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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오리 May 19. 2024

위험을 감수할 자유

감금 돌봄, 비감금 돌봄


오늘 공원에서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기온이 오르니 ‘집순이’ 하양이조차 보금자리를 비워두고 사라졌다. 공원을 몇 바퀴를 돌고, 구석구석 다니며 이름을 불렀다.


잉. 정말 오늘 아무도 없는 거냐.


한 시간 반 동안 결국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아쉽게 공원을 떠났다. 사실 밥과 물만 급식소에 채워두면 되기에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된다. 다섯 장소에 물과 사료를 채우는 건 빨리 하면 15분이면 가능하다. 그럼에도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어두운 곳을 다니며 고양이 이름을 부르는 건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대부분의 돌보미들이 그렇듯.



돌봄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2년이 될까 말 까다. 하지만 이 구역에서 자취를 감춘 고양이는 벌써 세명이다. 비인간동물은 도시에서 인간에 의해 흔하게 죽는다. 다양한 방식으로.


종종 고양이들이 단체로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그들만의 모임이라도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처음 고양이들이 보이지 않았을 때는 온갖 걱정이 되었다. 나는 ‘감금 돌봄’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13년을 함께 산 별이는 늘 우리 가족의 감금 하에 살았다. 당시에는 ‘오프리쉬’라는 개념도 없어서 종종 밖에서 줄 없이 지구를 활보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늘 줄에 결박된 채 외출해야 했다. 감금 돌봄이 당연한 나에게 감금할 수 없는 존재를 돌본다는 것은 심정적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보호’ 해야 하는 존재는 나의 시야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생추어리 돌봄을 시작하고, 언젠가 동료들과 함께 읽은 글에서 ‘위험을 감수할 자유’라는 문장에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문장은 내가 동물권을 처음 접했을 때만큼이나 나에게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우리가 돌보는 비인간에게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생추어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떤 울타리보다도 강력해야 하고, 외부인으로부터 차단되어야 한다. 새벽이와 잔디는 감금 돌봄을 받는 존재다. 돌봄을 하러 가서는 새벽이나 잔디가 어디 있는지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그들을 만나지 못하는 일은 절대 없다. 그들은 돌보는 이의 시선에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그믐달 땅에서 잔디가 산책을 시작한 후로 이것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 산책을 다니는 동안 잔디는 일시적으로 비감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원하는 풀을 뜯기 위해 돌진하고, 인간은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기 바쁘다. ‘안전’의 측면에서 보면 이건 분명 문제적일 것이다. 잔디가 돌아다니다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될 수도 있고, 울퉁불퉁한 지형에 넘어져 다칠 수도 있다. 하지만 잔디의 생동감 넘치는 몸짓을 보면 그걸 막을 수 없다. 그는 나처럼, 동료들처럼,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을 테니까.



우리는 새벽이와 잔디를 동물권 활동가라 부른다. 산책을 나가고 싶다고 현장 활동가에게 소리치는 잔디는 산책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외치는 활동가다. 나는 잔디에게 조금이나마 허용된 ‘위험을 감수할 자유’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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