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인식한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 둘과 그리고 나였다.
삼촌들과 고모들이 계셨지만 다들 분가하고 살고 계셨고 둘째인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사셨다. 교과서에 보면 대가족과 핵가족이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친구들 대다수가 핵가족에 해당했지만 우리 집 만은 대가족에 해당했다.
서로 함께 살다 보니 다툴 일도 많았다. 가끔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다투시곤 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어떤 잔소리를 하시고, 아버지는 때로는 굉장히 서운해하셨다. 어린 나이에도 기억나던 게 있었다.
"아버지는 저 학교도 안 보내주셨잖아요."
사실 아버지는 초등학교까지 밖에 졸업하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시절이 1970~1980년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생존을 위해 살아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학교까지 가는 사람이 꽤 많았고, 남자 형제 중 아버지만 초등학교까지 가셨다.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셨다. 다 같이 안 보내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아버지만 보내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게 항상 마음에 응어리로 남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학교 가기 전 소를 줄 풀을 뜯고 가야 했다. 지금도 그게 징글징글하다고 하셨다. 당연히 집에 와도 공부를 할 시간도 없이 할아버지를 따라 논 밭으로 일하러 가는 게 일상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짓고 살게 되셨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 남매들에게 교육에 대해서 강조했다.
시골에서 살았던 것치곤 누나들은 어릴 적 영어 방문 과외도 받았었다. 한 번은 우리 남매가 영어 숙제를 하지 않아 무섭게 혼난 적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를 보내지 않겠다고 무섭게 하시기도 했다. 그때 우리 남매가 공부 열심히 하겠다며 울면서 빌었던 게 기억이 나는데, 개인적으론 학교를 못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장 무서움이 들이쳤던 순간이었다.
그 덕분인지 우리 남매들은 공부를 해야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각자의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필자가 살았던 시골에서 자란 친구들은 대체로 공장에서 생산직 일을 하거나 부모님을 따라 농사를 짓곤 했는데, 우리 남매들은 독특하게 각자의 전문적인 영역에서 종사하고 있다. 아버지가 엄하게 했던 협박(?)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하면 학교를 못 갈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을 테고, 내 나름대로는 아버지가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했던 입장도 많이 이해가 갔다. 나는 학교 가기 전 풀을 벨 필요도 없었고, 학교를 돌아와 농사를 지을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에 비해 공부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먹고살기 힘든 그 시절,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아끼고 아껴, 논이면 논, 산이면 산을 사들여서 재산을 일구셨다.
결국은 그렇게 알뜰살뜰 모은 터전에서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계셨다. 나중 일이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가자 누구보다 좋아하셨다. 대학교 신입생 생활을 한다고 시간을 보낸 탓에 그 시간 할아버지를 뵙지 못했던 게 너무나 후횐된다. 할아버지 그 해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는 정말 목 놓아 우셨는데, 내가 보기에는 어린아이가 우는 것처럼 우셨다. 그렇게 무섭고, 강인했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린아이의 우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은 내가 가끔 우리 아버지에게 서운한 것들을 쏟아내며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
혹시나 아버지가 천국으로 가시는 그날이 온다면, 내가 아버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들을 한 것들이 너무나 마음에 걸리고 아플 것 같다. 그래서 가급적 아버지에게 서운한 게 있더라도 조금은 참고 이해하려고 한다. 때때로 새어나오는 본심은 어쩔 수 없지만 가족끼리 서운한 게 없는 가족들이 있을까. 지금은 그 엄했던 아버지가 더 이상 무섭지 않는 그런 사이가 되어 버렸다. 내가 이렇게 잘 성장해주도록 그늘이 되어 주신 아버지. 그저 아버지를 자주 뵙고 좋은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