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건강과 안전에 대해 높아진 관심이 소비 트렌드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위생에 관련된 용품 외에도 생활안전 용품이라든지 방범용품까지도 판매량이 늘었다고 한다. 그만큼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안전불감증도 문제인 만큼 자신의 건강과 안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추세는 안전에 좀 민감한 편인 자칭 ‘안전주의자’의 입장에서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내가 스스로 ‘안전주의자’라고 말하는 데는 몇 가지 예화가 있다.
대학 시절 전공이 화학이었던 난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전공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기에 실험은 설렁설렁하기 일쑤였는데, 누군가 화학약품을 떨어뜨려 깨뜨렸다거나 하면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제일 먼저 실험실을 튀어 나갔던 게 나다. 다 처리되었으니 들어오라고 할 때까진 밖에 있으면서 몸을 참 귀하게(?) 여겼다.
직장에서도 몇 번인가 시스템 오작동으로 화재 경보가 울렸던 적이 있다. 처음엔 사람들이 웅성거리다가도 사이렌이 금세 꺼지니 나중엔 잘못 울렸겠거니 하며 무시했다. 그때도 난 화재 경보가 울릴 때마다 냅다 밖으로 나왔더랬다. 화재 때 위험하다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몇 층이나 뛰어내려가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밖으로 나온 몇몇 사람들과 마주치면 "안전불감증이 문제에요, 문제." 하고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겁은 많으면서도 온갖 과학수사 드라마나 범죄 수사물을 즐겨 봐서 그런지 ‘수상한데?’, ‘의심스럽네.’ 싶은 것도 많은 편이다.
오래 전 우리 집에 좀도둑이 두어 번 든 적이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시간이라 다행이었지만, 집안에 흩어진 서랍 물건들과 바닥에 찍힌 발자국만 봐도 가슴이 벌렁대고 손이 덜덜 떨렸다. 경찰에 신고했더니 놀랍게도 과학수사대가 오는 게 아닌가! 농담 아니다. 진짜다. 그날 우리 지역에 파견 나왔던 과학수사대가 때마침 사건 신고를 받고 경찰과 함께 출동했던 거란다. 영화에서나 보던 과학수사대 요원들이 와서 007 가방을 열고 붓 등의 도구로 범인이 남겼을 수 있는 지문과 족적을 채취하는 모습이 어찌나 멋지던지. 도둑맞은 일은 머릿속에서 잠시 날아가고 배시시 웃으며 기념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수줍게 물었다. 엄마 아빠의 어이없어하는 눈빛을 뒤로한 채. 훗날 기사에서 봤는데, 그날 나와 함께 사진을 찍어 주신 여자 요원은 우리나라에서 정말 내로라하는 과학수사 요원이었다!
그래서 범인은 잡았냐고? 못 잡았다. 그날 하필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이어서 습기가 너무 많아 지문 채취가 어려웠단다. 몇 개 채취해 분석한 지문도 다 내 지문이었다나?
그 이후 도둑이 또 한 번 든 적이 있다. 잘사는 집도 아닌데 왜 자꾸 오는지, 참. 그때는 신고 후 단출하게 경찰 두 분이 오셨길래 과학수사대는 안 오냐고 물었더니 나이 지긋한 경찰 아저씨가 하시는 말씀.
"과학수사대요? 아가씨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무시무시한 큰 사건 사고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몇 번의 도난 사건을 겪으며 범죄 사건은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느꼈다. 그 후 문단속 등 안전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혼자 제주 한달살이를 하며 ‘안전’에 신경을 쓴 건 당연하다. 숙소는 외지지 않은 교통 좋은 곳에 정하고 코로나 시국에 맞게 각종 위생용품을 챙겼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니 안전할 것 같아 선택했던 레지던스 호텔은 개인이 호텔 방 몇 개를 분양받아 개별적으로 방을 빌려주는 숙소였다. 호텔 안에 있어 안전하면서도 펜션처럼 조리와 세탁도 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숙소 호스트가 미리 청소해 두었겠지만,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창문을 열고 청소기로 바닥부터 밀었다. 침대의 침구며 커튼, 테이블, 패브릭 의자 등 방 구석구석에 준비해 온 살균 스프레이를 뿌리고 손이 닿는 곳은 모두 싹싹 닦았다. 내가 집에서 이토록 열심히 청소했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누가 봤으면 세균 잡는 방역회사 직원인 줄 오해했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 다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몰래카메라 같은 수상한 물건은 없는지 숙소 곳곳을 살펴보았다. 아, 정말 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걸까? 그래도 안전을 기하는 게 나쁠 건 없으니.
그렇게 숙소 점검을 마치고 가벼운 맘으로 쉬는데 한 가지 걱정이 머리를 스쳤다. 이 방의 도어락은 카드키가 아니라 비밀번호로 문을 여는 것인데,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아도 되는 걸까? 게다가 안쪽에서 문을 이중으로 잠글 수 있는 수동 걸쇠도 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밖에서 비밀번호만 알면 바로 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숙소 호스트에게 비밀번호 바꾸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해야 하나? 너무 유난을 떤다고 하지 않을까?’
연락해야 하나 마나 고민하다가 결국 택한 방법은 자기 전 문 앞에 방 안의 가구 중에선 그나마 무거운 의자를 받쳐 두는 것이었다.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려면 이까짓 의자 하나가 무슨 큰 도움이 되겠냐만, 일종의 심리적인 1차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라고나 할까.
결론적으로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누군가 밖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온 적도, 다른 작은 사고도(바다를 보고 좋다고 뛰다가 넘어져 무릎이 피가 날 정도로 깨진 것 말고는) 없이 잘 지냈다.
머물면서 숙소 호스트에게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던 말은 감사 인사와 함께 숙소 후기에 남겼다. 문 안쪽에 걸쇠를 하나 설치해 주시면 혼자 투숙하는 여행객이 좀 더 안심하며 편히 묵을 수 있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