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국은 낯선 시간을 익숙하게 만들어 준다
꿀맛 같은 황금연휴를 보내고 일상으로 복귀한 첫날, 월말에다 연휴 동안 밀려있던 업무를 쳐내며 정신없는 오전을 보냈다. 점심 달리기를 할까 고민하다 알레 작가님의 카페라이팅이 생각나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 연휴 동안의 일을 회상했다.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소소한 일까지 생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 세계적으로 양력을 주로 사용하기에 음력설을 지내는 민족이 드물기도 하지만 대대로 한민족은 음력설을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외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사람도 발음하기도 어려운 '섣달그믐'이람 말도 설날에서 나왔다. 섣달그믐은 음력 12월 마지막 날을 일컫는 말인데 지금은 도전 골든벨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나올 법한 단어로 나와 내 주변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설'이란 말도 한 해의 간지가 끝나고 새로운 간지가 시작되는 날이자 '설다', '낯설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만 보아도 예전에도 새로운 시작은 조상님께도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때는 양력설을 신정,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이는 일본의 화력을 양력으로 바꿀 때 음력설을 구정이라 부는 것에서 나왔다. 하지만 대대로 우리 민족의 설은 음력 1월 1일이다.
삼국유사에 신라에서도 음력설을 쇠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뜻깊은 날이다. 한 해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흰 눈이 쌓여 온통 하얀 겨울 왕국이 된 풍경 속에서 새로운 발걸음으로 한 획을 긋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작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에 낯설고 두렵기도 하지만 늘 희망찬 미래에 대한 기대로 하늘을 날 것처럼 들뜬 기분이 든다.
황금연휴라고 불릴 만큼 긴 시간을 쉬면서 가족들과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떡국'이다. 언제부터 떡국을 먹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설날 풍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라 생각한다. 하얀 자태의 떡이 설날의 풍경을 대변해 주며 지금은 대각선으로 자르지만 내가 어릴 적 시골에서는 원형의 떡으로 만든 떡국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둥근 원의 형태는 새 시작을 알리는 새해 일출처럼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설날에만 떡국을 먹은 것은 아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부산 동래에는 개성지역에서 주로 먹는 '조롱이떡'으로 만든 떡국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조랭이떡'으로 불리는 이 떡은 오동통한 모습에 식감도 좋아 근처를 방문할 때마다 일부러 찾아가던 나만의 맛집이었다. 실제 사장님도 고향이 개성인 실향민으로 내가 방문했을 때도 연세가 많으셨는데 조롱이떡국이 생각나 찾아갔지만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세월의 흐름 속에 고향을 그리워하시다 하늘나라로 가신 것 같다.
신기한 자태의 떡은 조롱이떡만 아니다. 본가에 가니 어머니께서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별모양의 떡국을 준비해 놓으셨다. 흰색인 보통의 떡과는 달리 형형색색의 별모양 떡국을 보고 아이는 한 그릇 더 먹는 식성을 발휘했고, 맛있게 잘 먹는 아이를 보면서 온 가족이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고 복스럽게 먹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좋게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의 먹성 덕분에 분위기가 좋았는데 아이는 이런 분위기가 본인 노력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한 그릇 더 먹어서 한 살이 아닌 두 살이 더 먹었다는 말을 했다. 가족들 모두 함박웃음을 짓게 만든 아이의 말을 들으며 지금까지 먹은 떡국의 그릇 수를 생각해 보았다. 새해가 되면 자연스럽게 한 살 더 나이가 드는 것을 먹은 떡국 그릇 수로 나이를 더 먹을 수 있다면 나는 이미 백 살이 넘었을 것이다.
'낯설다'에서 유래한 설날의 최고 음식은 떡국은 이런 유머를 만들며 낯선 시간을 유쾌하고 익숙한 시간으로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떡국을 나눠 먹으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첫날의 식탁은 단출하지만 겨울의 풍경과 하얀 세상을 밝게 비추는 태양을 상징하는 떡의 자태를 통해 어디에 있던,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빛나기를 바라는 염원이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 떡국을 먹으며 나도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흰 눈처럼 순백의 미를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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