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독(1930) 도로시 L. 세이어즈
[세계 추리문학전집] 37/50
굳이 '여성'이라는 구분을 둘 필요는 없지만 애거서 크리스티가 아닌 추리 고전기 여성 거장 작가라면 도로시 L. 세이어즈를 들 수 있다.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호감 가는 탐정 피터 윔지를 창조했다. 작품은 생기가 있었다. 미스터리인데도 음울하지 않고 활기찼다. 작가는 또한 탁월한 신학자였다. 신학 연구 때문에 추리소설 작품을 적게 남긴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신학 연구 덕분에 추리소설의 깊이 또한 깊어졌다. 운명 안에 놓인 인간의 본성 그리고 죄와 벌의 문제를 논한다는 점에서 신학과 추리소설은 연관되는 점이 있었다.
도로시 L. 세이어즈는 1923년에 데뷔 소설 『시체는 누구』를 발표했다. '귀족 탐정 피터 윔지' 시리즈의 시작이다. 다섯 번째 책인 『맹독』이 출간된 1930년은 추리소설의 황금기가 시작된 해였다. 같은 해, 작가는 추리 소설가들의 모임인 '추리 클럽'에 참여한다. 추리 클럽은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고수했다. 하나, 사건은 신과 미신 등 우연이나 초월에 기대지 않고 (현실에 근거한) 탐정이 논리를 사용해 해결된다. 둘, 작가는 독자에게 중요한 단서를 숨기지 않는다. 『맹독』은 두 규칙을 충실히 지킨 양식미가 돋보이는 고전이다.
첫 장부터 법정에서 시작한다. '맹독'으로 죽은 필립 보이스 사건의 재판이다. 그와 결혼까지 할 뻔했던 소설가 해리엇 베인이 피고다. 남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독극물인 비소를 여자가 구매한 적 있다는 증거가 제시된다. 여러모로 유죄로 보이는 상황이다. 배심원단은 '합의 불가' 결론을 내린다. 재판은 연장된다. '귀족 탐정' 피터 윔지는 피고가 무죄라고 확신한다. 또 하나 독특한 확신에 빠진다. 추리소설이고 이야기는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 한눈에 피고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청혼까지 한다. 피고이자 예비 신부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살인 사건과 러브스토리. 반대인 키워드가 병치 되어 흥미로움이 배가된다. 지금 리메이크한다면 라이트노벨 탐정이 어울릴 법한 말 많고 산만한 철부지 어른 피터 윔지는 다양한 가설과 용의자를 파헤친다. 충성심 높은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때 느껴지는 권위와 카리스마는 전무. 탐정(작가)과 독자 사이 거리감을 줄여주는 것은 바로 친근감이다. 마지막 진범과 대면하는 순간에도 장난을 친다. 이 유머의 파격미가 빛을 발한다. 탐정은 사건을 해결한다. '탐정 클럽'의 두 원칙을 지키면서. 탐정은 사랑에도 성공할까?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