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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Apr 15. 2024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순례 002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없었고 땅도 없었고

하느님도 없었고 말씀도 없었다

태초라는 말도 없었다


빛도 없고 어둠도 없는 허공에

아무도 모르는 씨앗 하나 날아왔다

그 작은 씨앗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


처음은 그렇게 하나로 시작되었다

하나의 껍질을 벗으니 둘이 되었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 넷이 되었다


어느 맑은 날 문득 하늘이 생겼다

하늘은 텅 빈 없음이니 없음이

자꾸만 무엇인가를 낳기 시작했다


먼지를 낳고

바람을 낳고

구름을 낳고

어둠을 낳고

별과 달과 지구를 낳고

뜨거운 태양을 낳았다


하나가 둘이 되면서 빛과 어둠이 생겼고

둘이 넷이 되어 동서남북을 낳아 길렀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나서 팔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처음의 세상은 너무나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세상에

구름은 물이 되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물과 흙은 생명을 낳았고

생명들은 물에서 흙으로

흙에서 허공으로 퍼졌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따뜻함을 중심으로 모였다

손에 손을 잡고 돌기 시작했다

따뜻함은 가득한 사랑이니

사랑은 사랑을 낳아 길렀다

세상은 그렇게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신들을 낳았다


공간이 만든 신들은 죽고

인간이 만든 돈이 빛났다

신들의 시대는 지나가고

인간의 시대도 지나가고

화폐의 시대도 지나가고

지구는 병이 깊이 들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거나

메타버스를 타고 가상공간으로

서둘러서 떠나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죽었고

스스로 신에 등극한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과 사람과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옹달샘의 숲이 되어 숲으로 살아간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_ (1940. 12. 윤동주 24세)






봄에는 모두가 손을 모은다



봄에는 모두가 손을 모은다

우리는 간절히 손을 모은다

너와 나 간절히 손을 모은다

떡잎도 꽃잎도 손을 모은다

몸과 마음이 함께 손 모은다

하늘도 손을 모으고

공기도 손을 모은다

손을 모으면

껍데기는 스스로 떨어진다

봄은 언제나 기도의 신이어서

모아진 손에서 봄이 피어난다



봄맞이꽃이 핀다. 꽃마리꽃도 핀다. 작은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을 생각한다. 지구를 생각한다. 지구 입장에서 생각하니, 인간은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기생충이다. 지구가 너무 아프다. 인간들 때문에 지구가 너무 아프다. 숙주인 지구의 뼈와 살과 피까지 통째로 먹어치우고, 골수까지 뽑아서 먹어치운다. 심지어는 동족인 인간들까지 먹어치우는 기생충이다.


숙주인 지구가 견딜 수 없으면 그런 인간들을 박멸하고 새로운 지구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화난 지구가 인간을 버리고 다른 종에게 젖을 물리기 시작하면 인간은 끝장이다. 지구의 기생충으로 계속 살고 싶다면 지구의 젖가슴을 더 이상 파먹지 말라. 어머니의 젖가슴에 사랑의 젖이 고이도록 조금만 더 기다리자. 아니, 끝까지 지구의 기생충으로만 살지 말고, 이번 기회에 지구와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들과 공생관계로 발전시켜 보자. 기생보다는 공생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에게는 우선 병원이 필요할 것이다.



병원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를 엮은 자필 시고는 모두 3부였다. 그 하나는 자신이 가졌고, 한 부는 이양하 선생께,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정병욱 후배에게 주었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전해진 시고는 바로 친구이자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주었던 바로 그 시고다. 하숙집을 같이 쓰기도 했던 정병욱은 이 시고를 목숨처럼 지켰다.


이 자선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쓴 「별 헤는 밤」은 1941년 11월 5일이다.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알 수 있듯이 「별 헤는 밤」을 완성한 다음에 윤동주 시인은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기를 계획했었다. 


책의 서문을 시로 쓴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한 다음 그 한 부를 정병욱에게 주면서 윤동주 시인은 말했다.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면서 설명해 주었다(‘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시」의 핵심 단어를 나열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서시」가 완성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病院(병원)’이라고 써넣어주었다고 정병욱은 말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이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정병욱은 말했다. 정병욱은 「잊지 못할 윤동주 형」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윤동주 시인은 1941년 11월 5일 「별 헤는 밤」을 쓰고 나서 스스로 19편의 시를 가려 뽑아 자선 시집을 출판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고 했다. 


윤동주 시인이 쓴 육필 원고를 보면 ‘病院(병원)’이라고 한자로 썼다가 지운 흔적이 보인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흑연 자리가 더욱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병원’으로 시집 이름을 짓고 싶었던 이유로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라고 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병원’은 시인 이상화가 썼던 밀실이나 동굴과 전혀 다른 공간이다. ‘아픈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연대의 공간이다.


윤동주 시인은 치열한 침묵과 반성의 기간을 거쳐 세 편의 시 「팔복」「위로」「병원」 이후에 「무서운 시간」(1941.2.7.)에 다가간다. 독립된 단독자로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 일시적 순간(발터 벤야민)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서시」「십자가」「별 헤는 밤」「또 다른 고향」등을 1941년에 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더 있다. 「투르게네프의 언덕」「소년」「산골물」을 쓴 1939년 9월부터 1940년 12월까지 윤동주 시인이 남긴 글은 없다. 이른바 ‘윤동주의 침묵 시기’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윤동주 시인의 내면과 외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글을 쓰지 않았을까.


침묵을 끝낸 1940년 12월 윤동주 시인의 시는 큰 변화를 보인다. 침묵 기간을 끝냈다는 신호탄은 「팔복」「위로」「병원」이었다. 「위로」「병원」은 같은 병원 공간에서 쓰인 것처럼 연장선에 있고 「팔복」 또한 크게 본다면 같은 슬픔을 노래한 듯하다. 이 세 편의 시들 중에서 윤동주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에 「병원」한 편만 포함 시켰으며 자신의 대표작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자, 그럼 여기서 「병원」을 살펴보자. 윤동주 시인은 「팔복」「위로」와 같이 다른 낱장에 초고를 먼저 쓰고 완성된 다음에 원고지에 옮겨 썼음을 알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글은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詩)』,『창』, 산문, 자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 습유시, 이렇게 다섯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습유(拾遺)란 빠진 글을 나중에 보충했다는 뜻이다. 「팔복」「위로」「병원」 모두 낱장 상태로 보관되어 온 습유시이다. 이 중에 「병원」은  자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에도 포함되어 있다.


나의 첫 시집 『땅의 뿌리 그 깊은 속』 자서(自序)도 병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젠가 이 시집은 복간할 예정이다. 윤동주 시인이 ‘병원’으로 시집 이름을 짓고 싶었던 이유로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라고 한 것이 눈에 자꾸 들어온다. ‘병원’은 시인 이상화가 썼던 밀실이나 동굴과 전혀 다른 공간이다. ‘아픈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연대의 공간이다.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이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윤동주 시인처럼 나도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쓴다. 아픈 몸은 의사가 치료를 하고 아픈 마음은 시인들이 치료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단 한 사람이라도 치료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자서(自序)



한 아이를 알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한 아이의 비밀을 알고 있다 한 아이의 아픔을 알고 있다 그는 나밖에 몰랐다 나 또한 그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어쩌면 나인지도 모른다 


그는 서럽도록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오직 그와 나밖에 몰랐다 그의 삶은 우리나라 현대사와도 같았다 그는 죽도록 사랑하는 일과 그리하여 매일 밤 유서를 쓰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할 줄 몰랐다 다른 일을 해보려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람에 쓰러질 때마다 유서를 쓰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살아 있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그는 편지와 유서를 썼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가야 할 길이라면 어디든지 가보고 싶었다 뛰어가고 싶었다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또다시 아무도 모르게 쓰러졌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쓴 유서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가족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어느 날 문득 가출을 결심했다 그와 나는 함께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꿈길까지라도, 저승길까지라도……,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리고 수 없이 많이 달아났다 우리들은 오늘도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는 또다시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벌한 평화 속에서 40년도 넘게 함께 살아왔다 아직도 그의 투병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잠든 사이에 나는 그의 투병일지 혹은 유서들을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 참으로 숨죽이는 순간이다 조심스럽게, 이 비밀들을, 속삭이고 싶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오늘도 유언처럼 발설하고 있다 이제 막 새로 태어난 길이, 빈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자서(自序)



한 아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울지 않았습니다. 한 아이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한 아이의 아픔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밖에 몰랐습니다. 나 또한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서럽도록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들풀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와 나밖에 몰랐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나라 현대사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죽도록 사랑하는 일과 그리하여 매일 밤 유서를 쓰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할 줄 몰랐습니다. 다른 일을 해보려고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쓰러질 때마다 유서를 쓰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살아 있기 위하여 그는 편지와 유서를 썼습니다. 또한 가야 할 길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어 했습니다. 뛰어가고 싶었습니다.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쓰러졌고 그럴 때마다 나는 곁에 있었습니다. 그가 쓴 유서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가출을 결심했습니다. 그와 나는 함께 멀리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꿈길까지라도, 저승길까지라도,…… 수없이 달아났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벌한 평화 속에서 2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그의 투병생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잠든 사이에 나는 그의 투병일지(?) 혹은 유서들을 훔쳐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참으로 숨죽이는 순간입니다. 조심스럽게 이 비밀들을 여러분들에게 속삭이고 싶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유언처럼 발설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태어난 길이 빈 마음으로 길을 걸어갑니다. 

  이 땅의 모든 ― 살아 있는 혹은 영혼으로 살아나는 ― 분들께 엎드려 인사 올립니다.


_1989년 여름 여수에서 배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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