 좋다며 붙들고 있다

이어도로 가려는 용과, 머물려는 부처님은

언제쯤 마음을 합하여, 이어도로 갈 수 있을까

나는 용머리 해안부터 시나브로 둘러보고

산방굴사의 부처님을 먼저 찾아갈 것이다


봄에는 모두가 손을 모은다


떡잎 둘, 손을 모으고 있다

호박씨 껍데기를 쓰고 있다

봄에는 모두가 손을 모은다

우리는 간절히 손을 모은다

너와 나 간절히 손을 모은다

떡잎도 꽃잎도 손을 모은다

몸과 마음이 함께 손 모은다

하늘도 손을 모으고

바다도 손을 모은다

손을 모으면

껍데기는 스스로 떨어진다

봄은 언제나 기도의 신이어서

모아진 손에서 봄이 피어난다

장갑도 벗고 모자도 벗고 피어난다



산방산에서


산방산 정상에 앉아 눈을 감으면 이어도가 보인다

산방산 정상에 앉아 눈을 감으면 숨결이 들어온다

산방산 정상에 앉아 눈을 감으면 당신이 들어온다

산방산 정상에 앉아 눈을 감으면 당신이 안아준다

산방산 정상에 앉아 눈을 감으면 당신과 하나 된다


산방산에 구름이 집을 짓는다

산 안에 방이 있는 산

산과 산 사이에 방이 있는 산

나는 산 안에 방이 있는 산을 찾았다

산 안에 있는 방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산방산에는 빈 방이 없다

산방굴은 이미 부처님께서 차지하셨고

서복 선생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던

옥탑방에는 이제 올라갈 수가 없다

산방산 옥탑방에서는 이어도가 보인다

한라산 옥탑방에서도 이어도가 보인다

아름다운 세상이 훤히 보인다고 했는데

이제는 산방산 꼭대기에 올라갈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산방굴사에서 겨우

산방덕이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내려온다 


산 안에 방이 있는 산이 있다 

산과 산 사이에 방이 있는 산 

방 안에 산이 있는 방이 있다 

방과 방 사이에 산이 있는 방      

나는 그런 산방산 안에 있다      

절반쯤은 늘 안개에 잠겨 있는 

가끔은 이어도가 희미하게 보이는 

그런 산방산 안에서 나는

산방덕이의 부처님을 만난다

산방굴사 안에서 부처님께서 

먼바다를 지그시 꿈꾸고 계신다


서귀포 화순해수욕장에 섬을 꿀꺽 삼켜버린

커다란 보아뱀 두 마리 살고 있다

산방산을 삼키고 부처의 고뇌를 삼켜버린 

보아뱀, 두 마리 오늘도 바다로 기어가고 있다 

추사의 세한도를 삼켜버린 용머리 보아뱀 

횟집과 민박집을 삼키고 부른 배로 기어가는 

보아뱀, 두 마리가 화산처럼 부글거리며 

이어도로 가고 있다 

나는 그 보아뱀이 삼켜버린 많은 전설들을 알고 있다 

갈대숲의 새와 검은 쥐들과 취객이 토해 놓은 

어둠과 욕망의 내력들을 다 알고 있다 

보아뱀 뱃속에서 좌선하는 부처님과 추사가 코끼리 꼬리에 대하여 

한담을 나누고 있다 

가끔은 무지개의 뿌리 쪽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보아뱀 

바람이 거세어 배들이 피항하는 화순항 

바람이 거세질수록 화순 앞바다를 

더욱 치열하게 기어가는 뜨거운 보아뱀 두 마리 

지금 막 빠져나가고 있다 

이어도로 가고 있다


보아뱀이 훌쭉하다

산방산이 홀쭉하다

악어도 홀쭉하다

송악산도 홀쭉하다

한담을 나누시던

추사와 부처님은 어디로 가신 것일까

코끼리는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을까

형제섬을 토해 놓은 악어는 지금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가

더 홀쭉한 가파도를 물어뜯으려는 것일까

등을 무겁게 누르는 구름은 잡아먹지 못하고

손이 없는 긴 몸뚱이만 꿈틀거리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장가 소리에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는 검둥개는 보이지 않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흰둥개도 보이지 않는다



꽃을 벗고 환한 알몸이다


저 모과의 효심을 보라

어린 모과를 다시 보라

제 어미를 머리에 이고

춤을 추는 모과를 보라

어미인 모과 꽃을 보라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과와 모과 꽃의 춤을 보라

매실은 제 자리가 좁다고

어미인 꽃을 찢어버리는데

저 모과는 무등을 태워준다

나도 저 어린 모과처럼

어머니를 어깨에 올려

단 한 번이라도

목말을 태워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 아!



무등산과 무등이왓


무등산이 무등이왓으로 간다

무등을 타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입석대와 서석대는 정방폭포에 들러

수박령들 모시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동광 육거리 헛묘에도 둘러보고 간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하늘로 떨어지는 폭포

정방폭포는 바다로 솟아나는 주상절리

하늘도 바다도 무등을 타고 춤을 추며 간다


우리는 누구라도 존재 자체로 귀한 사람들

누구라도 살아있는 자체가 눈부신 아름다움


정방폭포 수박령들 무등이왓 지박령들 만난다


무등이왓 입구 조릿대에 리본들이 펄럭인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분홍의 마음들

집터에는 작물들만 해마다 기억을 되새긴다

자리 잡은 더덕 꽃이 열매를 낳는다

잘 익은 콩들이 똘망똘망 눈을 뜬다

공고판이 있던 자리에 메밀밭이 백비처럼 누워있다

밤마다 달은 달빛으로 비문을 새겼다가 다시 지우고

날마다 해는 햇빛으로 비문을 새겼다가 다시 지운다

“통일의 첫걸음이었다”라고, 썼다가 지우던 메밀밭

잊지 말자고 그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볕뉘라도 건져 올려 밥을 짓는 복조리의 마음


하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영혼들

지상에서 더욱 아름답게 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


무등이왓이 무등산으로 간다

큰넓궤에서 잘 숙성된 고소리술을 들고 간다

헛묘에 들렀다가 정방폭포에도 들러 무등산으로 간다

무등이왓이 무등을 타고 무등산으로 춤을 추며 가고 있다



베이스캠프


산방산에서 나는 무등산을 보았다

산방산에서 나는 무등이왓을 보았다

무등을 타고 가는 무등산을 보았다

무등을 타고 가는 무등이왓을 보았다

산방산에서 월라봉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나는 그만 무등산을 보아버렸다

나는 그만 무등이왓을 보아버렸다

아니, 정방폭포의 영령들이

우리들을 먼저 알아보고 찾아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곳에 베이스캠프를 친다

산방산과 월라봉 사이에 여장을 풀어놓는다

베이스캠프를 치고 제주를 순례할 것이다



정방폭포 서()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주상절리 서랍에서 흑백사진 한 장 꺼낸다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전분공장과 창고들이 보이고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그중의 한 사람을 따라서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윤동주를 읽던 정방폭포가 젖은 몸으로 따라나선다


* 2023년 5월 75년 만에 정방폭포 4·3 희생자 위령 공간이 마련되었다 

    


반야심경


엘리베이터 속에서 폭포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정방 모습이 보인다

정방폭포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다슬기처럼

한참을 멈췄다가 다시 올라간다

나를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 로프도 보인다

나를 하늘로 인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수염이 아니라

기름이 잔뜩 발라진 검은 쇠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계단을 오른다

쇠줄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오른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스스로 올라간다

아파트 옥상에는 하눌타리꽃이 피어난다

별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하눌타리 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송하고 있다

반야심경(半夜心經)을 염불하고 있다

깊은 밤의 마음을 뚫고 만다라가 핀다

붉게 핀 칸나의 꽃들은 합장을 하고

도라지꽃들은 묵언수행을 하고 있다

푸른 고추들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고

토란잎에 매달린 취우들의 눈빛이 맑다

흙의 가슴에서는 고구마 순의 상처에서

이제 막 뿌리를 만들며 어둠을 뚫는다

땅속에서 반야심경(半夜心經) 소리

하늘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 소리

마음속으로 반야반야(半夜般若) 소리

저 멀리 보이는 드림타워에서도

정방폭포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밤을 알아야 낮을 알고

달을 알아야 해를 알고

어둠의 그림자를 알아야 빛이 보인다

나는 이제 반야에서 천천히 줄을 타고 내려온다

260자의 윤슬이 마음의 경전으로 빛난다

경전 속에서 바다는

파도를 불러 오도송(悟道頌) 하나 읊고 있다


공작꼬리금붕어


공작꼬리금붕어를 본다

어항 속에서 꼬리를 편다

나는 너무 오래 누워서

꿈만 꾸었다 꿈을 펴는 동안

나의 몸은 뻣뻣하게 굳었다

아,

나무토막이 되어버린 몸

단단하게 굳어버린 이 몸을

어떻게 다시 펼 수 있을까

공작꼬리금붕어를 보며

서서히 몸을 흔들어본다

꼬리부터 머리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서히

아주 천천히 몸을 풀어준다

어항 밖에서 나도 언젠가는

공작의 꼬리를 환하게 펴리라


박과 수박과 호박


달항아리 새끼를 품은 박꽃이 보고 싶다

부지런히 초가지붕 위로 올라가서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빚어놓던 박꽃들

이제는 초가지붕도 없고 흥보도 떠났다

박을 삶아 바가지를 만들던 쇠죽 솥도

문지방에 놓고 밟아 깨뜨리는 신랑도,

아, 이제는 박꽃을 피울 수가 없구나

박꽃은 사라지고 수박의 뿌리로만 산다

온몸을 수박에게 내어준 박은 행복할까

수박은 박의 튼튼한 뿌리로 살아간다

달항아리보다도 보름달보다도 더 크다

수박은 씨가 없어서 행복할까 불행할까

자, 이제 내가 좋아하는 호박을 보아라

호박은 따로 심지 않아도 번성하리라

설사 자신이 비참하게 버려질지라도

호박은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을 녹여서 씨에게 젖을 준다

씨가 없는 수박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로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해낸다

나는 달항아리도 좋고 달도 좋지만

호박의 저 대책 없는 숨소리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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