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서 기적 같은 나날들 Ep.4
우선 이 글은 외할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말하는 글이다.
내가 처음으로 남녀불평등에 불만을 가진 건 10살 무렵이었다. 명절이면 셀 수도 없는 산해진미를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사이좋게 나눠 먹는 선녀 할머니 집과 달리 외할머니 집에서는 가짓수도 얼마 없는데 굳이 상을 쪼개 앉았다. 6살이나 어린 사촌 동생 녀석이 남자 어른들 틈에 껴서 양반 다리를 하고 외할머니가 얹어 주는 소고기 산적을 먹었다면 나와 내 동생은 외할머니의 며느리들 사이에서 ‘누가누가 더 빨리 먹나’ 내기하듯 명절 밥상을 해치우곤 했다. 이전에는 맛없는 음식을 먹기 싫어서 외할머니 집에 방문하는 걸 거부했다면 머리가 조금 굵어진 이후에는 그 부당함이 싫어서 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엄마 속상하지 않게 속으로만.
언젠가 이런 적도 있다. 할머니 셋이 모이면 무조건 하고야 만다는 ‘손주 자랑 타임’에 저만치 내 뒤에 있던 사촌 동생 녀석을 앞으로 쭉 당겨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고 가는 과정에서 사촌 동생이 딸려온 거리만큼 나는 밀려 날 수밖에 없었고 그날은 도저히 못 참고 엄마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돌아오는 엄마 대답은 “난 그 설움을 크는 내내 겪었어. 어쩌겠니? 전 여사잖아. (엄마가 외할머니를 부르는 호칭이다) 그냥 그러려니 해.” 그날 나는 차 타고 오는 내내 속으로 진짜 할머니는 선녀 밖에 없다고 되뇌었다.
또 화투를 칠 때면 얼마나 서러운 지 모른다. 누구보다 화투에 진심인 외할머니는 속전속결 스타일이라, 패를 빨리 안 던지면 노인정에서 왔냐며 성화를 낸다. 유독 아빠와 내가 칠 때 다그치는 건 분명 기분 탓이 아니다.
그래도 외할머니의 편향적인 사랑이 다행이라고 여겨질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만둣국을 먹는 날이다. 만두피와 소의 비율은 7:3, 어른 남자 손바닥만 한 크기에 하나만 담아도 양 끝이 삐죽 튀어나오는 외할머니표 만두. 외할머니의 보물 1호 치과 삼촌을 비롯해 우리 아빠, 사촌 녀석 그릇엔 항상 3개 이상이 쌓여 있었다. 행여나 빨리 해치우면 하나 더 얹어 줄까 싶어 나와 내 동생은 숨죽여 병아리 코딱지만큼 쪼개 먹었는데, 오늘따라 만두가 더 맛있다며 외할머니를 칭송하는 그들을 보면 존경심마저 들곤 했다.
몇 해전부터 외할머니 밥상에는 더 이상 만둣국이 올라오지 않는다. 만둣국 자리에는 무와 파가 단출하게 이인조를 이룬 말간 챗국이, 초록색 완두콩 밥 대신 조가 적당히 섞인 흰쌀 밥이, 심심한 음식 사이에서 눈치껏 간잽이 역할을 하던 배추김치 대신 젓갈 향이 코를 찌르는 시판 김치가 올라온다. 아, 본래의 색감과 식감을 영영 잃어버린 듯한 소고기 산적은 여전하다. 이제는 정성을 다하고 싶어도 다할 수 없는 외할머니의 노쇠한 밥상을 보면 맛이고, 불평등이고 뭐고 어딘가 쓸쓸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노쇠한 밥상을 온 힘을 다해 먹는다. 얼마 전에는 문득 외할머니의 기상천외한 만두가 생각나서 안부 전화를 드렸다.
- 누구요?
- 저 예진이에요.
- 어어 예진이나? 잘지내나?
- 네네 할머니는 잘 지내시죠? 아프신 데는 없구요?
- 어어 잘 지내지. 아파도 뭐 어쩌겠나. 잘 지내야지.
- 네 건강관리 잘하세요.
- 어어 신랑은 잘 있고? 즐겁게 살아야 된다.
- 네 할머니도요.
- 어어 그래 끊는다. 전화해줘서 고맙다.
녹음기를 튼 것처럼 매번 같은 통화 내용에 하도 속전속결로 끊어서 그 쿨함에 웃음이 피식 나지만, ‘즐겁게 살아야 된다.’는 그 말은 내 눈물샘에 콕 박혀 기어이 코 끝을 찡하게 한다. 진짜 할머니는 선녀 밖에 없다고 외치던 내가 이제는 외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즐겁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전 여사가 남은 생을 화투 칠 때처럼 즐겁게 보내시길 바라고 또 바란다.
2022.09.16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