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 별이가 우리 집에 왔다. 이모네 개가 낳은 아기 중 한 명이었다. 어릴 적부터 개를 무서워했던 나는 생후 2개월 된 작은 별이가 무서워 일주일은 거리를 두곤 했다. 시간이 지나 별이는 나에게 더는 무섭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별이와 종종 산책을 나갈 때, 나는 줄을 풀어 두기도 했다. 당시엔 개가 교통사고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하다면 그것은 용인이 되었다.
별이가 떠나고 시간이 지나, 오프리쉬(Off Leash)라는 말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개를 묶어서 ‘완전하게’ 통제하는 것이 같은 인간 종에 대한 ‘매너’를 넘어 ‘의무’가 되었다.
법이 생겼다. 1차 위반 20만 원. 2차 위반 30만 원. 3차 위반 50만 원.
통제가 쉽지 않은, ’맹견‘의 이미지를 가진 개들은 입마개라는 통제 수단이 또 다른 ‘매너’가 되었다.
그렇게 모든 개들은 인간 보호자의 통제 아래에서 묶여 있는 것이 디폴트가 되었다. 길 위에 개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유리한 일이었다. 인권이라는 말로 인간사회에서 보호를 받는 인간은 사실은 지구 생태계에서 누군가의 피식자에 불과했다. 발 플럼우드의 이야기처럼, 강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존재 앞에서 인간은 고깃덩어리고, 누군가의 ‘먹이’다.
인간을 해치거나, 먹을 수 있는 모든 포식자가 한국 땅에서 박멸된 이래, 우리는 그런 당연한 생태계의 순리를 무시한 채 살고 있다. 교통사고는 당할 수 있지만, 동물에게 죽임 당하는 일은 가능성이 배제되었다.
인간을 해치는 비인간은 강력한 처벌을 받게 된다. ‘개물림’ 사고를 대하는 대중들의 격양된 반응. ’사람을 문 개‘는 과거 박멸되었던 이 땅의 포식자들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해수구제사업(害獸驅除事業)
: 해수구제사업은 근대 이후 맹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일환이었다. 해수구제의 움직임이 본격화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호랑이와 표범은 물론이고 조류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각종 동물을 해로운 짐승으로 보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수구제를 시행하였다. _국립민속박물관
‘마당개’인 숯댕이 산책을 마치고, 그를 다시 묶어두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포식자가 아니라, ’인간 보호자의 통제 아래에서 순응하며 사는 착한 개‘여야만 숯댕이는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다.
어느 날부터 그를 찾아오기 시작한 하얀색의 들개(앵두)는 그렇지 않았다. 앵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그가 원할 때 숯댕이에게 찾아와 그와 어울렸다. 앵두를 두 번째 만난 날, 나는 그를 잡기 위해 ‘들개 포획틀’이 설치된 것을 발견했다.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들개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앵두가 살려면 숯댕이처럼 묶여서, 순응해야 한다. 앵두는 생존권을 얻으려면 이동권을 포기해야 한다.
이 땅에 포식자가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 호랑이가, 늑대가, 들개가 세상을 누볐으면 좋겠다.
인간을 물고 해치는 존재로부터 숨어도 보고, 피해고 보고, 물려도 보고, 우리의 이동권을 제한당해도 보고,
결국엔 물려 죽어 다른 비인간의 ‘먹이’가 되는 것.
그게 인간다운 삶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