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이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시리고 춥다, 는 것을 알게 되었어도 한번에 돌아설 수 없다.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 장손이 태어났다는 기쁨에 들뜬 그의 아버지가 에어컨을 하사하시고(아니, 그럼 임신때 더위는 어떻게 난 거지?) 애를 낳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누워있는 며느리에게 "어머, 이 일인실 너무 좋다, 우리 다 자고 가자~"며 외투를 벗는 그 어머니를 말리지 못하는 남편을 맥없이 지켜보는 것으로 인생2막이 열렸다.
누가 그러던데. 여자의 인생은 결혼이 아니라 출산으로 갈린다고.
아기를 낳고 모유수유와의 사투(유축할 때마다 느끼는 젖소가 된 기분)니 젖몸살, 수면부족, 피로 충만, 등등을 지나면서 모성애 같은 건 타고 나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백일잔치를 25명의 친척들을 집에 모시고 하라는 시어머니의 요구대로 임했다가 음식이 그게 뭐냐는 지청구를 들은 일이나 아들의 돌잔치 후 집에 돌아가는 친정부모에게 시아버지가 던진 "잘해줘봤자 소용도 없는 외손자 챙기느라 고생하셨십니다" 라는 말이나 어쩌면 계속해서 가슴에 박히는 일들만 생겨나는지.
참 이상도 하지. 시댁 식구들에게 들은 말은 그 어느 말보다 날카롭고 뾰족하게 파고들었고
오래도록 잊히지도 않았다.
남편과 연애중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 집안 사람들은 '까는 유머'에 특화되어 있었다.
사귀자고 말하던 날, 그윽한 목소리로 "너 참 발볼 넓다~"고 남편이 말할 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아이 낳고 두달도 안 지난 내게 "넌 그렇게 힘들다면서 왜 살이 안 빠지냐~"고 하는 그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옆에서 히히 웃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후 딸이 태어나면서 한층 심화된 독박육아로 우울의 늪에 빠지는 데에는 그 말들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아, 죽을 만큼 힘든데, 더 죽어라 죽어라 하는 건 너무 하잖아~라고 생각한 건 나중의 일이고,
그때는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초라하고 못생기고 뚱뚱한 아줌마로만 보였다.
그런데도 시간은 흘렀고, 나이는 들었고, 나는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심장이 두근대는 공황장애가 생겼다.
둘째가 생후 두달 되었을때 부서를 옮긴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가 오로지 그의 변명이었다.
집에 언제쯤 들어올지, 자정이 되기전에 전화 한통만 해달라는 요청을 그는 들어주지 않았고,
대신 그의 어머니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걸어 하소연과 트집, 간섭, 잔소리를 쏟아내는데 견딜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오기 일쑤인 남편이 어쩌다 자정전에 들어오거나, 가끔 쉬는 일요일에 정말 이렇게는 못살겠다, 제발, 조금만 도와줘, 라고 눈물흘리는 내게,
"너는 왜 그렇게 너한테 자신이 없니. 진짜 원망스럽다, 장모님이. 너를 이렇게 만드신 게.
그냥, 좀, 좋은 척, 괜찮은 척, 하면 안되는 거니"라고 말하고는 코를 골며 잠든 남편을 바라볼 때가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때였다.
그 후 남편이 출장을 떠나고 혼자 애 둘을 돌보던 나는 또다시 임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증조부 제사를 앞두고 큰집으로 불려간 날이었고,
다짜고짜 무릎을 꿇으라고 했다.
손이 아픈 큰어머니 대신, 손이 귀한 큰집며느리 대신, 집에서 '놀고 먹는' 작은 집 며느리가 와서 전날부터 제사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앞으로는 전날에 아침 일찍 와서 제사 준비를 할 것이며 방긋방긋 웃으며 어른들을 섬기라는 것이었고, 두시간여 그렇게 앉아 있던 나는 며칠 후 유산을 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말을 꺼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얘기를 듣는 그가 조금은 날 위해 슬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때 그가 말했다.
"위장이혼이라도 할까? 그냥 있으면 어른들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혼하고 같이 사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