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 [시즌1] 6장. 쉴 수 없게 설계된 자유

참여에 강박을 느끼지 않는 사회는 가능한가

by 밀리폭

1. 멈추지 않는 하루의 기본값


이미 식별된 사회까지의 이야기는

같은 날, 숨이 가쁠 만큼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그날 카페에 먼저 와 있던 건

이한결과 나, 현미리였다.


이한결은 노트북을 펼친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나는 휴대폰 화면을 조용히 넘기고 있었다.


출석 체크 완료.

광고 시청.

오늘의 퀴즈 정답.

영어 단어 다섯 개 암기.

걸음 수 10,000보 달성.


요즘 앱테크는

포인트에 머물지 않는다.

현금을 주거나,

포인트를 현금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다.

조금 귀찮을 뿐, 출금도 가능하다.


나는 화면을 넘기다

다른 알림 하나를 확인했다.


‘리뷰 작성 시 16,200원 지급.’



2. 소비가 끝난 뒤에도 남는 참여


며칠 전, 고민하던 헤드셋을 하나 샀다.

요즘은 구입 금액에 비례해

포인트를 주니까

이런 고가의 전자제품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사진을 찍고,

텍스트를 쓰고,

별점을 남겼다.


소비는 끝났지만

참여는 한동안 남아 있었다.


이한결이 내 휴대폰을 힐끗 보며 말했다.


“바쁘네.

뭘 그렇게 하는 게 많아.

나도 출석 체크하는 거 하나 있는데,

보상이 커.

이것도 경쟁이 심한가 봐.

돈을 막 뿌리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TV에서

앱테크로 한 달에 30만 원 벌었다는

짠테크 고수가 나왔대.”

“나 코인 지금 박살났잖아.

이거라도 챙겨야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어?

집중하는 게 게임 같네.”


그 말은 그저 요즘의 상식 같았다.



3. 쉬지 못하는 사람들


이한결의 노트북 화면에는

차트가 떠 있었다.


초록과 빨강,

짧은 파동과 긴 파동.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좋겠다.”


“뭐가?”


“투자 잘하는 거.

역시 능력자야.”

“요즘 적금 들면 바보 소리 듣잖아.

노동만 하면 뒤처지고,

돈이 돈을 벌게 해야

정상인 사회니까.”


이한결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이젠 익숙해진 거야.

공부도 많이 했고,

그만두면 아깝잖아.”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한 번 보고,

일하다가 한 번씩 보고,

자기 전에 또 보고.”

“리스크 관리하는 거지.

안 보면 괜히 불안해서.”


그는

자신이 쉬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내가 쫓기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그저

요즘은 다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4. 선택처럼 보이는 강제


그때 카페 문이 열렸다.

허미래였다.


차트를 띄운 노트북,

내 손의 휴대폰,

열려 있는 앱 화면들.


허미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미 시작했네요.”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요즘은

뭘 안 하면

뒤처진 기분이 드나요?”


“앱테크요.”


“투자요.”


허미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소득이 없는 사회는

보상을 흉내 내는 장치들로

사람을 붙잡아 두기 시작합니다.”

“이건 개인의 욕심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에요.”

“참여하지 않으면

손해 보게 설계된 사회에서는

참여는 선택처럼 보일 뿐이죠.”

“투자는 자기계발이 되었고,

불참은 무능이나 게으름으로 해석됩니다.”

“선택은 자유였지만,

불참은 점점 비정상이 되었죠.”



5. 시간의 소유권을 뺏긴, 항상 대기중인 삶


허미래는 우리가 쥔 휴대폰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여기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 사회는
돈뿐 아니라
시간을 다루는 방식도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일을 ‘하는 시간’보다
항상 대기하는 시간 속에서 더 많이 살아갑니다.”

“알림이 오면 반응해야 하고,
호출이 뜨면 움직여야 하고,
평가가 남으면 다음 기회를 위해
다시 접속해야 하는 구조.”

“플랫폼 노동은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사람의 시간을 점유합니다.”

“출근 시간은 없지만,
언제든 응답할 수 있어야 하는 상태가
기본값이 되죠.”

“우리는
일하지 않는 순간에도
완전히 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즘의 피로는
노동 때문이 아니라,

항상 준비된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전제
그 자체에서 옵니다.”



6. 풍요가 아니라 고요였던 순간


허미래는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기본소득이 시작되기 전 사회에서

연봉이 크게 오른 적이 있었어요.”

“그때 처음 느낀 건

풍요가 아니라

고요였어요.”

“처음으로 세일을 보지 않고

내가 진짜 원하는 물건을

망설이지 않고 골랐죠.”


허미래는 겸연쩍어하며 잠시 망설였다.


“사실 그건 만두였는데,

바로 옆에서

다른 브랜드가 1+1을 하고 있었는데도,

세일을 거의 하지 않아 자주 포기하던,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만두를 집었어요.”

“그렇게 산 건

처음이었어요.”

“비합리적인 소비 같았는데,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어요.”


그녀는 잠시 웃었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제주도 비행기 표를 샀어요.”


“출발 석 달 전부터 가격을 보기 시작했고,

언제 사야 가장 싼지,

요일별로 어떻게 달라지는지,

플랫폼을 몇 개나 오가면서

한 달 넘게 고민했죠.”

“화요일 오전에 예약해서

목요일 출발하는 비행기를 골랐어요.”

“그땐

내가 정말

똑똑한 소비를 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출발을 앞두고

비 예보가 떴고,

관광하기 좋지 않은 상황이 되자

항공권 가격은

더 떨어졌어요.”

“이해는 됐어요.

상황이 바뀌면

가격이 반영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예전 같았으면

알고 있었어도

분명 화가 났을 거예요.”

“돈 때문이 아니라,

합리적이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한순간에

허무해진 느낌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날은

화가 나지 않았어요.”

“이해해서도 아니고,

참을 수 있어서도 아니었어요.”

“계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마음의 바닥이

이미 생겨 있었거든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며

살고 있었다는 걸요.”

“부는

사치를 허락하는 힘이 아니라,

계산을 줄여주는 힘일 수도 있겠구나.”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자산가들은

어떤 삶의 내부 소음을

치우고 살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전환)


허미래의 말이 끝나자

테이블 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괜히 컵을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얘기 들으니까,

미국에서 살 때 있었던

비슷한 게 떠오르네요.”



7. 돈이 내 영혼을 잠식한 것 같던 그 순간


“칸쿤 여행이었어요.”

“비행기랑 호텔이 다 포함된

패키지였는데,

환불 불가였어요.”

“취소 가능한 상품은

너무 비싸서

선택지라고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허미래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플랫폼 화면을 보다가

취소 버튼을

실수로 눌렀어요.”

“다시 확인하는 창도 없이

바로 취소 처리됐고요.”


이한결이 작게 말했다.


“…그건 좀.”


“1분도 안 돼서

고객센터에 전화했어요.

실수라고,

돌려달라고요.”

“근데

안 된대요.”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계속했다.


“이주 정도를

매일 연락했어요.”

“항공권은

겨우 크레딧으로 돌려받았는데,

호텔은

끝까지 안 된대요.”

“플랫폼은

호텔 정책이라 개입 못 한다고 하고,

호텔은

정책상 불가라는 말만

되풀이했고요.”

“아무도

내 얘기를

듣고 있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허미래가 조용히 말했다.


“금액이 컸겠네요.”


“네.

너무 컸어요.”

“그건

시간이나 노력의 문제를 넘어섰어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 순간,

고작 몇 천 달러 때문에

그냥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어요.”

“그리고

스스로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어요.”

“1년에 한 번 있는 긴 휴가였고,

정말 오래 기다렸는데…

내가 다 망쳐버린 것 같아서요.”

“결국

그냥 안 갔어요.”

“돈 때문이 아니라,

자책하느라.”


이한결이 나를 보며 말했다.


“진짜로?”


“응.

진짜로.”

“돈이 아까워서라기보다…”


나는 말을 고르다

그냥 그대로 말했다.


“그 돈 하나로

내 삶이

너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게

갑자기

너무 분명해져서...”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허미래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쉬지 못하는 거예요.”

“그 금액 때문이 아니라,

그 금액을 감당할

심리적인 바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게 바로
기본소득이 없는 사회에서
반복되는 붕괴 방식이었죠.”
“돈이 문제가 아니라,
회복할 수 있는 바닥이 없다는 사실을
개인이 혼자 감당하게 되는 구조예요.”



8. 멈출 수 있는 바닥이 생긴 사회


허미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보상이 싫어졌어요.”

“보상은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사람을 계속 움직이게 하거든요.”


참여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구조,

투자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감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설명해야 하는 상태.


선택은 많았지만

쉬는 선택은 없었다.


투자는 취미가 되었고,

취미는 24시간 근무가 되었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본소득 사회에서

가장 좋았던 건

돈이 아니었어요.”


“멈춰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감각,

쉴 수 있는 바닥이 생겼다는

안도였죠.”

“기본소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어나는 몫’을

처음으로

모두에게 주었어요.”

“국민이 국가의 발전에

함께 배팅했고,

국가가 가진 돈이 돈을 벌어

이자를 배당받는 느낌.

실제로는 증세였지만요.”

“자본가들이

자본으로 불리는 속도에 비하면

아주 적은 돈이었지만,

모두에게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를

처음으로 알게 하는 시작이었어요.”

“그게...

진짜 자유였어요.”


증언 6. 기본소득이 도입된 이후,

사람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감각,

언제든 손해 볼 수 있다는 불안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멈추면 호구가 될 것 같던 상태가

더 이상 사회의 기본값이 아니게 되었다.



9. 그래서 남은 질문


나는 오늘도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투자로 성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주식도, 코인도, 앱테크도 놓지 못했던 이유는

수익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선택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멈추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그래서 이 질문이 남는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안해지지 않는 하루가 가능하다면,

그날 우리는

정말로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