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현지 조련사와 악어들이 함께하는 즐거운 공연“
악어쇼가 시작되기 전, (태국어로 추정되는) 노래가 나왔다. 악어들은 무기력하게 멈춰 있었다. 악어쇼가 어떤 것인지 몰랐던 나는 그저 돌고래, 물개쇼 정도를 상상했다. 인간 조련사와 강제적이지만 어떤 신호를 주고받는 쇼.
잠시 후, 태국인이 쇼 복장을 입고 나타났다. 촬영은 금지되었다. 나는 그게 왜 금지됐는지 알 것 같았다. 무기력한 악어들이 조련사의 신호를 따라 움직일 것을 예상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달랐다. 조련사는 멈춰 있는 악어에게 다가가 그의 꼬리를 잡고 질질 끌기 시작했다.
악어는 그냥 그가 끌고 다니는 대로 끌려다녔고 사람들은 인간이 악어를 맘대로 만진다는 그 자체에 환호하는 것 같았다. 조련사는 악어의 몸을 조롱했다. 입을 벌려 놓고 손도 넣고 머리도 넣었다. 혓바닥을 들춰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도 조롱받았다. 거기서 그는 ‘태국인’으로 악어와 함께 전시되었다. 그 노동자의 역할은 조롱을 받는 역할이었다. 한국인 직원은 마이크를 잡고 쇼의 설명을 하며 전시되는 존재들과 구분되었다. 악어는 쇼 내내 조련사와 함께 웃긴 존재로 소비되었다. 이 악어쇼는 어린이에게 혐오를 가르쳐주는 쇼였다. 한국인 직원은 쇼 내내 박수를 유도했다.
악어쇼 입구 앞에는 가짜 악어에 한복이 입혀져 있었다. ‘악어 생태’를 관람하고 나온 어린이들에게 악어는 포식자가 아닌 그저 웃기고 만만한 동물로 기억될 것이다. 날카로운 이가 있어도 인간을 물지 않는(못하는) 동물, 인간이 질질 끌고 다니며 조롱해도 되는 몸.
포식자인 악어를 바닥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인간은 더 큰 쾌락을 맛보았다. 징그러운 장면이었다. 그 가짜 악어의 등에는 어린이가 올라타 사진을 찍었다.
어떤 공간은 마치 비어 있는 감옥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동물은 관람객이 자신을 구경하기 힘든 사각지대에 꽁꽁 몸을 숨겼다. 맹수관에는 맹수들이 있었다. 적어도 이곳의 동물들은 창살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쬘 수는 있었다. 벵골호랑이와 백호랑이가 함께 갇혀 있었다. 백호랑이는 딱딱한 바닥을 초조하게 맴돌 뿐이었다.
어린이들은 손에 맹수들에게 줄 ‘먹이’를 들고 돌아다녔다. 손에 쥔 먹이를 누구에게 선사할까 신나는 고민을 하며.
처음 봤을 땐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재규어들은 한참 후 다시 갔을 때, 초조하게 정형행동을 하고 있었다. 빙빙 도는 그들의 몸짓은 관람객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반달가슴곰은 몸을 세워 고개를 흔들어댔다. 동물의 고통은 유희가 되었다.
이곳은 동물학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곳곳에는 동물이 케어받고 있다는 ‘증거’가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생물 행동 풍부화 관련 자료들이 벽에 부착되어 있었고 ‘호기심과 흥미유발, 자연친화적 놀이환경 조성’과 같은 표현이 있었다. 또한 ‘먹이 체험’은 간식일 뿐이며, “모든 동물들은 먹이체험과 별개로 정해진 식사 시간에 정해진 식사량에 따라 먹이를 급여“하고 있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었다. 점박이하이에나의 안내문에는 ”등에 상처는 짝짓기를 하다가 생긴 가벼운 상처이니 안심“하라고 적혀 있었다.
어떤 동물의 감옥은 바닥이 관람객이 밟고 있는 복도와 같은 것이었다. 모래나 지푸라기, 풀 같은 것을 깔아 서식처를 흉내 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관리의 용이함이나 비용 절감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유럽, 아시아, 남미 세계 곳곳에서 납치된 노예들을 실내에서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어린이가 와야 하니 바닥은 유아차나 휠체어가 다니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정상 가족의 정상적인 나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