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말, ‘이번에는 어떤 아이들과 함께 1년을 보내게 될까?’ 설레는 마음으로 6학년 새 학기 학생 명단을 확인했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김민하’라는 학생이었습니다. 이전 담임 선생님이 특이사항란에 ‘학습 부진. 수업 태도 좋지 않음.’이라고 무려 별표를 2번이나 쳐놓으셨습니다.
일단 선입견을 갖지 않고 당분간은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2주간 지켜본 결과, 민하는 특이사항에 쓰여 있는 대로 수업태도가 좋지 않았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항상 멍을 때리기 일쑤였고, 수업 참여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수학 단원평가를 쳤는데 30점이라는 점수가 나왔습니다. 반 평균 점수가 80점이 넘는데 말이죠. 수학 점수가 낮게 나와도 이미 익숙한 듯 민하는 실망 하거나 아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듯했습니다.
“안 되겠다. 민하야, 앞으로 방과 후에 선생님이랑 같이 수학공부하자!”
수학 기본기가 워낙 안 되어 있어서, 민하는 일대일 지도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민하에게 방과 후에 같이 공부하는 걸 제안했습니다. 민하의 대답이 가관이었습니다.
“또요? 작년에도 담임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했단 말이에요. 매일매일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는 거 진짜 끔찍했어요. 힘들기만 하고 실력은 하나도 안 늘었어요. 그래서 작년 담임선생님은 저 포기했어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민하의 마음은 닫혀있었습니다. 분명 머리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학습에 대한 의욕이 없으니 일대일로 지도를 해도 도저히 실력이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작년 담임 선생님을 한 번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민하요? 음... 선생님으로서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포기했어요. 작년에 방과 후에 남겨서 일대일 지도도 하고 상담도 하고 신경을 정말 많이 썼는데, 애가 스스로 바뀌려는 노력 자체가 전혀 없더라고요. 부모님한테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도움을 요청해도 그냥 괜찮다고만 하시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어요.”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이번에는 민하와 심층적으로 상담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왠지 민하와 라포(=친밀감)를 쌓아가며 대화를 하면 해답의 실마리가 보일 것 같았습니다.
“민하야, 요새 학교 생활은 어때?”
“음... 그냥 그래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작년에는 어땠어?”
“진짜 싫었어요. 담임 선생님도 싫고, 애들도 싫었어요.”
“어떤 점이 싫었는데?”
“일단 선생님이 교실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애들끼리 대화를 거의 못 하게 했어요. 사실 작년에 친했던 친구가 하나도 없어요. 학교 진짜 노잼이었어요. 맨날 남아서 수학 공부만 시키고. 지옥이었어요.”
“아... 작년에 민하가 친구가 없어서 힘들었구나. 선생님이 그것도 모르고 또 남겨서 수학 공부 시키려고 해서 미안하네. 민하가 학교 생활이 재미있을 수 있게 선생님도 한 번 방법을 찾아볼게.”
제가 봤을 때, 민하에게 얼른 친구를 만들어주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학교에 친구가 없어 외로운데, 공부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습니다. 더군다나 한창 친구관계에 민감한 6학년인데 말이죠. 레이더망을 가동해서 민하와 성향이 맞으면서 민하의 공부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물색했습니다.
민하는 공부를 제외하고는 꽤 매력적인 친구였습니다. 귀엽고 엉뚱한 면이 있어, 또래 여자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해서, 가끔씩 수업시간에 빵빵 친구들의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민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꽤 있었습니다. 제가 중간에서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만 잘 마련해 주면 나머지는 민하가 잘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혹시 민하 수학 도우미 할 친구 있을까요? 민하 단원평가 점수 20점 이상 올려주면 200구이 보너스로 줄게요!”
당시 저희 반에는 직업과 경제활동 제도가 있었습니다. 학급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한 만큼 ‘구이(=구두쇠 이모의 줄임말)’라는 화폐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요. ‘구이’는 자리 바꾸기, 숙제 면제, 급식 먼저 먹기, 과자구입 등 여러 곳에 쓸 수가 있습니다. 수학 도우미도 직업의 일종으로 구이를 많이 벌 수 있는 꽤 꿀직업 중에 하나였습니다.
“저요! 저요!”
역시나 민하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던 6~7명 정도의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중에서 민하와 가장 성격이 맞을 것 같은 민경이를 수학 도우미로 뽑았습니다.
민경이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우리 반의 최고 모범생이었습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은 운동,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멋진 학생이었죠. 배려심이 깊어 친구 관계도 매우 좋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둘이 친해지면, 서로 좋은 영향을 많이 주고받을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민경이는 성실하게 쉬는 시간마다 민하의 수학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민경이와 친한 다른 친구들도 와서 민하의 수학 공부를 도왔고,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번 단원평가 시험 점수를 공개하겠습니다. 김민하 70점!”
“와아아아아!!!!!”
무려 40점이나 점수가 수직상승 했습니다. 오히려 민하보다 민경이와 다른 친구들이 민하의 점수에 흥분했습니다.
“민하야, 이제 100점 한 번 가보자! 우리가 도와줄게!”
“(쑥스러워하며) 나 100점은 무리인데... 그래도 한 번 해보지 뭐.”
어느 순간부터 민하는 자연스럽게 친구들에게 동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발표를 하기 시작했고, 모둠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국어 토론 시간에는 베스트 토론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학기 때부터는 더 이상 수학 도우미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민하의 수학실력이 향상되었습니다. 한 번은 단원평가에서 100점을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마치 제 일처럼 민하의 성적향상을 축하해 줬습니다.
“민하야, 요새는 학교 생활 어때?”
“요즘요? 너무 좋은데요? 행복해요.”
“1학기 초반이랑 비교해서 어때?”
“그때는 친한 친구도 없고 너무 어색해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친구들도 많고 수업도 재미있고 모든 게 다 좋아요.”
민하의 해맑은 웃음을 보니, 절로 마음이 뿌듯해졌습니다.
친구가 없어 학교는 순전히 시간을 때우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민하는 친구가 생기면서 학교는 즐거운 공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공부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친한 친구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친구들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민하의 사례를 겪으면서, 담임 선생님이 직접 나서서 아이를 가르치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좋지만, 친구관계나 반 분위기를 통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설정을 해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목표를 세우거나 동기부여를 받았을 때, 대부분 처음에는 엄청난 열정을 불태우죠. 하지만 그 열정도 언젠가는 식기 마련입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꼭 필요한 것이 환경설정입니다. 잘 설정된 환경은 가끔씩 내 의지가 꺾이더라도 내가 원하는 목표로 가게끔 도와줄 수 있습니다. 민하가 가끔씩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도, 옆에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친한 친구들을 보고 힘듦을 참고 공부를 한 것처럼요.
오늘부터 건강, 자기 계발, 인간관계 등 나 자신을 위한 환경설정을 하나씩 해보시는 건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