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늘 Aug 30. 2021

친한 친구

마늘단편- 그와 그녀의 이야기






"너 있잖아, 나랑 정말 친한 친구니까 이런 이야기하는 거야. 여자들이란 말이야, 늘 백업이 있다구."

그는 볼이 발그랗게 취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놀란 듯이 말했다. 

"백업?" 

"그래. 백업?" 

"무슨 농구나 야구 같은 운동할 때 쓰는 말도 아니고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그런 것에 무지한듯한 그가 귀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를테면, 예전 말로는 어장관리 같은 거지." 

"아하. 그러니까, 일종의 바람 같은 거지?"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여자들은 싱글일 때건 솔로일 때건 자기를 좋아하는, 혹은 좋아하는 것 같은 남자들과 은근 관계를 가진단 말이지. 자주 연락을 하거나, 종종 만난다거나, 굳이 섹스 같은 걸 하지는 않더라도 반년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한 번. 혹은 몇 해에 한 번씩 연락하면서." 

그는 남은 호가든을 한 번에 들이켜고는 물었다.

"어라, 뭐하러 그러는 거야?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올인해서 연애하거나 잘 지내거나 그러게 좋은 거 아니야?"

그녀는 한 손을 턱에 괴었다. 그리고는 잠시 바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바텐더의 뒷모습을 훔쳐본 뒤에 그의 눈을 보고 말을 이었다. 

"뭐, 사실 그 편이 사랑하는 사이에서 좋긴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구. 제법 많은 여자들은 그녀들이 사랑하는 이성친구와 싸우거나, 혹은 헤어지게 될 위기, 거의 다 헤어진 상태, 그리고 완벽하게 홀로 된 상태 같은 거를 두려워한다구. 물론 사랑을 많이 안 해본 사람이라면 그것과 상관없이 눈먼 사랑을 하겠지만, 자기가 차인 것도 모르고 매일, 매시간, 매분 전화를 한다던가, 집 앞에서 기다린다던가, 친구들을 통해서 다시 만나기를 구걸한다던가... 같은 말이지. 하지만 몇 번 정도 사랑을 하고 헤어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보호하는 그런 벽 같은 것이 생기기 마련이거든. 남자 친구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서 헤어지자고 했는데 사실 헤어지기는 싫고, 그렇다고 먼저 연락하기는 싫고. 그럴 때 백업들에게 연락하는 거지. 그럼 그 백업들은, 

'아니, 내가 짝사랑하던 그녀가 웬일로?' 하면서 덜컥 덫을 물어버리는 거야. 그 불쌍할지도 모르는 남자는 마치 잠시간 그녀의 새 남차친구가 될 수 있을 것 마냥 그녀에게 잘하지만, '훗 나의 인기란 역시.' 라며 자존감을 회복한 그녀는 싸웠던 전 남친에게 다시 가거나, 혹은 만나고 있는 여러 백업 중 괜찮은 누군가와 사귀게 되지. 물론 운이 좋다면 그가 그 남자가 될 수도 있는거고."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는 것 외에 딱히 다른 것을 할 수는 없었다.

"오호라. 뭐. 그 정도야. 남자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구. 네가 이야기 한 여자의 예도 여자 대부분이 아닌 일부일테고." 

그녀는 이미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아는 친구들은 대부분 그래. 나도 그렇잖아. 나도 뭔가 자존감 회복하고 싶을 때 널 불러낸다구. 하하. 아니, 아니. 농담. 우리 벌써 십 년 친구인데. 뭘."

"그런가." 

그는 마침 그들의 앞을 지나가는 마스터를 불러서 바카디 151을 한 잔 주문했다. 마스터는, '아니, 무슨 바카디를 스트레이트로 주문을 한담?'이라는 표정이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카디를 찾으러 바 깊숙한 안쪽으로 사라졌다.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지만, 나 좋아하지 마. 나 나쁜 여자 만들지 말라구. 그냥 우리는 편한 사이면 되는 거야." 

 그는 갑자기 혼돈스러웠다. 그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고백한 적 없지만 그가 십여 년간 그녀를 좋아했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가 엑스들과 헤어질 때 울며불며 그에게 전화할 때마다 2-3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1시간 이내 그가 달려갔다는 것을. 그래서 10년간 떼인 과속 딱지만 40장이 넘고 운전면허도 한 번 정지당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 그녀가 이야기하는 백업 같은 남자가 바로 그라는 것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잠시 후 묵묵히 앉아있는 그의 앞에 그가 막잔으로 주문한 바카디가 놓였다. 그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이야, 남자다. 너? 호호" 

 누가 들어도 조롱조인 그녀의 말. 그의 마음은 그런 그녀의 말과 상관없이 언제나 그녀를 볼 때마다 아프고 시렸지만 그의 아픔이 그녀의 기쁨이라면 그는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그의 머리를 헝클어 트리며 말을 이었다. 

"아이구, 내 새끼. 다 컸네. 다 컸어. 이런 독한 술도 기침 한 번 안 하고 다 마시고 말이야. 한 잔 더해. 내가 산다." 

그는 늘 그렇듯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얼굴 표정에 그 모든 것이 드러날 것 같아 억지로 참아가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한 것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독일의스피키지 바(가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