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다닌 후 대학교 동창들과 종종 만나고 있다.
웃길 수 있는 일이지만 대학교 시절 그 친구들과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긴 했다. 딱히 내 대학 생활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칠 에피소드가 없이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었다. 그러곤 직장을 다닌 후 서로 연락이 돼서 종종 저녁에 만나고 있다.
지금은 대등한 상대가 되었지만, 대학교 시절만 해도 친구들과 나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간격이 느껴졌다.
친구들이 놓은 벽도 아니었겠지만 내 마음속에 스스로 세워 둔 장벽이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나와 다르게 친구들은 도시에서 올라왔고 키도 훤칠 했으며, 무엇보다 선배들 혹은 이성들과 아무렇지 않게 유머를 하는 게 참 나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그에 비하면 소심했던 그때의 나는 그 학과 친구들과 썩 그렇게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가급적 행사를 참여하려고 했지만, 동기들과 가는 가는 MT는 알바 때문에 가지 못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동기들과의 추억보다는 함께 기숙했던 친구와 오히려 더 잘 어울렸던 것 같다. 함께 기숙했던 친구는 어쩐지 나와 결이 같다고 느꼈고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로 지내고 있다. 물론 나중에서야 그 친구도 압구정 토박이 출신인 걸 알게 되었다.
아무튼, 대학 생활 시절 동기들과의 추억이 아쉽게 사라진 느낌이었다.
과 행사를 참가하여도 이렇다 잘 어울리는 느낌이 아니었고, 친구들도 딱히 나에게 흥미를 느끼지는 않았었다. 어쩌면 내가 그때를 아쉬워하는 것은 동기들과 찐하게 추억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다행히 군대 덕분에 필자의 삶에 대한 생각은 확 바뀌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원하던 대학을 왔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라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목표가 대학이다 보니 막상 대학을 들어오니 어쩔 줄 몰랐다. 현실은 녹록치 못했는데, 입학 시절 빋은 장학금이 떨어지고 나니 주말마다 알바를 가야 했다. 그리고 그 아르바이트비로는 한 달을 살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런 내게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은 군대를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몇몇 지인들에게만 군대를 간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군대에서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훈련소에서의 화생방도 생각보다 강렬해서 놀랐지만 그것은 정말 약과였다. 막상 자대에 배치받고 나니 선임들의 얼토당토않은 기합과 잠을 잘 수 없었던 헌병 근무 생활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할 말은 많지만,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었다.
2년동안 혈기왕성한 남자들과 지지고 볶고 생활하면서 다행히 나는 엇나가지는 않았다. 사회와의 단절을 통해 머리가 맑아졌고, 고참들의 꼬장과 근무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간 독서도 많이 한 덕분에 부대 독서 우수자로 수상도 했고, 운동도 제법 많이 해서 체력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제대하고 나니 '나의 가정 형편', '나의 조건', '타인의 시선'에 대해 그렇게까지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중요한 건 본질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의 내 삶에 있어서의 '본질은 대학교를 어떻게든 잘 생존해서 졸업하는 것'이었다.
군대를 제대할 때 즈음에 부끄러워할 겨를 도 없이 한 사기업 학사에 장학생으로 신청했다.
감사하게도 장학생을 뽑혔고 그 후 대학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지금도 내 삶에 있어서 그곳에서 살게 된 게 크나큰 행운이라 생각하는데, 덕분에 월세를 내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2인 1실인 덕분에 여러 형과 동생들을 알게 된 것도 참 좋은 경험이었다.
그 후 아이스크림가게 아르바이트, 장애학생 도우미, 근로장학생, 과외를 일주일에 하루도 쉴 새 없이 하게 되었다.
남은 내 3년 대학생활은 사실 아르바이트가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직장을 다니는 지금이 워라밸 측면에서는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시간이 참 즐거웠다. 가끔 도서관에서 친구들이 인턴 생활을 하고, 금융공기업 준비를 하는 것이 부럽기도 했지만, 각자만의 삶의 소설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만의 삶을 그려가는 과정이니 그들을 쳐다보지 말고 나에게만 초점을 맞추자 생각했다.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려고 아등바등했던 나는 남들보다 밥도 빨리 먹고, 걸음걸이도 빠른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졸업할 무렵 해외 인턴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지원하였는데, 영어도 잘 못하고 별 스펙도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원을 했다.
그 이유는 내게 해외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꿈만 같던 일이었기에 한 번쯤 시도를 해보려고 했다. 어차피 안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보아도 갈 돈이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면 몰라도... 그리고 놀랍게도 기적은 일어났다. 다행히 필자는 장학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는 조건이어서 그동안 내가 벌어 놓은 돈과 합하여 겨우겨우 갈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 미국에서의 삶은 가난한 유학생의 생활을 떠올리면 되었다. 가방 속에는 늘 1달러짜리 빵을 칼로리를 채우기 위해 넣어 다녔다. 8개월간 미국에 살았지만 식당에서의 외식은 4번도 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마저도 2번은 미국인 친구가 사준 것이었다. 그럼에도 주머니는 가벼웠지만 러나 나의 발걸음은 무엇보다 가볍워서 미국이라는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한국에 귀국하여 잠시 취업 준비 기간을 가지고서 이제는 좋은 직장에 합격하여 다니고 있다.
어느 날 면접관이셨던 분과 식사할 자리가 생겼다. '왜 나를 뽑으셨냐'라고 장난스레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내 삶이 잡초 같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안 뽑을 수가 없었다'라고... 그 순간 내색할 수 없었지만 그 말이 내게 참 위안이 되었다. 내 나름대로 힘겨웠던 삶이 그래도 누군가는 이렇게 알아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고 계셔서 내 삶을 바라보고 계실 거라고 믿었고 그렇기에 순간순간 엇나가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내 삶의 궤적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때로 예전보다 내가 게을러진 건 아닌지 고민할 때도 있다.
지금은 돈도 더 많고 시간도 더 여유로워졌는데, 그때의 내 모습을 잊고서 남들과 비교하는 나를 볼 때면 반성이 많이 되곤 한다. 그리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나처럼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볼 때가 종종 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막노동일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본다. 어쩌면 나보다 더 조건이 안 좋을 수도 있을 텐데, 참 대견하다는 마음도 든다. 그러면서 내가 잘 살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진 것이 많지 않더라도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다 보면 좋은 기회, 삶을 그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