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하루
평화로웠다.
그런 하루였다.
영국에 YMS 비자를 받아 왔고, 원하던 직장도 얻었다. 내 일은 요양병원에서 입소노인을 돌보는 요양보호사였다. 직접적으로 일의 보람을 성취할 수 있는 일. 한국보다 일의 강도면에서도 약하고, 워라벨이 더 잘 유지되는 계약과 환경. 한국 근무지였던 회계부 등 사무실 업무는 보람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힘들었다. 월급이 위안일 뿐.
돌봄은 나랑 딱 맞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일이었다. 취직한 지 6개월쯤 지나… 적응도 끝났고 좋은 동료들과 따뜻한 어르신들과 보내는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한국에서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삼 남매 중 둘째로 잘 컸다. 힘들다고 주변에 찡찡거릴 때면 “넌 긍정적이니까 괜찮을 거야!”라며 다들 큰 걱정 안 하는 이미지가 나였다.
그날은 영국의 흐릿한 겨울 날씨 때문이었을까?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밤거리에 사람은 거의 없었고, 높은 가로등이 희미하게 인도를 비추고 있었으며, 바람은 적당히 찼다. 충동적으로 위험한 차도와 맞닿은 인도의 끝 엣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오죽하면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일이 늦둥이 막내 동생이 태어난 것이었을까. 마마걸로 살다가 십년만에 엄마의 사랑을 동생에게 뺏겼다는 게 생애 가장 힘들었던 감정이었다. 그때도 학원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큰 길 대신 항상 어두운 골목길을 골랐다. 스스럼없이 다니며 가끔 침을 꼴딱 삼키고 등골 오싹해지는 순간을 즐겼다. 유일한 일탈이자 위로였다. 밤 골목길엔 사람 자체가 잘 없는데, 불량 청소년들이나 술 취한 아저씨들이 이따금 나타나 시비를 걸었다. 당시엔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스스로 죽을 용기는 없없지만, 당장 죽음이 닥친다고 생각해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 중2병 이후로 근 이십년만에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번엔 딱히 죽고 싶었던 것도, 삶이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인도의 가운데에서 걷다가, 차도 뒤에서 큰 트럭이 달리는 ‘부앙’ 소리에 놀라 덜컥 인도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문득 두렵지가 않아서, 그 부앙 소리에 소름이 돋고 오싹한 것이 나쁘지 않아서, 뒤돌아보지 않은채 인도 끝 차선과 맞닿아 있는 보도블록엣지로 발걸음을 옮겨 걸었을 뿐이었다. 내가 위험해 보였는지 차들이 등 뒤로 커다란 클락션을 울리며 내게 가까워졌다가 서서히 멀어졌다. 더 희열이 휘감았다.
평소 같았으면 인도의 제일 안쪽으로 자리부터 옮겼을 것이다. 부앙 소리에 심장이 떨리고 클락션 소리에 화들짝 놀랐을 테고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불안함에 빨리 걸었을 텐데..
유독 그날은 그 불안함, 오싹함이 편안했다.
그 커다란 엔진의 부앙 소리와 빵 하는 클락션 소리에, 금방이라도 나를 칠 것 같은 그 거리감이 느껴져서 가슴이 철렁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날 하루 이십 분. 딱 그 정도, 차도와 맞닿은 인도의 끝 엣지에서 천천히 걸었다.
스스로 죽을 용기는 없고, 누가 혹시 나를 죽여준다면 억울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 어느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