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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an 17. 2020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경주마

승부의 세계에 들어선 여덟 살짜리 아이

"오늘 날씨 좋다, 언니. 그치!"

 나현이가 학생 식당에서 나오며 해맑게 말했다.

"그런 거 느끼지 마. 손 줘봐. 이렇게 손을 펴서, 눈 옆에 딱 대. 옆이 보여?"

 나는 반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그러나 꽤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나현이는 어리둥절해했다. 이 언니가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는 거야. 우린 경주마가 돼서 중간고사를 달려야 해. 날씨 같은 거 느끼지 마."

 나는 한 음절 건너 한 음절마다 액센트를 주어 강조하며 말했다.


    대학원에서 시험에 치이던 중 나눈 대화였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했던가. 학부를 다니는 동안 바로 옆에 두고도 누리기 어려웠던 자하연의 벚꽃을, 졸업하고서는 더 보기 힘들었다.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나도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늘 중대한 일을 앞두고는 그 외 다른 모든 것을 할 수 없었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 하고, 잠을 충분히 자지도 못 하고, 경직되고 긴장한 채로 하루들을 버텨내고 살아냈다. 심지어 고3 때에는 샤워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머리를 감으면서 몸에 비누칠을 하고, 양치를 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아 신경안정제를 먹고서야 그날의 막을 내리는 커튼이 닫혔다.


    여덟 살 때는 태린이 때문에 피아노를 그만뒀다. 나는 무엇이든 누구보다 잘해야 직성이 풀렸는데, 걔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나보다 1년 정도 먼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서 내가 바이엘을 칠 때 체르니를 치고, 내가 체르니 100을 칠 때 체르니 30을 쳤다. 양쪽으로 머리를 높게 땋고 공주 옷을 입고 다니던 태린이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서 그냥 피아노를 그만둬 버렸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미 여덟 살 때부터 승부의 세계에 스스로를 놓아두었던 것이다. 매 학년 첫 학기 반장을 빼놓지 않고 했고, 전교 부회장이며 전교 회장 따위의 감투는 다 차지했다. 내게는 그런 것들이 필연적으로 내 것이어야만 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고작 시험기간에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준이었다. 대신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전교 20등 안에 들었고 나는 이 사실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중학교 입학 때부터 외고에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우리 집 형편으로는 나를 외고에 보내줄 수 없었다. 일반고보다 학비가 비쌌기 때문에. 그렇게 포기했는데 엄마는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외고에 도전해보라고 했다. 나는 입시 3개월을 앞두고 목동에 있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큰 종합학원에 다니게 된 것인데, 역시나 거기엔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애들이 많았다. 학원 반에서 중간 등수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내가 꽤나 명석한 개구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저 좁은 우물 안에서 잘난 척하는 개구리였던 것이다. 결국 외고에는 가지 못 했다. 외고 시험을 치렀던 날을 생각해 보면, 아마 반도 더 틀린 것 같은 시험지를 앞에 두고 느꼈던, 영어 듣기 시간에는 고작 3분의 1 정도의 수준을 알아들으며 느꼈던 처참함이 떠오른다.


    결국 나보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다 외고나 자사고에 갔다. 나는 얼떨결에 우리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을 하게 됐다. 예비소집일에 나와 우리 중학교 남자애 김영민은 교무실로 불려 갔다.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입학식에 선서를 해야 한다는 설명도 들었다. 입학식 날 모든 아이들 중 가장 앞자리에 섰다. 내가 일등이니까. 그 기분은 정말이지 짜릿한 것이었다. 고작 열일곱의 아이가 느끼기에는 약간은 버겁기까지 한 감정들. 어떤 기쁨, 희열, 환희, 쾌락과도 같은 것이었다. 선서를 하려고 나 나름대로의 엄숙한 표정으로 교장선생님 앞에 섰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음속에서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지 꼬물꼬물, 간질간질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는 건 이렇게 간지러운 기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기분 좋음을 계속 나만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않고, 오직 나만. 나만 일등을 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학원에서는 3개월 외고 반에서 고등부로 올라갔는데, 나는 학원 반배치고사 성적이 없어서 자동으로 중위권 반에 배치되었다. 그 반은 분위기가 너무 소란스럽고 수업 내용도 이미 다 예습했던 부분이었다. 엄마는 학원에 전화를 걸어서 나를 상위권 반으로 옮겨줬다. 이게 문제가 될 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내가 가게 된 반은 독설로 유명했던 갑용 선생님의 반이었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시는 나이가 있으신 남자 선생님. 잘하는 아이는 한껏 추켜세워주지만, 못 하는 애들은 대놓고 무시하는 무자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처음 반을 옮긴 날, 선생님은 수학 수업을 하다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는 나를 복도로 불러냈다. 수업시간인데 뜬금없이. 선생님은 내게 빈정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너, 수학이 재미있니?"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의 질문에서 어떤 의도도 읽어낼 수 없었기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한 번 배웠던 거기도 해서 문제 푸는 게 재밌어요."

 선생님은 내 대답을 듣고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너 어디까지 배웠는데? 수1까지 배웠어?"

 "네!"

 나는 뿌듯하게 대답했다. 엄마가 우리 집 형편에 거금을 들여 목동 수학 단과를 보내주었어서, 예습을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다시 얘기했다.

 "너, 그거 아니? 우리 반 모든 애들이 다 수1을 뗐어. 그중 반은 미적분까지 뗐고, 또 그중 반은 수2까지 한 애들이지."

 선생님은 문에 달린 작은 창문 같은 곳으로 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리가 교실 안까지 들리는지 애들은 이쪽을 쳐다봤다. 난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내가 해낸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었지만, 이상하게 초라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더 열심히 해서 이 선생님이 내게 가지게 된 편견에 맞서 이겨내리라 다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 선생님은 원래 저래'라든가, '왜 저래'하고 무시해버리면 될 일이었는데. 나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거나 혹은 그의 무시를 이겨내고 싶었다. 선생님의 말이 세상의 전부였던 나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호통에 따르고, 그의 기준에 맞추고 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는 중요치 않았다. 어쩌면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상관없었던 것 같다. 그저 어떤 승부욕, 어떤 욕심이 나를 추동했다. 갑용이 나를 채찍질할수록 나는 더 열심히 달리는 말이 되었다. 그 훈련장을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채찍질에, 스스로의 채찍질을 더했다. 몸에 생채기가 나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갑용은 그 이후로도 나를 괴롭게 했다. 그가 나를 괴롭힌 건지,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스스로를 괴롭혔는지, 혹은 그 둘 다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나와 같이 수업을 들었던 홍영일은 그런 말들을 다 무시했으니까. 나는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아마 내 속에도 1등을 하고 싶다는 열망,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여기저기 뻗쳐 있었기 때문이리라. 갑용은 1학년 초반에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희가 제일 좋아하는 거 세 가지만 생각해봐."

 나는 '친구들 만나기, 티비 보기, 컴퓨터 하기'를 꼽았다. (그때는 스마트폰의 시대가 아니어서 핸드폰 하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갑용은 이어서 말했다.

 "그거 세 개를 딱 끊으면 너희는 스카이에 갈 수 있다."

 마음속 전구가 켜지는 기분이었다. 스카이에 가는 길이 이렇게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니. 나는 그 말을 맹신하여 이후 내 일상에서 많은 것을 끊어냈다. 친구들은 학원 친구들이나 학교 반 친구들만 쉬는 시간에 만났고, 그렇게 좋아하던 드라마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사실 학원 끝나고 집에 오면 거의 10시 반 정도 되었는데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고 자라는 갑용의 말을 따랐기 때문에 티비를 볼 시간도 없었다. 그 외에도 학교에서 반장을 맡으면 괜히 번거롭고 입시에 도움도 되지 않으니 하지 말라고 하셔서, 추천을 받았음에도 출마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감투는 모조리 나의 것이었던 초·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오직 갑용의 말 하나 때문에.


    갑용의 독설은 나를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한 순기능과 동시에, 몸을 못 챙길 만큼 공부하게 한 역기능을 수반했다. 나는 더 이상 일상을 영위하지 못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쉬는 시간에는 영어 단어를 외웠다. 하교 후에는 집에서 간단히 간식을 먹고 학원 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갔다. 6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는 학원 수업을 듣고 저녁은 대충 쉬는 시간에 주먹밥 따위로 때웠다. 집에 와서 밥을 조금이라도 챙겨 먹어야 했는데 살이 찔 것 같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선 침대 위에 작은 탁자를 펴놓고 그날 학원에서 배운 문제를 복습했다. 처음에는 새벽 2시까지 버틸 수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체력이 버거웠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는 채로 깨 보면, 불이 켜져 있고 탁자 위에 엎드려 아무렇게나 자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에는 시간표가 없어서 더 조바심이 났다. 학원 수업이 없는 시간에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아서, 대충 도시락을 싸들고 학원 자습실로 갔다. 공부를 하면서는 종종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지기도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손가락이 찌릿했다. 머리카락이 이상하리만치 많이 빠졌다. 엄마는 가을이 오니까 털갈이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상했지만 신경을 쓰기에는 너무도 자잘한 증상들이었다. 어느 날부터는 몸이 뜨거웠다. 모종의 이유로 전교 부회장 선거에 나가게 되어서 선거 운동을 해야 하는데, 아침 등교를 해놓고도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내 방 침대에 누워 있는데 몸이 끓고 있는 듯 느껴졌다. 이불을 치워버리고 싶었는데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팔이 너무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다. 이불은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거실에 있는 아빠를 부르고 싶은데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내장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너무 뜨거워서 내 몸을 견딜 수가 없었다. 입을 살짝 벌렸는데 열기가 올라왔다. 아, 고열로 죽는다는 게 이런 건가.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때는 그렇게 크게 아파본 적이 없었는데도, 죽음의 모습을 얼핏 본 것 같았다. 아빠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내 방 쪽으로 오는 기척을 느꼈다. 몸은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데 감각은 더 살아났다. 목이 메어 쉰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

 뒷 음절을 완전히 발음하지도 못 해 눈물이 났다. 나는 아빠를 부르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눈물조차 뜨거웠다.

 "아..빠. 아빠."

 이상한 기척을 느꼈는지 아빠가 내 방으로 들어왔고, 나는 계속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빠는 화들짝 놀라 나를 일으켰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뜨거운 내 몸을 알아챈 것 같았다.

 "희우야, 병원. 병원 가자. 일어날 수 있겠어?"

 나는 가까스로 일어나 집 앞에까지 나가 택시를 잡아 탔고,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운 나를 아빠는 부축했다. 완전히 아빠에게 기대어야 겨우 서있을 수 있었다. 작은 내과의원에 도착하자 간호사 선생님은 열을 재고 내게 말했다.

 "열이 40도가 넘네.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 어떻게 견뎠니?"


    나는 바로 전날 갑용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을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나를 불러 세워 물었던 갑용의 말을.

 "너 요즘 공부 열심히 하는 거냐?"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을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아는데.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네, 그럼요. 저 새벽 2시까지 공부하다 자요!"

 갑용은 말했다.

 "그래,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한데. 근데 넌 왜 아무것도 모르던 입학 전이 더 머리가 잘 돌아갔던 것 같지?"

 그는 손으로 내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뜨거웠다, 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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