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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걸음에도 조율이 필요하다

2015 Slowslow Quickquick, Morocco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읽던 책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작가의 감사 인사말에 ‘제가 더 감사해요’하고 대답한 후 완전한 작별을 했기 때문이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려고 했지만, 청계천에서 내려 좀 걷기로 했다. 6월 초저녁 공기의 온도와 같이 하늘도 푸른색과 붉은색의 중간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부드러운 감촉의 공기가 코끝에 어슬렁거렸다. 부처님 오신 날이 이미 지났는데도 청계천 주위로 연꽃을 닮은 등불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린넨 소재의 셔츠는 바람에 팔랑댔고 신선한 초여름의 바람에 설레었는지, 더 자유롭게 내 몸을 벗어나 날아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저주를 푸는 마법사의 오른손처럼 엄지와 검지로 단추를 하나 더 풀고 나서야 나도 조금 더 산뜻하게 걸을 수 있었다. 

 보폭이 넓은 출근길의 걸음걸이, 야근을 마치고 난 뒤 투덜거리는 발목과는 달랐다. 회사 사람들이 멀리서 지켜본다면, 이 걸음걸이가 나라고는 생각 못할 거라 생각했다.


 교보문고에 도착해서 미술관에서 좋아하는 작품을 찾아 거닐 듯, 조용하고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강한 베이스음이 섞인 힙합 음악과 함께 이어폰을 귀에서 분리해내자 서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와 사람들의 소음이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귀에 ‘착’하고 달라붙었다. 나는 다시 그 박자에 맞추어 왈츠를 추듯 걸었다. 

 서점에 오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걸음걸이에 따라 내 마음도 너그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즈와 어울리는 초저녁의 서점을 특히 좋아했다.

 서점을 어슬렁 거리다가, B16 서가에 위치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신선해 보이는 음식 사진ㅡ바삭한 튀김 위에 아보카도와 적상추, 바질 그리고 내가 모르는 재료들이 듬뿍 올라간ㅡ과 동글동글한 맛스러운 글씨가 표지를 가득 채운 책이었다. 어느덧 저녁시간이 지난 터라, 내 복부는 수축해 하늘에 떠있는 초승달의 생김새와 같이 변해가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책을 집어 들어 손이 가는 대로 책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일본 가정식 13번째 음식, 수프 커리’라는 글씨와 함께 지난해 삿포로에서 맛 본 반가운 음식이 들어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멈춰서 일본 가정식 책을 뒤적이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유럽 생활이 끝날 무렵 새로운 느낌의 여행지를 찾아 무작정 떠난 모로코의 인연이 생각났다. 일본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던 M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모로코는 동행 없이 혼자 다니는 경우가 드물었다. 도시마다 이동 수단이 없거나, 좋지 않아서 장거리 택시 혹은 렌터카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실제로 로컬 버스를 탔을 때,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현지 버스 안의 승객 몇 명이 토를 해대서, 뜨거운 사막의 열기와 함께 진동하는 냄새를 막으려고 코에 휴지를 넣어둔 기억이 있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손바닥에 침을 투- 하고 뱉어서 어디로 갈지 정할 만큼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돌아가는 비행기 티켓도 없었다.) 동행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과 택시비를 나눠내거나, 운 좋게 차를 가진 무리를 만나면 중간에 민트 티 한 잔으로 보답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어쨌든 여차저차 해서 모로코 남쪽 방향을 향해 내려가다가 우연히 만난 해변 도시가 에사우이라Essaouira였다. 지미 핸드릭스와 밥 말리가 한 때 사랑에 빠진 도시이며, 영화 ‘마션’을 연출한 리들리 스콧도 이곳에 집을 구매해 작품 활동이 없을 때마다 찾을 정도로 여유롭고 매력적인 도시였다. 

 에사우이라에 도착해 택시를 나눠 탄 독일인 친구들과는 해산물 플레이트를 나눠먹은 뒤 서로의 행운을 빌며 헤어졌고, 뙤약볕에 숙소를 잡으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운명처럼 나를 부르는 듯한 매혹적인 문 하나를 발견하곤, ‘이게 모로코지!’라는 말을 내뱉으며 신비로운 푸른 빛이 감도는 문에 달린 황금색 문고리를 세개 당겨 문을 열었다. 눈 앞에는 하얀 외벽과 청록색 타일 위로 물과 햇살의 혼합물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물의 출처는 분수임이 확실했으나, 유독 눈이 부신 햇살은 출처가 불분명했다. 햇살의 흔적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구멍 뚫린 천장, 그 위로 비현실적인 구름과 여러 가닥의 햇살이 천장 벽화처럼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ㅡ천장이 뚫린 정원이 있는 구조는 모로코 전통가옥 양식인 리야드Riad이다.ㅡ

 천장에 시선을 못 박은 것처럼 고개를 들고 있는데, 물과 햇살의 일정한 리듬을 깨고 누군가가 나타나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천으로 똬리를 튼 무거운 천을 얹은 집주인이었다. 

 “여기 숙소 방이 있나요? 사용하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여기는 예약이 꽉 찼어요. 일행이 없나 봐요? 그럼 내가 추천해줄 곳이 하나 있어요. 마침 요 근래 동양인이 보이질 않다가, 엊그제 한국인가 일본인가 어디서 온 동양인 한 명에게도 그 숙소를 추천해줬거든요.”

 자리가 없다며 추천해준 곳은 조만간 열릴 히피Hippie들의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방문한 손님들로 북적이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순간 문전박대, 인종차별의 단어가 뇌리를 스쳤지만, 어쩔 수 있나. 주인이 추천해 준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주인이 알려준 곳은 간판이 없었고, 게스트하우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인디고 핑크색의 문 안 쪽에는 키 작은 오렌지 나무가 열매를 대롱대롱 매달고 서 있었고, 그 나무뿌리 쪽에서 기타 소리가 들렸다. 선율과 함께 오렌지를 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잘 찾아왔다고 확신하고 문을 열었다.

 오렌지 나무 아래, 식탁에 모여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히피펌을 한 남녀 무리들이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중 머리가 가장 길고 코가 높은 사내가 손 인사를 하며 친한 척을 했다. 


 “너 M의 친구? 걘 장 보러 갔어! 반갑다.”

 “M이 누구야? 그냥 나는 저 옆 숙소에서 추천해서 왔어. 여기 방 있을까?”

 이 숙소의 주인이었다. 만나자마자 그가 인스타그램 친구를 하자고 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던 손님들에게 인사를 시켜주는 동안 하이파이브와 어깨동무를 곁들였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만큼이나 친화력이 좋은 것처럼 보였다. 

 숙박비는 처음 갔던 숙소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믿을 수 없는 가격을 듣고는 바로 체크인을 했다. 느낌 있는 인테리어와 멋있는 히피 손님들, 오렌지 나무와 어울리는 기타 소리, 그리고 어디에서 나는지 알 수 없는 중독적인 향. 역시 간판 없이 입소문 난  곳은 늘 믿을만하다며 혼자 흐뭇해하고 있을 때, M이 나타났다.


 이 곳의 관광객과는 달리ㅡ보통 유럽 관광객들은 나시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ㅡ큰 캐릭터가 그려진 반팔티를 입고 등장했는데, 몸집이 굉장히 작아서 어린아이인 줄 알았다.(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다 4살이나 많은 누나였다.) 그 어린아이가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세요?”

“아뇨!”

 어눌한 한국 발음에 대충 짐작은 갔으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일본인이었다. 그녀는 일주일 넘게 모로코를 여행 중이었는데, 동양인을 본 건 처음이라며 집에 막 돌아온 주인을 만나 신난 강아지처럼 내 양손을 잡고 방방 뛰며 좋아라 했다.  

 

 M은 춤이 좋아서 일본에서도 취미로 사교댄스를 배우는데, 히피들과 함께 좋은 음악에 춤추는 게 좋아서 에사우이라에 오랜 시간 머문다고 했다. 춤추는 것만큼이나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데 내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며, 다음 날 에사우이라 가이드를 자처했다. 

 오랜 기간 이방인으로 있던 나를 누군가가 반겨주는 기분이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아져서, 다음 날 동행을 승낙하고 일찍부터 노곤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2015 Hippiehost and Canon(looking at the Atlantic), Morocco
2015 Peaceful seagull and Catnap, Morocco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M과 함께 에사우이라 해안을 따라 걸었다. 대서양을 유유자적 가로지르는 갈매기들과 금방이라도 거친 파도를 향해 포를 쏠 것만 같은 성곽 위의 예리한 대포, 알라딘에 나올 법한 양탄자 위에서 잠을 자는 고양이들까지. 바다 옆 평화로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M은 길을 걸어가며 내가 자신의 초등학교 제자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로코에 대한 이야기들을 설명해주었다. 초등학교 교사여서 그런 지 모르겠지만, 일본 특유의 발음으로 단어들을 정성스럽게 꺼내었고, 몸집과는 상반되는 커다란 제스처를 사용하며 자신이 아는 것들을 전수해주었다.

 일본에서도 학생들이 좋아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선생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나에게 이런 정성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한두 시간쯤 지나고 나서 고마운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피로와 함께 답답한 마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10미터 정도 이동할 때마다, 한 번씩 멈춰 서서 ‘카와이’, ‘스고이’를 연신 외치며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려댔다. 하루 종일 사진을 찍고,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사진에 대해서 주구장창 설명을 늘어놓았다. 설명을 하다가도 또 뭔가 다른 물건이 나타나면, 내 귀에 몇 번이나 들렸는지 셀 수도 없을 그 일본어들을 내뱉곤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행위가 잘못되거나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행하는 걸음의 속도가 나와는 다르다는 생각에, 온전히 여행을 집중하지 못했다.


 사실 여행에서의 내 걸음걸이는 미술관이나 서점에서와 같이 느린 편에 속한다.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을 둘러봐야 하니까. 그리고 여유를 찾으러 왔으니까. 그런데도 그녀의 걸음을 맞추어 함께 걷는 것이 어려웠고 답답했다. 

 지금껏 몇십 억년 간 돌아가고 있는 지구의 자전에 같은 속도로 저항하며, 지구가 감춰둔 보물과 같은 수많은 풍경을 함께 마주했던 친구들과는 달랐다. 

 

 모두의 여행은 각자 나름의 방식이 존재하고, 모든 여행은 함부로 평가될 수 없기에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와 더 이상 함께 걸음속도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제 마음에 들었던 숙소에서 꼭 자보고 싶었다는 말을 남긴 후, 곧바로 숙소를 옮겼다. 사실 그녀와 에사우이라 다음 목적지가 비슷해서, 장거리 택시를 같이 타도 됐는데도 말이다. 

 뭐 어찌 됐든 좋은 선택이었는지 그 이후로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고, 멀리서나마(SNS에서라도) M의 행복한 여행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동안 외국에서 만난 인연들, 잠깐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더라도 수첩에 메일 주소가 있으면 사진을 정리하려 공유해주었다.

 사진을 분류하고 있는데, M의 사진도 발견되었다. 사진 속 M은 빛나는 대서양 앞 대포에 손을 얹고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것만 같은 화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나? 정도의 별생각 없이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려고 하는데 웬걸.


 일본에서 춤을 좋아한다던 그녀의 메일 아이디는

 ‘SlowslowQuick@’였다.


 지금쯤 일본의 어느 교차로 위에서 사람들 무리와 함께 빠르게 횡단하고 있을 그녀를 상상한다. 그녀도 주변의 사물보다, 옆 사람에 집중할 때는 Slow보다는 Quick을 택할 때도 있겠지. 

 어쨌든 여행이던, 일상이던 걸음에도 조율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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