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그날 기억나? 왜, 내가 열이 많이 나서 학교 갔다가 그냥 돌아온 날 있잖아. 아빠랑 겨우 택시 타고 협동 의원에 갔던 날. 나 그때 진짜 아팠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죽을 수도 있었다고 했잖아.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더 오싹한 거 있지. 더 아픈 것 같고. 그날 처음으로 링거도 맞아보고 그랬는데. 아빠는 그때 혹시 알았어? 내가 이렇게까지 아파질 줄 말야. 나는 정말 조금도 몰랐거든. 그 열이 두 달 넘게 계속될 줄도, 그게 루푸스라는 희귀병 때문일 줄도 몰랐어. 심지어는 십 년 후에 몸에 호스를 꽂게 될 줄은 더 알지 못했던 것 같아. 우리 그때 병원을 여기저기도 돌아다녔다, 그치? 처음에는 협동 의원에서 열나는 건 임파선염 때문이고, 손가락 아픈 건 퇴행성 관절염이라고 했었잖아. 그때 생각하니까 좀 웃기다. 아빠랑 나랑 동시에 서로 쳐다보고 갸우뚱했었는데. 의사 선생님 앞이라서 웃지도 못했지. 고작 열여덟인데 퇴행성 관절염이라니, 이상하잖아. 가벼운 병인 줄 알았어서 그런가? 우린 그때 웃어넘길 수 있었네.
나는 약을 먹고도 38도를 넘나드는 몸을 데리고 학생회장 선거도 치르고, 심지어 문화교류 체험단으로 프랑스도 다녀왔어. 열두 시간이나 날아갔는데, 자꾸만 몸이 뜨거워져서 파리를 마음껏 구경하지도 못했어. 통금이 있는 아이처럼 나 혼자만 일정 중간에 호스텔로 돌아와야 했어. 같이 간 친구들은 일정 후에도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고 노는데, 나는 계속 잠만 잤어. 가끔씩 그 애들을 만나면 내가 모르는 추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씁쓸하기도 해. 나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나는 파리에서도 의사 선생님을 만나야 했어. 신기하더라. 일정 중에 담당 선생님들하고 나만 다시 숙소로 돌아왔는데 의사가 직접 와서 진찰을 해줬어. 난 아직도 그 의사 선생님이 기억나. 여자분이었고 카고 바지에 연베이지색 조끼를 입고 왔었어. 흰 가운도 없이 말야. 의사 선생님들은 다 흰가운을 입는 줄 알았는데. 프랑스는 역시 다른가 봐,라고 그때도 말했는데 지금 또 유난스레 말하고 싶네.
우리는 그러고도 한참을 병에 대해 몰랐잖아. 머리가 빠지고, 열이 나고, 눈이 좀 붓고, 손가락이 아프고. 그냥 그런 정도였어서 그런가? 내과들을 돌아다녔지만 딱히 별다른 얘기를 듣지 못했지. 보이는 증상에만 대처를 해줬어. 머리가 빠진다고 하면 스트레스를 받냐고 물었고, 열은 임파선염이니 해열제와 항생제를 주었고, 손가락이 아픈 건 퇴행성 관절염이라나, 뭐라나. 한 번 어떤 내과에서는 머리가 아프다고 하니까 뇌질환이 의심된다고, 머리를 열어봐야 한다고 했어. 섬뜩했지. 온몸의 털이 솟는 기분이 들고 괜히 머리가 간지러운 것 같았어. 계속 병증이 줄어들지 않으니까, 엄마가 이상하다고 동네에 잘 본다는 내과를 알아왔잖아. 거기서는 검사를 하더니 바로 큰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고 했어. 신장이 안 좋은 것 같다고.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하고, 기다리는 동안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빨리도 흘러갔어. 나는 그때 답답하고 두려웠는데, 내 맘은 알은 체도 않고 시간은 제멋대로 달려가더라. 아빠, 대학 병원은 왜 그렇게 대기가 긴 걸까? 세상엔 아픈 사람이 참 많은가 봐.
그때 만난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청소년기에는 운동을 무리하게 하거나 고기를 많이 먹으면 단백뇨가 잠깐 나올 수 있다고 그랬잖아. 우리 그래서 그때 대학로에서 와플도 사 먹었는데. 별 걱정 없이 말야. 엄마랑 아빠랑 우리 셋이서만 병원에 가니까 꼭 외동딸이 된 것 같고 즐거웠어. 그런데 한 달 후 다시 찾은 병원에서 나는 바로 입원해야 했어. 혹시 모르니까 해보자던 24시간 소변검사에서 이상 수치가 발견된 거야. 아빠, 나는 그날이 되게 흐릿하게 기억나. 볕이 되게 많이 드는 가을날이었던 것 같아. 병원에는 사람이 많고 시끄럽고 웅성거렸어. 햇빛도 많이 들어오고 병원의 형광등도 너무 밝았던 걸까, 기억나는 장면들은 전부 흐릿해. 빛바랜 사진을 보는 느낌이야.
나는 얼떨떨했어. 아빠, 나는 정말 고작 두통이 있고, 손가락이 좀 아프고, 눈이 붓고, 열이 좀 날 뿐이었는데. 큰 대학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라니 믿기지가 않았어. 거기는 많이 아픈 사람들이 가는 곳이잖아. 우리 집에서도 가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아주 큰 병원. 앰뷸런스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다치고 아픈 사람들의 이송 침대가 거칠게 지나다니는 곳. 온몸에 소변 줄, 링거 줄 등을 줄줄이 단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곳 말야. 나는 그렇게 아픈 것 같지 않은데 그 사람들하고 같은 곳에 있어야 하는 게 불안하고 두려웠어. 병원 침대에 내 이름이 붙어 있는 게 낯설고 싫더라. 많은 사람을 끌어안았던 건지, 흐물거리는 몸체를 가져서인지 침대에서는 스프링 소리가 자주 났거든.
엄마, 아빠의 표정이 기억나지는 않아. 나는 내가 거기에 있다는 게 너무 위태로워서 정신이 없었거든. 아빠, 그때 마음이 어땠어? 엄마는 혹시 속으로 우는 것 같지는 않았어?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엄마, 아빠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단 생각을 해.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안 부모의 마음은 어땠는지, 말없이 두 사람의 등을 쓸어내리며 침묵에도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어. 아빠, 사실 나는 아직도 내가 이만큼이나 아프다는 게 낯설어. 몸에 호스를 꽂고 있는데도, 벌써 병이 10년이나 됐는데도 이렇게 매번 마주설 때마다 얼마나 생경한 기분인지 몰라. 그리고 눈물이 나면, '주책이야, 정말'이라고 말하다가도 엉엉 울어버리게 돼. 주책이 아니거든. 나는 아직도 열여덟, 입원하던 날의 나를 껴안고 살거든. 그때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면 걔가 너무 안쓰럽고, 너무 가엽고 그래. 이 마음은 어쩜 이렇게 무뎌지지 않을까? 나는 그때의 나를 마주하면 꼭 그 애에게 져버려, 아빠. 그 애는 항상 나를 울게 해.
아빠, 참기름 김밥 기억나? 그 왜, 내가 조직검사했을 때 점심으로 나온 김밥 말야. 와, 그때 진짜 아빠가 얄미웠는데. 그날은 조직검사가 예정된 날이었어.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시술실에 들어갔어. 차라리 몰랐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이송 침대에 실려서 어두운 시술실로 들어갔어. 진짜 거기가 어두웠는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어. 힘든 기억들은 왠지 어둡게 처리되어버리잖아.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몰라서 긴장한 상태였어. 기계는 심박수가 높다고 계속 울려댔지. 등허리에 마취를 하는데, 누가 억한 심정으로 세게 꼬집는 느낌이었어. 마취만 했는데도 이미 아파서 검사는 어떨지 몸이 덜덜 떨리더라. 그래도 왜, 치과 치료는 마취가 제일 아프고, 그다음엔 나름대로 참을만하잖아. 비슷하길 바라면서 스스로를 달랬어. 의사 선생님은 숨을 들이마시고 참으라고 하더니, 내 등허리에 총 같은 걸 쐈어.
탕.
윽. 아빠, 조직검사가 몸 안에 있는 장기의 조직을 떼어내는 거라며? 난 나중에야 알았어. 총을 쏘면 그 막대에 조직이 조금 걸려 나와서 그걸로 검사를 하는 거래. 세 번 쏜다고 했는데, 첫 번째를 맞고서는 도저히 다음 걸 맞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더라. 난 이미 죽은 것 같았어. 총에 맞으면 사람이 곧잘 죽잖아. 엄청나게 아팠다는 말이야. 그리고 겨우 두 번째를 참아 냈는데 또 한 번이 남았잖아. 그 숨 막히는 시간은 다시 떠올려도 오싹해.
조직검사의 가장 힘든 점이 뭐라고 생각해, 아빠? 총 맞는 거? 그것보다 나는 여덟 시간 동안 꼼짝없이 모래주머니를 베고 누워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 베개도 못 베게 하니까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어. 처음 네 시간까지는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가는 간호사 선생님을 붙잡고, 얼마나 남았는지, 그만하면 안 되는지를 수시로 물어보게 되더라. 지루하고 허리가 아프고 배가 고팠어. 왜, 조직검사 후에는 저녁 먹기 전까지 금식을 해야 하잖아. 근데 그날 점심으로 김밥이 나온 거야. 참기름 냄새가 어찌나 고소한지. 옆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아빠에게 한 번 먹어보고 맛이 어떤지 알려달라고 졸랐잖아. 그러면 좀 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빠는 씩 웃더니 정말 그렇게 해주었어. 근데 그게 너무 약이 올랐어. 내가 시켜놓고서도 말야. 나중에 금식이 풀리고 나서 먹었던 김밥은 정작 아무 맛도 안 났어. 아빠한테 약이 오른 게 민망할 만큼.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며칠 후 내 몸에 대한 결과를 들고 왔어. 루푸스 신염이라고, 아직 신장이 망가진 것은 아닌데, 루푸스가 활성기라서 앞으로 점점 망가질 확률이 높다고 했지. 아빠, 그때부터 나는 내 몸이 나인지, 루푸스인지 끊임없이 헷갈려. 루푸스라는 게 내 몸을 점령한 것만 같아.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야. 그때, 다시는 원래의 내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던 것 같아.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간혹 섞어가며 말했어. 그리곤 대뜸 내게 물었어. 공부 잘하냐고. 나는 선생님이 화제를 전환하려는 건 줄 알고, 나도 이 상황을 얼른 넘어가고 싶어서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했어. 그렇다고. 뻔뻔해 보이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그러자 선생님은 곰곰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어. 그래도, 공부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대학은 나중에 가도 된다고. 몸만 괜찮다면 말야.
나는 절로 눈썹이 찌푸려졌어. 이제 두 달 후면 고3이 되는데, 공부를 그만하라니.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지금껏 노력해온 게 얼만데. 그게 생각나서 너무 분했어. 갑용 선생님의 말과, 자습실에서 바삐 공부하던 나와, 주먹밥 따위로 저녁밥을 때우던 나를 생각했어. 그때를 생각하면 자꾸만 가정법을 들이밀고 싶어져. 이러면 어땠을까, 저러면 어땠을까? 누구에게나 다른 과거를 상상하고 가정해보고 싶은 순간이 있잖아. 물음표가 자꾸만 그려지는 순간 말야. 그때가 변하면 지금의 내 모습도 한 움큼쯤은 바뀔 것만 같은, 그런 순간. 조금 더 빨리 병을 발견했더라면 어땠을까? 주먹밥으로 때우지 않고 건강하게 잘 먹었으면, 새벽 두 시까지 공부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갑용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렇게 자꾸, 조금씩 조금씩 더 먼 과거로 회귀해서 잘못되어 보이는 선택들을 꾸짖게 돼. 아빠, 아빠는 혹시 들었어? 의사 선생님이 얼핏, 미안하다고 하고 나갔잖아.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걸리더라. 그분이 미안할 일이 아닌데. 의사가 미안해할 정도로 나는 아팠던 걸까?
결국 나는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았어. 고3 내내 스테로이드를 11알, 12알씩 먹으면서 공부했지. 말 그대로 버텼다, 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아. 덕분에 나는 서울대에 갔어, 빵빵한 얼굴로. 아빠의 자랑스러운 후배가 되었지. 그런데 이따금 그때 의사 선생님 말을 듣고 공부를 그만두었으면 어땠을지 상상하게 돼. 대학 진학을 포기했더라면 어땠을지. 그러면 지금의 나는 몸에 호스를 안 달고 있었을까? 과연 루푸스와 무사히 작별을 했을까, 아빠? 그렇다면 나는, 그때까지 해왔던 모든 것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아무것도 장담할 수가 없어. 그런데 지금 상황이 밑바닥이라고 느껴져서, 뭐든 돌이켜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야.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열여덟의 나와 화해하게 만들어 주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지도 않지만.
아빠도 혹시, 아직도 그 순간들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있어? 나처럼? 그렇다면 아빠에게도, 이 문장을 선물하고 싶어. 이 문장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에게 물음표를 던지며 잘못을 추궁하는 것을 그만두게 해. 물음표의 단단한 모서리들로 나를 쿡쿡 찌르는 것을 멈추게 해. 지난하고 지독했던 시간을 걸어온 나를 등 뒤에서 커다란 형체로 안아주는 것만 같아. 윤이형의 <님프들>에 나오는 문장이야. 나는 이 문장들을, 이 단어들을 말하면서 열여덟의 나를 계속 껴안곤 해. 그 애가 덜 슬플 때까지, 울음을 멈출 때까지. 아빠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
"약속해, 어떤 가정법도 사용하지 않기로.
그때 무언가를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들로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로 해. 가정법은 감옥이야. 그걸로는 어디에도 닿을 수가 없어. 나는 현재를 살 거야. 과거의 형벌을, 잘못 내린 선택의 총합을 살지 않을 거야. 기억이라는 보석 속에 갇혀서 빛나는 과거의 잔여물을 되새김질만 하지도 않을 거야. 오직 한 번뿐인 현재를 살 거야, 지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