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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Apr 24. 2024

씨앗에서 떡잎까지

순례 005



씨앗에서 떡잎까지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종을 사다 심는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씨앗을 심는다

씨앗에서 떡잎까지의 길을 보기 위해서다

상추도 배추도 호박도 오이도 

고추도 가지도 옥수수도 방울토마토도

모종을 사다 심으면 쉽게 농사 지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씨앗이 갑옷을 벗고 나오는

황홀하고 수고스러운 순간을 포기할 수 없다

오늘도 나는 투구를 쓰고, 무거운 흙을 

머리로 들어 올리는 호박과 물외를 보았다

오늘도 나는 딱딱한 갑옷을 뚫고(열고) 나와

뿌리를 내리고 손을 뻗어 올리는 복숭아를 보았다

오늘도 나는 어두운 감옥을 탈출하여

뿌리보다 잎을 먼저 내미는 연꽃의 발아를 본다

봄에는 땅에 손만 짚어도 뿌리를 잘 내린다

무화과나무는 땅에 무릎을 꿇으면 무릎에서 뿌리가 나오고

로즈메리는 바람에 쓰러지면 등짝에서도 뿌리가 나오고

담장을 넘어온 능소화는 머리통에서도 뿌리가 잘 나온다

환갑이 다 되어서야 겨우 다시 봄을 맞이하는 나는

씨앗에서 떡잎까지의 길을 보면서 비로소 회춘한다

나의 그림자도 이제는 흙을 만나 뿌리를 내릴 것만 같다




복숭아



부드러움 속에 딱딱함이 숨어 있고

딱딱함 속에 부드러움이 숨어 있다

어머니는 고운 피부 향기로운 마음

아버지는 곰보 얼굴 억척스러운 마음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사랑했을까


딱딱한 복숭아씨 속으로 물이 들어왔다

나는 손과 발을 내밀어 흙을 만났다

흙속에 뿌리를 내리고 위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쉬지 않고 나에게 젖을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안아 주었다

내가 다 자라서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때

어머니는 나를 키우느라 젖이 다 말랐고

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하느라 몸이 부서졌다


세상이 아무리 무서워도

흙과 물이 있으면 뿌리를 내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요즘에는 시멘트와 아스팔트 때문에

흙을 만날 수가 없어서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연꽃



연꽃은 종근으로 심으면 잘 자란다

종근으로 심은 연꽃은 부모를 닮지만

연자로 심으면 어떤 놈이 나올지 알 수가 없다

백련을 심으면 백련이 나오고

홍련을 심으면 홍련이 나온다

하지만 백련 씨앗을 심어도 알 수 없고

홍련 씨앗을 심어도 어떤 놈이 나올지 알 수가 없다

연꽃의 아들 연자는 창조적인 시인이 확실하다

연자 자신도 어떤 꽃을  수 있을지 모른다

연자는 껍데기가 너무나 단단하다

게다가 너무나 철저한 방수복을 입었다

모든 생명은 일단 물을 먹어야 발아를 시작한다

연꽃의 생존전략은 오래 버티는데 일가견이 있다

몇 천년 후에 발아하는 연꽃의 씨앗도 있다

성질이 급한 나는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연자의 방수복에 구멍을 내어 물을 침투시킨다

그러면 며칠 만에 바로 잎부터 올라온다

연잎에 숨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숨구멍이 부표처럼 떠올라야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

사람의 숨골처럼 연잎의 숨골은 뿌리까지 뻗어있다

숨이 확보되면 비로소 뿌리도 내리고 줄기도 뻗는다

나의 시에도 언젠가는 사랑의 물이 들어와서

잎을 내고 뿌리를 내려 새로운 연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 사진에는 복숭아 씨앗의 두꺼운 껍데기가 분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양손을 합장하고 기도하듯 붙어 있었다. 화분에 옮겨 심는 과정에서 분리되었다. 아마도 뿌리와 잎이 충분히 자라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배젖에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는 듯, 또한 그런 배젖을 보호하기 위해서 단단한 껍질이 감싸고 있는 듯, 모성과 부성과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복숭아 씨앗의 발아과정과 연자의 발아과정을 지켜보면서 시의 발아도 저러지 않을까 홀로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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