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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에서 인싸가 되기까지

by 교실남
선생님, 애가 약간 미열이 있고 몸도 좀 안 좋아서 오늘 하루 쉴게요.


그날도 어김없이 석진이 어머니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3월 개학한 지 한 달 반이 지났는데 석진이는 벌써 10번 넘게 결석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은 아파서 학교에 등교하지 못한다는 문자를 받은 것입니다. 항상 레퍼토리는 비슷했습니다.

선생님, 오늘 애가 열이 있어서 좀 쉴게요.
선생님, 애가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좀 쉴게요.
선생님, 석진이가 물만 마셔도 토를 하네요. 병원 갔다가 하루 쉴게요.


한창 코로나가 재유행할 시기라 처음에는 ‘진짜 아픈 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석이 반복되고, 다음날 등교했을 때 너무나도 멀쩡한 석진이의 모습을 보고 학교를 안 나오는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날 석진이 어머니께 바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석진이 어머니, 혹시 석진이가 학교에 안 나오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아... 선생님, 죄송해요... 석진이가 학교 가는 걸 너무 힘들어해서... 사실은 저희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학교에 전학을 왔는데 덩치도 왜소하고 워낙 숫기도 없고 해서 그런지 2년 동안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거든요. 그때 그 경험 때문에 아직도 학교 생활을 무서워해요. 학교 가기 무서워서 밤에 잠도 못 자고 아침에는 학교 못 가겠다고 울고... 지금도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해서 병원에서 소아우울증 상담도 계속 받고 있어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그제야 석진이가 그동안 왜 결석을 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 그랬구나... 혹시 그럼 4, 5학년 때는 어떻게 지냈을까요?”


“그때도 지금처럼 애가 너무 힘들어하면 학교에 안 보냈어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반 친구들이랑 친해질 기회도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워낙 애가 숫기가 없어서... 한 번은 저한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엄마, 나는 이 세상에서 주인공이 아닌 것 같아. 학교에서도 나는 그냥 조연이야. 그냥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야.’ (눈물) 하... 선생님, 저희 석진이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은 그냥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라고 엄마에게 말하는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 순간 결심했습니다. 적어도 저희 반 안에서만큼은 이 아이가 주인공이 될 수 있게끔 도와주겠다고요.


1(출처 freepik).jpg


다음날부터 ‘석진이 인싸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석진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그동안 석진이는 친한 친구가 거의 없었다고 했습니다. ‘몇몇 착하고 괜찮은 아이들에게 석진이와 좀 친하게 지내면 안 될까?’ 부탁을 해 볼 생각도 했지만, 잘못했다간 오히려 아이들에게 반감만 살 것 같아 그 방법은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안 그래도 학교에 오기 싫어하는 아이인데, 선생님인 제가 과하게 나서면 아이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제가 관여하는 대신 석진이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환경설정을 석진이 모르게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일명 이미지 메이킹 작전!


우선 석진이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석진이의 외모는 꽤 준수한 귀염상이었습니다. 뭔가 주눅이 들어있는 듯한 표정만 없애면, 꽤 반 아이들이 호감을 가질만한 외모였습니다. 본인이 콤플렉스라고 생각하는 왜소한 덩치 또한 잘만 하면 매력 포인트로 만들 수 있을 듯했습니다.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는 국어 시간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전날 반 대부분의 아이들이 일기를 엉망으로 써와서,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피드백을 해줬는데 석진이는 제 피드백을 전부 반영해서 다음날 일기를 써왔습니다. 반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말이죠.


2(출처 교실남).jpg


“석진아, 네가 글을 너무 잘 써와서 그런데 네 글 애들한테 소개해도 될까?”


“(부끄러운 듯) 네...”


“얘들아, 석진이가 쓴 글 들어봐. 잘 썼지? 더 놀라운 거는 이전에 쓴 글이 정말 엉망이었는데, 이게 하루 만에 글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거야. 이러기 정말 쉽지 않거든.”


“(아이들의 탄성) 우와...”


(뿌듯해하는 석진이의 얼굴)


그날 이후부터 석진이는 일기를 더욱더 열심히 써왔고, 저는 그때마다 적절한 타이밍에 아이들 앞에서 석진이를 칭찬했습니다. 석진이의 첫 번째 장점인 귀여움과 함께요.


“석진이는 글도 잘 쓰고, 얼굴도 귀엽고. 와... 얘들아 봐봐. 석진이 너무 귀엽지 않니? (웃음)”


“우우우우우우!!!!! 쌤, 저게 뭐가 귀여워요.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부끄러워하는 석진)


처음 아이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으나,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복의 힘으로 개그가 살아나듯이, 석진이의 귀여움을 틈이 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어필했습니다.

“와... 오늘도 석진이 귀엽네?”

“얘들아, 진짜 석진이 귀엽지 않니?”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언제부턴가 계속 부끄러워하던 석진이도 능글능글하게 귀여운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으악!!! 석진이 저 표정이랑 포즈 봐봐. 저거 뭐야! 우웩!”


이 순간 직감했습니다. 이 아이는 그동안 재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 뿐, 유머 감각도 꽤 있는 인싸의 자질이 있는 아이라는 것을요.


며칠 뒤, 남자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단체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이~~~~ 이~~~~ 이~~~~”


“얘들아, 이거 무슨 소리야?”


“아, 이거 석진이가 만든 유행어예요. 선생님도 해보세요. 엄청 중독성 있어요. 이~~~~”


이 시기의 남자아이들은 무리 짓는 것을 좋아하고, 단체로 이상한 소리 내는 것을 즐겨합니다. 석진이는 그 부분을 캐치해서 유행어를 만든 거고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집에서 유행어를 맛깔나게 외치는 연습을 했을 석진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 석진이는 또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었습니다.

“쑤! 쑤! 쑤!”


남자아이들은 신나서 하루 종일 ‘쑤!’를 외쳤습니다.

“선생님, 석진이가 만든 유행어 너무 중독성 있어요! 너무 재미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쉬는 시간에 너무 시끄럽다는 여자아이들의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음... 선생님이 조금만 더 지켜보고 남자애들한테 얘기할게.”


아직은 멈출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의 휴식을 방해할 수 있으니 당장 그만두게 하는 것이 맞으나, 이제 막 또래 집단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석진이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석진이가 좀 더 무리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며칠 더 기다려줬습니다.


며칠 뒤, 유행어를 금지시켰습니다. 제발 한 번만 소리 내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남자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석진이의 표정이 보였습니다. 이미지 메이킹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이미 반에서 석진이는 글 잘 쓰는 아이, 귀여운 아이, 재미있는 아이로 통했습니다.


3(출처 교실남).jpg 수학여행 때, 반 대표로 친구들과 장기자랑을 하는 석진이


그 이후로 석진이가 학교를 빠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학교는 더 이상 무서운 곳이 아닌 친한 친구들이 있는 즐거운 곳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석진이 어머니도 석진이의 이러한 변화를 눈치채셨는지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선생님, 석진이가 6학년 돼서 많이 달라졌어요.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친구들이랑 놀면서 성격도 엄청 밝아지고. 작년에 비하면 아픈 것도 많이 줄었어요. 이제는 학교 가는 걸 너무 좋아해요. 애가 선생님도 너무 좋아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4(출처 교실남).jpg 서클 하는 모습


2학기 말이 되었습니다. 졸업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둥글게 모여 앉아 서클 활동을 했습니다.


“너희들 1학기 때에 비해서 2학기 때 진짜 많이 바뀐 거 알아?”


“엥? 별로 없는 거 같은데요. 잘 모르겠어요. 뭐가 바뀌었어요? 쌤~~~ 말해주세요!”


“봐봐. 민수는 학기 초에 기분 나쁘면 교실까지 탈출할 정도였는데 (아이들 웃음) 지금은 봐봐. 웬만한 일에는 흥분도 하지 않고 엄청 차분하잖아. 수업시간에 발표도 열심히 하고. 감정 컨트롤하는 능력이 엄청 좋아졌어.”

“그러고 보니깐 맞네요. 민수 진짜 많이 바뀌었네요!”


(뿌듯해하는 민수 표정)


민수를 시작으로 한 명, 한 명씩 그동안 변화한 것들을 아이들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이제 석진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래, 석진이는...”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순간 학기 초에 들었던 ‘엄마, 나는 이 세상에서 주인공이 아닌 것 같아.’라는 석진이의 말과 그동안 석진이가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애쓴 모습들, 현재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모습들이 겹쳐 보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순간 석진이 또한 저를 보고 울었습니다. 왜 선생님이 우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이죠. 그동안 제가 뒤에서 조용하게 도와줬다는 것을 석진이는 아는 듯했습니다.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석진이에게 말했습니다.

“석진아, 이제 너는 주인공이야.”



혹시 여러분들도 석진이처럼 자신이 이 세상의 조연이라고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요즘 제가 꽂힌 문장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인생은 놀이터다.'입니다. 우리들 각자 스스로의 놀이터(=인생)에서 여러 놀이 기구(=경험)를 타며 인생을 즐기자는 말이죠. 우리들은 각자 놀이터의 주인공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석진이처럼 놀이터의 주인공으로서 여러 놀이기구를 타며 당당히 여러분의 인생을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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