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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Sep 22. 2024

내 마음의 산티아고 3

꽃 중년, 산티아고 카미노 300Km 14일간의 일기

(D-1) 출발지 레온에서 카미노 길동무 만들기에 성공하다.


  시차 때문에 몇 차례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으나 비교적 잠을 잘 잔 편이다. 준렬 군 나가는 것을 환송하고 나도 준렬 군의 앞날에 행운을 빌려고 했는데 준렬 군이 먼저 나에게 포옹 제스처를 취해 온다. 나는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그는 나의 카미노 성공을 기원해 준다. 

   숙소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노부부와 같이 나와서 전철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노교수부부는 내가 염려되어 전철 타는 법, 갈아타는 법, 버스터미널 가는 방법 등을 자세히 일러 준다. 그리고 카미노 성공을 기원해 준다. 

  지하철에서 보는 마드리드 시민의 표정은 어둡고 경제 침체의 여파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지하철 환승 후 버스터미널에 도착, 여러 차례 물어서 정확히 내가 예약한 버스에 탑승 성공. 마침 내 옆 자리는 비어서 목베개를 허리에 대고 앉으니 무척 편안하게 느껴진다. 42유로짜리 우등고속이라 그런지 좌석이 넓고 간단한 음식도 제공받을 예정이다. 차창 밖의 날씨는 계속 흐리다. 우리나라의 겨울 하늘과 겨울 햇볕은 정말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드리드, 즉 스페인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쭉 관통해 올라가고 있다. 세계지도에서 유럽을, 그중에서 스페인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중에 점 하나를 찍고 그 점 위에 놓인 나를 상상한다. 행복하다. 왕복 2차선의 도로가 쭉 뻗어 있다. 좌우로는 넓은 평원, 올리브 밭, 부럽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산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두꺼운 구름층, 겁이 난다. 나의 카미노가 무사해야 할 텐데……

   방목하는 말과 소도 보인다. 가끔 작은 마을도 보인다. 집들은 자그마하고, 주로 평원에 단층주택들이다. 그림처럼 평화롭다. 갑자기 돈의 상징, 야만의 상징, 자연 수탈의 상징인 우리나라의 아파트숲이 미워진다.

  안내 방송이 나온다. 내리는 곳을 안내하는가 했더니 카페와 초코라테라는 단어가 들린다. 아까는 사탕과 이어폰을 주더니 이제는 음료를 주나 보다. 싹싹하고 바지런한 안내양이 계속 버스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앞 좌석 등받이에 붙은 버스 미니 식탁에 종이 식탁보와 냅킨까지 깔고 작은 카스텔라와  초코라테를 놓아준다. 따뜻한 차가 들어가니 속이 따뜻하고 편해진다. “one more please"라고 하여 한 잔 더 얻어먹는다. 직선 도로에 그리고 좌우 드넓은 평원에 햇볕이 비친다. 나의 마음도 가벼워진다. 전날 밤 카미노를 마친 사람들의 이야기 중, 하루에 직속구로 때리는 눈과 비와 우박과 햇볕을 모두 경험한 날이 있다더니 진짜 그런가 보다. 

  두고 온 남편이나 둘째 딸 한울에게 미안한 마음은 차차 식어간다. 나의 신년 구상을 하게 된다. 원치 않지만 OO부장을 하게 될까? 개정에 깊이 관여한 새로운 학생생활규정은 문제없이 잘 시행될까? 과년도에 끈질기게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던 아이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를 시험할까? 이 아이들을 무엇으로 유인하고 무엇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또 자신을 존중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어제 단 하루 만난 준렬 군과 교수 부부는 나를 단번에 교사라고 알아보던데, 나의 이러한 전형성이 우리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장애나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왜 교사로 낙인찍히게 되었을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고 싶은 내 마음과 관계없이, 나는 왜 속박받는 영혼의 소유자가 되었을까? 그래서 내 가족에게도 여러 종류의 속박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암울모드로 전환된다.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 양 옆의 드넓은 평원이 부럽다.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내 조국 한반도도 축복받은 땅인데 우리나라에는 없는 넓은 평원이 부러운 것은 인지상정이겠지? 지평선이 보이는 듯도 하다. 

  카미노 표시(조가비 모양)를 두 개째 보았다.

  이 길도 산티아고 순례길의 하나이구나. 

  카미노를 무사히 끝내고 3, 4일의 여유가 생기면 어디로 여행을 하는 것이 좋을까? 내 큰 딸 샛별은 대학 때 휴학하면서까지 스페인을 여행하던데, 바르셀로나에는 한 달씩 머물다 와서도,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르셀로나의 골목이 그리워진다고 하던데, 그 무엇이 내 딸을 그렇게 사로잡았을까? 내 딸의 나와는 다른 문화 수준이 은근히 부러워진다.    

  아침에 잠깐 시간이 나서 모로코 한인 민박과 포르투갈의 리스본 한인 민박 연락처를 알아 왔는데, 가게 될지는 모르겠다. 

  또 안내 방송이 나온다. 또 음식 제공인데, 말을 못 알아들어 또 초코라테를 시켰다. 지름 8cm가량의 얇은 햄과 스틱형 건빵, 초코라테. 그런데 옆에 보니 캔맥주 비슷한 것을 받은 사람도 있다. 안내양을 불러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Beer?라고 했더니 Yes.라고 답한 후 갖다 준다. Gracias!(감사합니다.)

  그러니 오늘 오전 마신 음료만 소형 맥주 1캔, 초코라테 3잔, 화장실은? 버스에 화장실도 있는지 몇 사람이 버스 가운데 부분으로 걸어가는 것도 보인다. 나는 최대한 참기로 한다. 

  9시에 출발한 버스는 지금 12시 반인데 계속 질주한다. IC나 곡선도로는 어쩌다 나타난다. 출발 후 한 시간가량만 날씨가 흐리더니 계속 햇볕이 쨍쨍하다. 나의 카미노가 무사하길 나의 신께 기도한다. 무사히 카미노를 마친 후 이웃에 봉사하고 가족을 더 사랑하리라 다짐한다. 오늘 아침 헤어진 준렬 군, 교수부부, 나의 카미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내준 진정 어린 성원에 감사한다.  

  또 준다, 사탕.

  모든 것을 인간에게 돌려주고 밑둥치만 남은 논과, 포도주로 인간의 심신을 위로해 주고 남은 앙상한 가지의 포도나무밭이 넓게 펼쳐진다. 태양광 집전판, 풍력발전기, 대형들판물뿌리개 등이 보인다. 직선으로 뻗은 도로가 넓은 평원에 4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여전히 부러운 마음이 든다. 

  도로표지판에 오늘 목적지 Leon이라는 지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 좌석 의자 TV에는 24시간 뉴스 채널이 켜져 있고 정치인들 모습이 보인다. 하나같이 얼굴에 기름이 번지르르하다. 내 남편이 정치하지 않고 있음에 감사한다. 여자 아나운서는 계속 지껄인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신영복 교수의 이런 말을 오늘 아침 여행 안내서에서 보았다. 인디언들은 말로 질주한 후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고 기다린다고 한다. 아직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내 몸에 담으려고. 우리는 너무 빨리 질주한 나머지 영혼이 나와는 많이 동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원히 제 집인 자기 몸에 깃들이지 못할까 두렵다. 

 안내방송. 못 알아듣는다. 마지막 단어는 레온. 

 목적지 레온에 하차 성공. 시내 방향을 물어서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Santa Maria 알베르게(숙소)에 찾아 들어가 첫 스탬프를 받는다. 카미노 중에는 숙소나 카페 등에서 순례자 카드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날짜와 위치가 표시된 이 스탬프로 산티아고 대성당 옆 순례자 사무실에서 산티아고 순례 증명을 받게 된다. 

  2층 침대가 10개 이상인 이 대형 공립 알베르게에는 가방만 몇 개 있고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레온 시내를 혼자 관광하고 들어오니 아일랜드 남자가 물어온다. What's your name? 자기 이름은 제임스. 프랑스 여인 두 명(나데즈와 미즈)이 나에게 아는 체를 한다. 왜 카미노 하느냐? 이름은 뭐냐? 등. 고맙다. 이들은 나의 나이, 직업, 결혼 여부 이런 것 묻지 않는다. 그냥 이름 부른다. 나이로는 내가 부모벌이지만 그냥 이름만 부른다. 한국인이 카미노 상에 많다는 이야기 등을 나눈다. 무척 발랄하다. 아직 시작도 하기 전에 두려움에 쌓여 있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Would you mind going with me? I have no friend."  "No." 란다. 같이 가도 된단다. 야호! 성공이야. 

  교실 1.5칸 정도의 이 알베르게에는 2층 침대가 놓인 공간 옆에 남녀 구분된 욕실과 화장실이 있다. 욕실 안쪽 나무로 된 화장실 문에 여러 언어의 낙서가 있다. 한국어 낙서도 보인다. “보고 싶다. 상희야, 행복하게 잘 살아.”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카미노에 올랐을 우리나라 청년의 생각에 마음이 짠하다. 

  이 알베르게에 오늘 투숙한 인원은 모두 10명가량. 밤 9시 넘어 도착한 네덜란드 젊은 여자도 있다. 오늘 40Km 걸었단다. 서양 여자들 신체 사이즈가 나랑 비교가 안 된다. 

  잠시 둘러본 레온 시내. 레온은 옛 로마 주둔지였고 현재 인구가 14만 명, 관광객이 많고 축제가 많이 열린다고 하는데 나의 방문 기간과는 무관. 바람이 세고 추운 날씨다. 나이 든 여자들은 두껍고 긴 모피코트를 많이 입고 있었고, 롱부츠 신은 젊은 여자들도 많이 보였다. 상가가 많이 발달해 있었는데 모두 대폭 할인 행사 중이었고, 물가는 비교적 싼 것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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