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의대를 자퇴할 생각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의대를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의대에 처음 입학할 때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처음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된 데에는 시골의사 박경철의 영향이 컸다. 책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을 읽고는 참 멋진 의사라는 생각을 했다. 시골에서 환자들과 부대끼면서 살아가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모습을 보며 ‘이런 것이 의사의 모습이 아닐까?’라고 상상해 보았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는 ‘피안성’이라고 해서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가 가장 인기가 높았다. 사실 피부과와 성형외과는 돈을 잘 벌긴 하지만 미용인에 해당하지, 아픈 사람을 고치는 의사는 아니라고 여겼다. (물론 그분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런데 시골의사는 환자들과 함께하며, 그들과 있었던 일들을 담백한 글로 적어 책을 내는 저자였다. 수험생일 때는 의사이면서 작가이기도 한 그가 참 멋있어 보였다.
나중에 의대에 간 후에 이국종 교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이분은 너무나 존경스러운 분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 이런 의사가 될 수 있을까?’라고 하면 정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감히 따라할 수 없을 만큼 그는 훌륭한 의사이다. 존경하기는 하지만 감히 롤모델로 삼을 수는 없는 분이었다.
사실 의대 합격 후 의사로서의 진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버지였다. 나는 수능을 세 번이나 보고 의대를 갔다. (사실 두 번째 수능에 합격했지만, 서울권 의대를 가겠다고 수능을 한 번 더 봤기 때문에 삼수가 된다) 비록 세 번째 수능에서 원하는 결과는 못 얻었지만, 원 없이 수험 생활을 해봤다. 그래서 남은 미련은 없었다.
지방에 있는 캠퍼스에 내려가기 전에, 아버지는 나의 진로에 대해 상담해 주었다. 몇 시간 동안의 길었던 대화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빠는 네가 기왕이면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돈도 많이 버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보다 명예로운 일을 항상 먼저 생각해라. 네가 받은 것들을 사회에 돌려주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어라. 의대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외국어를 익혀두면 좋겠다. 영어는 기본으로 하고 제2, 제3 외국어도 하면 좋겠다. 의대 졸업 후에 가급적 빨리 공중보건의를 가라. 그리고 놀지 말고 USMLE (미국 의사시험) 준비를 해서 제대하고 바로 미국 의사면허증도 딸 수 있도록 해라. 미국에 유학을 가서 더 넓은 세상도 보고, 가능하다면 미국에서 경험도 쌓고 돌아와라. 돈이 좀 들겠지만 네가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경제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쌓은 경력을 활용해서 국제기구, WHO 등에서 일하면서 전 세계를 무대로, 세상의 많은 아픈 사람들을 돕고 사는 의사가 되면 좋겠다.
그때 아빠가 참 멋있어 보였다.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뭔가 가슴 찡하는 감동을 받았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는 일본어 공부를 하고, 나중에는 중국어 공부도 틈틈이 했다. 미국 의사 시험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의사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사람 한 명을 의사로 만들려면 엄청난 교육비가 들어간다. 게다가 나는 지방대를 다녔기에 생활비도 추가로 들었다. 최소한 10~15년의 시간도 필요하다. 그렇게 투자해서 아들이 돈 잘 버는 의사가 되면 좋으실 것 같은데도, 돈만 벌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는 의사가 되라는 것이었다. 정말 나를 위한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아버지가 끼친 더 중요한 영향이 있다. 그것은 그 당시 나의 생각에 큰 축 하나를 만들어 줬다는 것이다. 이제 막 의대에 합격했으니, 벌써 의사가 된 것만 같고 애처럼 신이 나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의사는 돈 걱정 안 하고 잘 먹고 잘 산다, 외제 차 뽑고 좋은 집 산다, 이런 것들이 의사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없었으면 나도 아마 "의사는 돈 잘 버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갖고 의대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하면 더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의대 1, 2학년 때 많이 놀기도 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항상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