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초 Sep 23. 2024

내 마음의 산티아고 4

꽃 중년, 산티아고 카미노 300Km 14일간의 일기

 죽기 아니면 살기로 쫓아간 카미노 제1일,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할 뻔하다.


2월 11일 화요일. 눈. 맑음. 

카미노 제1일. 레온에서 오르비고까지 33Km


 한국과의 시차 8시간을 극복해 가는 중이다. 4시간 정도는 극복이 된 것 같다. 어제도 오늘도 여기 시간으로 새벽 1시에 일어났다. 4시간을 누워서 mp3로 성가와 영어 듣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리셉션 사무실 공간에 나와서 나의 여행 책자도 읽고 일기도 쓴다. 비치된 방명록을 보니 여기를 다녀간 많은 순례객의 다양한 다짐을 볼 수 있다. 내가 예상하고 준비했던 것보다 카미노 지역 온도가 많이 낮은 것이 큰 어려움이 될 것이나, 준렬 군이 준 항공기 모포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본격 알베르게 1일 차인데 이곳은 다른 곳보다 야간 난방이 잘 되고 또 호스피탈레로가 친절한 곳이라 한다.

  마드리드나 이곳의 알베르게를 보니 노후에 손자 돌보지 않아도 되고 외로워지면 이런 호스텔 하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방이나 식사는 간단히 해 놓아도 방문객이 충분히 감사히 여기고 또 국내외 여행객들의 다양한 이야기로 노후가 재미있을 것 같다. 모쪼록 건강하게 살고 싶다. 

  나는 알베르게(숙소를 이곳에서 부르는 말)에서 위아래 모직 내의 입고 또 두꺼운 겉옷도 입고 있는데, 아일랜드인 제임스는 팬티 같은 반바지 하나 입고 맨발로 돌아다닌다. 털이 숭숭 난 종아리 다 드러내 놓고. 저 자식들 평소에 뭘 많이 처먹어 저렇게 튼튼하냐. 저런 자식들 육식 때문에 지구환경이 더럽혀지는 거야. 

  오전 7:30 알베르게 제공의 간단한 식사 후, 8:30 출발. 물통에 물을 채우려는데 호스피탈레로가 서툰 영어로 창문을 열고, 현재 눈이 내리고 있으니 특별히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리고 카미노 상의 식수대가 얼어 있을 수가 있으니 아침마다 물을 꼭 받아 가라고 한다.(카미노 상에는 여러 모양의 식수대가 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키 작은 동양 여자가 특별히 걱정되나 보다. 식사를 같이 하면서 오늘 카미노 친구를 다시 확인했다. 아일랜드인 제임스는 생각할 것이 많다며 나와의 동행을 거부했다. 프랑스 아가씨 나데즈와 미즈. 이들은 어제 나를 만나자마자 이름을 물어오더니, 정후’, 어떤 때는 ‘생유’ 이렇게 발음하면서, 한국이름 어렵다고 하면서 계속 이름 불러 준다. 나는 이들과 나의 역사적인 카미노를 함께 시작할 것이다. 

  배낭 커버를 씌우고, 미리 준비해 간 몽벨 우의를 배낭 위에 입고, 양손에 스틱을 짚어가며 조심조심 눈길을 걸어간다. 온도가 그리 낮지는 않아서 길이 얼거나 미끄럽지는 않지만 하여튼 첫날부터 악천후다. 프랑스 여인은 가끔 나를 돌아본다. “OK” 답을 듣고 안심한다. 한 시간도 안 되어 나의 얇은 장갑은 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젖어 버렸고, 바지도 젖어들고. 내가 준비해 간 우의로는 옷이나 배낭이나 모두 눈비를 막는데 역부족이다. 슈퍼마켓이 나오길래,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대형 판초를 하나 더 사기로 한다. 이 프랑스 여인들은 밖에서 기다리는데, 걱정이 된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까 봐. 다행히 기다리고 있다. 새로 산 판초를 입고 다시 출발. 그러나 판초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바지로 떨어지고 그 물은 다시 신발 안으로 들어가 25만 원짜리 K2 방수 등산화도 힘을 쓰지 못한다. 계속 걷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 간 스패츠(바지 젖는 것을 방지하는 덧바지)를 배낭에서 꺼내어 착용할 시간도 없다. 자꾸 멈추자고 하면 나를 버리고 갈까 봐. 

  이들 중 한 명이 끽연을 하길래 나도 스패츠 착용하고, 비로소 물을 마신다. 나데즈에게 물 줄까 물었더니 아니란다. 그러면서 둘은 미즈의 가슴께에 있는 손가락 굵기의 호스를 빤다. 아니 이것들이 마약 하는 것 아냐? 마약 하러 카미노 하냐? 이 미친  X들아. 하는 생각으로 걷는다. 아니 그럴 수도 있겠지로 생각이 바뀐다.      


 온몸으로 눈을 맞으며 찻길도 건너가며 전진 또 전진. 11시 30분 점심 먹으러 들어갈 때까지 쉰 시간은 모두 10분 이내. 저들은 뭘 처먹어 저렇게 잘 걷냐?

  산 미겔에 이르러 점심 식사 직전, 지나는 길에 어떤 건물에서 한 남자가 창문을 열고 크래커와 캔디를 우리에게 준다. 나를 보더니 귤 두 개를 더 준다. 주는 사람도 즐겁고 받는 사람도 즐거운 일이다.

  3시간 만에 산 미겔의 레스토랑에 도착. 생각한다고 혼자 떠난 제임스가 식사를 끝냈는지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얼마나 반가운지. 레스토랑은 순례길에 있기 때문인지 순례자를 위한 배려가 눈물겨울 정도다. 벽난로 근처에 젖은 옷과 신발, 양말까지 말릴 수 있게 해 준다. 난로 옆에서 10유로짜리 메뉴를 시킨다. 수프와 돼지고기 들어간 메인디쉬와 오렌지 후식까지. 음료는 물인지 와인인지 묻는다. 물론 와인이지. 두 프랑스 여인은 언제 준비했는지 플라스틱 통에 담긴 참치볶음밥 같은 것을 꺼내어 같이 먹는다. 나는 메인 디쉬와 후식을 나누어 준다. 알뜰하다. 내 딸 샛별도 이렇게 알뜰하게 유럽여행했을 것이다. 배도 채우고 몸도 녹이고 사진 한 컷 찍어 큰딸 작은 딸에게 보내고 다시 배낭을 짊어진다. 1시 30분.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제임스는 또 먼저 출발. 그 사이 눈은 그쳐 있었다. 나의 첫 카미노를 시험하는 눈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제임스는 네 번째 카미노라고 한다. 카미노 표시인 조가비 모양 따라가는 길이지만 프랑스 여인들도 오늘 두 번 정도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나 혼자는 애당초 어려운 일이었다. 오전 눈보라 속에서 시작할 때는 오르막과 도로 옆을 지나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 햇볕 아래에서는 드넓은 평원을 두어 시간 걸었을 것이다. 평원을 하염없이 걷는 경험,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 그녀들이 나를 부른다. 저 쪽을 보라고. 저 멀리 눈 덮인 산이 있다고. 멋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저곳도 지나갈 것이라고…… 평원을 계속 걸으며 지평선도 경험한다. 좌우에는 수확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은 할 수 없지만 넓은 옥수수밭도 있고, 과수원도 있다. 그녀들은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다. 배낭도 내 것의 거의 두 배 크기, 그래도 쉴 줄을 모른다. 난 그들이 나를 버리고 갈까 봐 내 속도보다 좀 더 빨리 걸어야 했고, 물을 마실 수도 없고, 열심히 준비해 간 간식을 꺼내 먹을 틈도 없다. 그녀들은 배낭을 내리지 않고도 가끔 과자를 꺼내 먹고 물을 빨아먹는다. 아까 내가 마약인 줄 알았던 것이 물이었다. 나는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들이 마약 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도 내일은 배낭을 내리지 않고도 물이나 간식을 먹을 수 있게 배낭을 꾸려야겠다. 그녀들이 배낭을 내린다. 덥지 않냐고. 판초와 스패츠, 그리고 윗옷을 벗어 배낭에 넣거나 허리에 매달고 또 출발.

  평원을 편하게 걸어가니 그녀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들은 27세, 프랑스 생장 부근에 살고 있고, 5년 된 친구들이란다. 나는 왜 여기에 왔는지, 자녀는 있는지 등을 물어온다. 그녀들은 스페인어는 잘하는 것 같으나 영어는 영 꽝이어서 대화에 애로가 많다. 그러나 그 정도만 아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나머지는 각자 상상으로. 나와 내 사위 유스케가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장서 간의 갈등을 예방해 주어서 오히려 관계가 더 좋은 것처럼.


  점심 식사 후 3 시간 이상 걸었는데 언제 끝날지 낌새가 안 보인다. 마을이 안 보인다. 먼저 떠난 제임스를 또 만난다. 이제 일행이 4명이 된다. 제임스가 저 멀리 탑 같은 것을 가리키며 저 탑이 있는 마을에 가서 잘 거라고 한다. 한 시간 정도 걸리냐? 아니 그보다 적게 걸릴 것이란다. 그러나 한 시간을 가도 마을에는 접근이 안 되고 가까스로 만난 행인에게 길을 다시 물어 돌아가는데 늪지대를 지나고 도랑을 건너야 했다. 나무 등걸을 도랑에 걸쳐 건너고, 이어서 더 깊은 곳은 그것도 안 되어 고민하다가 제임스가 건너는 방법을 탐색하던 중 제임스가 그만 도랑에 빠지고 만다. 깊이는 무릎 이상이다. 프랑스 여인 2명은 신발 벗고 바지 걷어 올리고 제임스의 도움으로 물을 건넜다. 나도 필사적으로 쫓아가야 한다. 윗옷은 단단히 조여매고 신발과 스틱과 가방은 제임스가 건너편에 옮겨 놓았고, 나도 이제 물에 들어가려고 내복바지까지 걷어 올리고 건너려는데 제임스가 자기 등에 업히란다. 가벼워 보였나? 염치 불고하고 업혀서 도랑을 건넜다. 그 사이 제임스의 옷과 신발, 가방은 심하게 젖어 버렸다. 우리 여자들은 복장을 수습했는데, 제임스는 젖은 신발과 바지는 벗고 반바지와 다른 신발로 바꾼다. 걸으면서 제임스에게 내가 무거워 미안하다고 했더니 가벼웠단다. 땡큐다. 자기 나라 아일랜드에는 남자가 여자를 업고 강을 건너면 결혼한다는 속담이 있단다. 헐! 이렇게 업어 건너다 주는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을 나는 왜 첫인상을 나쁘게 보았을까? 나의 의식세계를 점검한 좋은 기회였다. 

  드디어 마을이 보인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해 가는 카미노. 지는 해를 보고 걷는다. 뒤로 길게 난 각자의 그림자를 끌고 마을로 들어간다.


 로마시대에 지어지고 또 13C에 증축되었으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영감을 주었다는 카미노 랜드마크의 하나인 아름답고 긴 오르비고 다리를 건너 동화 같은 마을에 있는 숙소에 이르렀다. 오르비고 다리 위에는 앙증맞게 작고 둥근 돌들이 지는 해에 각자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언제부터인지 모를 역사를 가지고 오늘도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을 틈을 주지 않는 일행을 원망하며 바쁘게 따라간다. 들어가려고 한 오르비고의 알베르게가 문을 닫아 우리는 다른 알베르게에 들어간다. 시설이 깨끗하다. 값이 9유로로 비싼 것 외에는 만족이다. 한 시간도 안 걸린다던 곳을 두 시간 후에 도착한 것이다. 오늘 걸은 시간만 8시간. 안내 책자상의 하루와 반나절 분의 카미노.   

  아까 양말 벗을 때도 못 보았는데 양쪽 발에 물집이 잡혔다. 걸을 때 여려 차례 신호가 왔는데 도저히 멈춰 달라고 말하지 못해서 이렇게 되고 말았다. 물집을 바늘로 뚫어 물을 빼고 소독, 무릎이나 다리에 무리가 온 것보다는 나은 일이라 생각한다. 허벅지까지 뻐근해 온다. 알베르게 부설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로 저녁 식사를 한다. 와인 마시고 다들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는데 나만 못 알아듣는다. 제임스가 가끔 영어로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정도. 사설 알베르게라 비싸긴 해도 뜨거운 물이 나와서 샤워도 하고 양말과 수건도 빨아 라디에이터에 널어 두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전 03화 내 마음의 산티아고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