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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지물의 비애

 -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라서 8 화

 의사가 된 지 30년. 마취과 의사로서 수술실 안에서는 늘 할 일이 많았고 내 역할이 정확하였다. 그러나 통증을 전담하는 마취과 의사가 아닌 마취를 담당하는 마취과 의사는 수술실을 떠나면 갑자기 의사가 아닌 의사가 되어 버린다. 이런 사실을 내가 뼈저리게 느낀 곳이 불행하게도 2014년 봄. 진도 체육관에서였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그 날 새벽 3시까지 응급 수술의 마취를 담당하느라 밤을 거의 새운 상태였다. 당직 의사가 야간에 근무한 경우 출근을 늦게 하는 것이 그 당시 마취과 내의 방침이었기에 10시 정도 차를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켰다.


 ‘이 현우의 음악 앨범'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현우 씨가 큰 유람선이 침몰하고 있는데 학생들과 다른 승객들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참으로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접한 소식은 달랐다.     


 업무 중에도 간간이 인터넷이나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암담한 이야기뿐이었다. 안 좋은 기억은 더 쉽게 잊어버리려고 노력해서인지 그때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이 생기고 나서 나에게도 마음의 병이 생기고 말았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그 사건은 정말 남의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기에... 밤마다 나오는 세월호에 대한 뉴스와 보도들을 보느라 잠을 자지 못했고 공연히 눈물이 나고...      


 그해 5월 초는 어린이날, 주말이 이어지면서 긴 연휴 기간이 있었다. 나 또한 몇 개월 전부터 아이들과 여행을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의 알림 게시판에 연휴기간 동안 진도 체육관으로 의료 봉사를 가는 팀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와 있었다. 나는 앞뒤 생각 없이 그 팀에 지원하였다. 무언가라도 하고 싶다는 열망과 갈망을 안고... 당연히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불평을 들어야 했다. 나는 남자끼리의 여행(father-son bonding activities)의 의의를 운운하며 그들만의 여행을 계획하였다.     


 진도 체육관에는 거의 사건이 일어난 지 2주가 지난 시점에서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모인 가족들과 그 관계자, 봉사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분들을 위한 의료 봉사를 병원마다 돌아가며 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의 건강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을 바 있어 마취과 의사인 내가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그 원인이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무언가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덜컥 참여한다고는 했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생각 끝에 몇 년 전 통증클리닉에 취직해 있을 때 배운 근육 내 자극 요법(intramuscular stimulation therapy)이 떠올랐다.


 이 치료법은 급, 만성 통증에 침을 이용해 근육에 자극을 주는 치료법으로 침 단독, 혹은 전기 자극기를 이용해 치료하는 방법이며 한방 침과는 다른 치료법이다. 마침 나에게 전기 자극기도 있었기 때문에 침만 사서 소독하면 혹시 통증이 있는 체육관내 유가족이나 봉사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침을 사고 오랜만에 치료법과 관련한 책도 들추어 보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건강의학과 과장님께서 봉사에 참여하기로 한 의료진들에게 보내주신 정신적 충격을 받은 가족들에게 취해야 할 의료진들의 태도나 정신분석학적 자료 등의 자료들을 읽어 보았다.    


 금요일 오후 정형외과 과장님과 행정부 직원분과 같이 차를 타고 진도로 향했다. 다른 직원들도 각자 나뉘어 혹은 병원 버스를 통해 오기로 약조되어 있었다. 막상 진도 체육관에 도착하니 가족분들보다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모인 봉사자분들이 훨씬 많았다.


 핸드폰 충전해주는 부스, 간식 주는 부스, 각종 건강 음료, 진통제, 감기약, 등 약국을 통째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부스, 치약 칫솔 등 일상에 필요한 물품을 주는 부스. 다양한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 수많은 간이음식점들. 더불어 막간을 이용해 아침, 저녁으로 청소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봉사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세월호 희생자분들의 가족분들은 정작 봉사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않는 듯 덩그러니 외로운 섬처럼 모여 있으셨다. 가족분들은 그 넓고 차가운 바닥의 체육관에서 그냥 간단한 패드 몇 장을 깔고 그 위에 이불과 간단한 생활용품들을 펼쳐 놓고 근 몇 주간을 버티고 계셨다.    


 우리 병원 봉사자들은 진도 체육관 밖에 한 부스, 체육관 안에 한 부스를 차려 놓고 의료인들의 손길이 필요한 환자분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부스를 찾는 분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내과 선생님 한 분이 차라리 체육관 안 부스에 있는 의료진들이 모여 계시는 가족분들 한 가족 한 가족 직접 찾아뵙고 필요하거나 불편한 점이 없으신지 일종의 왕진을 가자고 제안하였다.


 가족분들 대부분은 멍한 얼굴들이었고 어떠한 감정도 얼굴에서 읽을 수 없었다. 그냥 지친 얼굴들,  본인들이 당한 황당한 사건들에 정신이 나가고 지친 표정들이었다. 부모님 대부분은 스트레스로 인해 없던 당뇨와 고혈압이 생긴 분들이 많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시는 분들이 많아 그런 분들은 눈여겨 두었다가 영양제를 억지로 투여하고는 했다.     


 의료진들을 찾는 분들이 많이 없다 보니 대부분 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봉사 오신 분들 몇 분, 그리고 간혹 다치신 군인, 주말에는 먼 곳에서 방문하신 가족분들의 친척분들이 우리 부스를 찾아오시기는 하였으나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가족분들이 간혹 계시기는 하였으나 대부분 약을 원하셨고 정형외과 선생님께서 진료하셔도 충분한 환자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곳에서 딱히 환자분을 누이고 침을 놓고 할 공간도 없어 물리 치료실 봉사 부스를 빌려야 하는 상황인 데다가 환자분들이 침 맞으시는 것을 원하는 분도 많지 않았다. 전기 치료기까지 싸가지고 온 내가 민망한 상황이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은 본인의 통증에도 무감각해지시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만이 남아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몇 시간마다 바다에서 찾은 시신의 특징에 대한 안내문이 실시간으로 전광판에 나오곤 했다. 옷차림, 치아 상태, 신발, 지니고 있던 물건들... 그런 안내문이 나오면 넓은 체육관 한구석에서 울음과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시신의 유가족들이 벌떡 일어나 체육관의 가로질러 앞으로 나가고 어떤 특정한 문을 열고 나가곤 했다. 그 문 뒤로 찾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어떤 장소가 있는 듯했다. 앞으로 걸어 나가는 가족의 오열은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듯 시작되어 다른 가족들의 울음과 한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가족의 모습을 체육관에 남아 있는 다른 가족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이제 이들에게 남아 있는 희망이라고는 하루라도 빨리 자식들의 시신이라도 찾아내는 것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우리 의료진들도 이 순간에는 같이 눈가를 훔치고 흐느끼곤 했다.     


 어느 날 저녁, 현 대통령이신 문재인 대통령이 그 진도 체육관을 방문하셨다. 그때 당시는 아무도 대통령이 되시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걸까? 수행인인 듯한 젊은 남자 한 분과 둘이서만 이곳저곳을 다니시면 가족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고 다니셨던 것 같다. 반면에 팽목항에 갔던 병원 직원 말씀이 박근혜 대통령이 왔는데 그 경호원들과 수행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난리가 나서 박 대통령 뒤통수도 못 봤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여러 감정이 드는 이야기이다.    


 어느덧 5월 4일, 내일이면 어린이날이었다. 우리의 봉사 기간도 거의 끝나갈 무렵... 문득, 어떤 아버님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 아버님은 우리 부스 바로 앞에 이불과 몇 가지 용품들을 펴 놓고 계셔서 우리 봉사자들에게는 친숙한 분이 되어있었다. 다른 아버님보다는 그나마 밝은 편이셔서 말씀이 없으시고 유령처럼 다니시는 다른 분들에 비해 말씀도 하시는 분이셨고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씀도 잘하셨다.

 "내일이 어린이날이구나... 우리 ㅇㅇ이가 오늘 더 보고 싶네.... “ 그 말을 들었던 병원 직원과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몰래 훔쳤다.    


 우리는 그 날 저녁에 다른 병원의 의료봉사팀에게 인계를 하고 진도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무척 많이 내려 운전하시던 정형외과 과장님이 많이 힘들어하셨던 기억이 난다. 거의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병원에서 서로 수고했다는 말을 하곤 헤어졌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진도 체육관에 가서 내가 무얼 했나 생각해 보았다. 봉사하러 갔다가 돌아왔다고 말하기 민망한 기억들이었다. 그동안 내가 마취과를 선택하고 후회한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으나 그때처럼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 당시 차가운 공기로 가득한 진도 체육관에서 만났던 유가족분들의 고통과 비애 서린 얼굴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찾은 아이들 시신의 대부분에 손톱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났기에...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아이들의 고통과 남은 유가족들의 비애를 우리 모두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배의 난파를 기록한 명화로 낭만주의 화풍의 선두자였던 테오도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묵'을 꼽을 수 있다. 이 명화와 관련된 프랑스 군함인 메두사호의 난파 사건은 세월호 사건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1816년 7월 2일 세네갈로 향하던 메두사호가 난파되었는데 당시 선장과 선원들 자신들이 먼저 구명보트를 타고 뗏목을 끌고 가기로 약속했으나 선장이 뗏목과 이어진 밧줄을 끊어버리는 등 세월호의 선장과 비슷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당시 프랑스 정부는 왕당파라는 이유로 25년간 배를 탄 적 없는 퇴역 장군을 선장으로 임명했던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사건을 묻어 두려고 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당시 박근혜 정부의 행위에 기시감이 들게 하는 사건이다.


 400여 명의 승객 중 149명이 뗏목에 몸을 실었으나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0여 명이었고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해 동료의 인육과 피를 입을 넣는 야만적인 행위를 하다가 7월 17일 아르귀스호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제리코는 이 반인 간 적인 사건의 증언을 직접 듣고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 가장 강하게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하여 화폭에 담았다. 삶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뜨거운 열기의 바다를 떠다니다 느닷없이 배를 발견하고는 새로운 삶의 희망이 용솟음치는 급박한 순간, 죽음의 절망에서 삶의 희망이라는 새로운 환희의 감정을 안게 된 순간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뒤쪽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희망에 찬 외침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묘사가 나오는데 작가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보다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의도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세월호와 관련해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이 잘 해결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들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 재난이 다시는 발생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제목: The Raft of the Medusa (메두사의 뗏목, 테오도로 제리코 작품, 1819, 루브르 박물관 소장)   

 

 18세기이전의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격정적인 감정과 사실에 가까운 묘사로 살롱전에 출품되었을 때 관람객들이 경악하였던 이 작품은 실제로 화가가 시체를 직접 보고 묘사를 했을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다. 그러나 사람의 몸이나 피라미드 구성은 아직도 고전주의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고 대중들은 분노했으나 예술적으로 매우 호평을 받은 그림이 화단에 '낭만주의 격정'을 불러일으킨 역사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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