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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발따끄레는

홀리몰리 인도델리

by 초부정수 Mar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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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아라비아해가 보이는 아지트에 머물고 있었다. 뭄바이 공항에서부터 타고 온 차에서 내리자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경찰들이 구불구불한 좁은 통로를 지나 집 안으로 안내했다. 그는 인도의 마하라슈트라 주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인 쉬브 세나_Shiv Sena당을 창당한 인물이다. 쉬브 세나 당은 마하라슈트라 우선주의와 힌두교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극우 우익 정당이다. 창당을 하기 전에 그의 직업은 시사만화가였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마하라슈트라주는 다른 주들에 비해 비교적 경제 기반이 좋았기 때문에 독립한 인도에서 새로운 직업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당시에 발끄레는 그렇게 몰려오는 타 지역 사람과 파키스탄인, 그리고 중국인을 배척하는 내용의 만화를 신문에 기고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커졌다.


어디나 텃세라는 것은 없을 수 없으나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생각해 보면 인도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인도는 공식 언어만 20여 개에 달하여 같은 인도 국적을 가진 사람들조차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일이 많으며,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문화도 많이 다르기 마련이다. 인도의 공영어는 영어와 힌디이지만 사실 힌디어를 못하는 인도인들도 꽤 많고 각자의 출신지 언어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도인끼리도 간혹 영어로만 대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서로의 모국어가 다른 인도인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텃세라고만 치부하는 것은 조심스럽기도 하다. 이것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은 귀여운 수준이라 하겠다. 우리의 지역감정이나 인도의 지역별 '텃세'를 생각하면 과연 세계화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없지 않다.

 



여하간, 발따끄레는 지난 2012년 사망했는데, 내가 그를 만났던 2000년대 초에는 70대 중반의 노인이었다. 당시에 나는 한국 본사에서 인도 사업 개발 담당이었다. 그때 처음 접한 그의 이름은 물리적, 심정적(?)으로 모두 한국인이 발음하기 조금 어렵다 느껴졌다. 영어로 쓰면 Bal Thackeray로 외국인들은 ‘발 타커레이’라고 하나, 인도인들의 발음은 ‘발따꺼레이’에 조금 더 가깝게 들린다.


아지트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발따끄레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았다. 남자들의 전통 복장 중의 하나인 옷깃이 없고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느슨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굵은 보석으로 엮어진 목걸이를 걸친 채, 똑바른 콧등 위에 얹혀있는 사각형의 검은색 뿔 테 안경은 그가 꽤 깐깐한 성격의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손색이 없었다. 그의 곁에는 붉은색의 사리를 입은 젊은 여인이 카펫이 깔려있는 대리석 바닥에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느낌이 친 딸은 아닌 것 같았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며느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관계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는 서울 청담동 로데오 거리에 와서 해프닝을 벌였던 그때의 그 제인 영감과 델리의 인디라간디 공항에서 출발하여 두 시간 동안 새벽 비행기를 타고 뭄바이_Mumbai 공항에 도착하여 발따끄레를 만나러 왔지만 이런 분위기일것 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제인 영감은 발따끄레가 마중을 하자 엎드려 그의 맨발에 입을 맞췄는데, 그의 모습이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제인 영감은 주로 델리의 팜 하우스_Farm House에서 지내는데, 그곳에서는 종종 수많은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모여 파티를 하고, 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들의 손에는 값비싼 보석들이 들려있기 마련이었다. 그의 팜 하우스로 들어가려면 굳게 닫혀있는 커다란 철문을 지나야 한다. 그 크기가 조금 과장해서 광화문 정도의 크기는 되지 않나 싶다. 문을 지나면 꽤 길게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차가 올라가게 되는데, 길 주변으로는 높은 나무와 물이 흐르는 해자가 보인다. 물 길을 따라 작은 다리와 그리스의 조각상 같은 것들도 놓여 있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면 비로소 그리 높지 않은 흰색 빌딩이 나온다, 그의 집이다. 집까지 이어지는 길은 마치 19세기말 오스트리아 빈의 링슈트라세_ Ringstraße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화려해서 헤르만 브로_Hermann Broch가 비판한 가짜 르네상스, 가짜 바로크, 가짜 고딕으로 치장된 세기말 빈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면 절제된 장식의 단순한 아름다움이 느껴져 반전의 효과를 보인다. 이곳의 주인이 제인 영감이니 그의 평소 태도가 어떨지는 누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엎드려 맨발에 입을 맞추는 모습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의 인도의 전기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인프라가 낙후되어 전기의 품질도 좋지 못했다. 게다가 도전_盜電에 능통한 기술자(?)들도 많아 배전회사들은 이래저래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제인 영감과 우리는 한국의 원격검침시스템이 인도에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한국의 솔루션 회사 및 한국전력공사와 좋은 이야기를 나눈 후 본격적으로 사업개발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인도 중앙정부의 전력청 장관을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각 주의 전력청들과 배전회사들은 중앙정부로부터의 지시가 없으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도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끼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의 혁신적인 의견이 위로 올라가거나 보고되기는 그리 쉽지 않은 구조와 문화다. 국가 간의 MOU를 체결하는 것도 아닌 일개 회사원이 인도 중앙 정부의 장관을 만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문제라면 문제이다.  나와 같은 외국인들이 사업을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비용과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며, 월급쟁이의 자유재량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나게 되었을 때 그가 나를 듣보잡의 하나로 인식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더 피곤한 일이다. 게다가 만나야 할 대상이 장관과 같은 정치인이라면 결과는 복불복에 가깝지만 시도는 해 봐야 복불복인지 알 수 있다는 점은 늘 불편하기만 하다. 어느 나라건 정치인들의 대화법은 조금 이상하여 보통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기 어렵다. 현재의 미국 대통령인 도날드 트럼프는 예외다.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거의 모든 정치인들은 그들이 마치 신인양 이야기를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성경 출애굽기에서 하느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을 히브리어로 '에헤예 아셔 에헤예', 우리말로 하면 '나는 나다'라고 하신 것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하느님이 자신의 일에 관심 가지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하라는 뜻일 수도 있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말일 수도 있듯이 솔직히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 스스로 이해해야 할 말이다. 일개 월급쟁이가 신도 아닌 인간을 만나 이런 식의 말을 나누는 것은 불편하다. 그럼에도 인도에서 일을 하다 보면 중앙정부와 주정부의 많고 다양한 장관들과 이런저런 국회의원과 그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야 할 일들이 생긴다. 특히 국회의원을 만나는 것은 그리 재미도 없고 가장 비효율적이었다. 주변에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똘마니들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인에는 한국인이 나 한 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역할을 나눌 방법도 없고 만나고 겪어보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진짜배기인지 알 방법도 그리 마땅치 않다. 그래서 종종 뒤통수를 맞기 마련이다. 같은 한국사람에게도 뒤통수 맞을 수 있으니 수업료라 생각한다.



 

한편, 중앙 전력청의 장관은 인도의 수도인 델리에 있는데, 우리는 1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뭄바이로 가야 했다. 당시에 그 장관을 직접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발따끄레였기 때문이다. 인도는 연방제로 정권의 구조가 매우 다이내믹하고 복잡한데, 당시 인도 전력청 장관은 발따끄레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것도 참 오랫동안 잘 이해되지 않았던 인도의 정치 역학의 하나였다. 제인 영감은 발따끄레와 연줄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예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지만 출신 주와 성장 배경도 다르고 그리 막역한 사이는 아닌 듯 보였다. 영감이 무엇을 약속했는지 묻지 않았다. 사실 뭘 물어야 할지도 잘 알 수 없던 시절이다. 다만, 제인 영감은 함께 투자를 동반한 사업을 하려는 것이니 내가 로비스트를 고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 돈도 없으며 인도의 수많은 자칭 로비스트들 중 진짜는 거의 없다는 것을 당시에도 이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처음 만난 발따끄레와의 대화는 나의 목적과는 달리 인도와 한국 사회의 차이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대통령이라는 표현 대신 장군이라는 표현을 썼다. General Park, 즉 박 장군이라고 칭하여 처음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발따끄레는 원래 나치의 히틀러를 존경한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하며 인도에도 꼭 필요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자네는 1960년대 까지는 인도가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는 것을 아는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지. 지금의 한국 경제 발전의 기반은 박 장군이 만들었지 않은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데, 그중 하나는 독재자라는 거지요. 경제 발전과 별개로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입니다.”

 

“알고 있지. 그는 독재자였지만, 후진국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느 시점에 독재는 꼭 필요하기도 하네.”

 

“…”

 

이런 대화가 오가던 중 옆에 있던 붉은 사리를 입은 여인이 말을 거들었다.

 

“아버님도 한 번 하셔야죠. 인도도 한국처럼 발전을 해야 하니까요.”

 

“아가야, 그건 안 되는 일이란다. 인도는 이미 너무 민주주의가 커져서 독재를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어. 그 누구도 이제 인도에서는 독재를 생각할 수 없단다.”

 

그리고, 그는 전력청 장관에게 다음 날 뭄바이로 날아오라는 아주 짧은 전화 통화를 했다.

 

“…”

 

다음 날 오전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고급 호텔에서 국제회의도 가능할 것 같은 커다란 콘퍼런스 룸으로 장관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인도에 독재는 없는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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