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찾아간 바다도, 역시나 파도는 부재중이었다. 서핑을 시작한 이후로 여러 무리와 함께 파도를 찾으러 다녔다. 파도는 거기 살지 않고 간혹 놀러 온다고 말해도 될 만큼, 한국에서 파도를 만날 수 있는 날은 드물었다. 여러 해가 지나며 느낀 것은 파도는 꽤나 도도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굴이 보고 싶어, 금요일 퇴근 후에 차를 타고 세네 시간 달려와도 마중 나오기는커녕,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주차된 차마냥 소식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날은 파도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간 무리 중 조만간 결혼을 앞둔 S가 있었는데, 내가 양양의 파도에 대해 여자 친구 자랑을 늘어놓듯 말 한덕에 예비신부님에게 급히 허락받고, 서핑여행을 함께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 바다는 아무것도 신경 쓰기 싫어서 비행기 모드로 전환한 내 핸드폰처럼 미동이 없었다. 잔잔했다. 첫째 날은 그러려니 했는데, 다음날도 그랬다. 양양의 해변들ㅡ죽도, 하조대, 기사문, 설악해변. 심지어는 경포대까지ㅡ을 옮겨 다녀도 파도는 수줍은 건지, 귀찮은 건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우리 무리가 발견한 건 아쉬운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가려는 S의 축 처진 어깨뿐이었다. 양양군의 홍보문구 ‘파도를 타면, 행복을 탈 수 있다.’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우리는 행복 열차에 탑승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파도를 찾아 바다를 옮겨 다니다 보니, 작년에 떠난 발리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발리의 바다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넓은 해안을 따라 남태평양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온다.
바닷속 깊은 곳에 있는 컨베이너 벨트가 쉴 새 없이 품질검사에 통과한 양질의 파도들을 육지 쪽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은 파도가 몰아닥치는데도 현지 인스트럭터는 롱보드에 더 적합한 파도를 찾는다며, 새벽부터 이 해변 저 해변을 <파도를 찾아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해변 드라이브를 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투볼롱Batu Bolong, 꾸따해변Kuta Beach, 페레레난Pererenan 등의 해변을 옮겨 다니며 그 날의 날씨와 풍향, 풍속에 따라 최적의 장소에서 서핑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그 적도 남쪽의 섬나라와는 달랐다. 파도가 너무 없어서 발목 높이까지의 파도가 있어도 고마웠고, 부서져서 맥주 거품처럼 사라져 가는 화이트 웨이브White Wave만 있어도 고마웠다. 보통 파도가 없으면 해변을 따라 늘어져있는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자유를 즐기지만, 축 처진 뒷모습으로 돌아간 S처럼 아쉬울 수밖에 없다.
파도를 기대하며 왔기 때문에 파도 없는 바다에서 보드를 빌리고, 몸에 끈적끈적 달라붙는 웻수트Wet Suit를 입는 일은 번거로운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왕 몇 시간을 달려 서핑하러 왔으니 물에는 들어갔지만, 집에 있는 마루 장판에 올라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럴 거면 거실 바닥에 배 깔고 드러누워 있지 뭐하러 나왔지?’하고 생각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파도가 없었지만 처음 서핑여행을 온 동생 E를 생각해 그냥 바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역시나 파도가 없다며 툴툴거리고 있는데, 그때 E가 바다 위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지개였다. 누군가가 제자리가 아닌 곳에 장난스럽게 올려놓은 듯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친 파도를 타고 있었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평화로운 무지개의 모습을 보고 튀어나와있던 입을 집어넣고 생각했다.
“아 맞다. 나 경쟁하려고 서핑하는 게 아니잖아. 평화롭고 싶어서 온 건데. 이래도 바다고 저래도 바단데 뭐 어때? 바다면 다 괜찮지”
그러고 보니 즐기는 것이 서핑의 목적이라면, 저 멀리 무지개와 함께 반짝거리는 수면, 그 아래로 보이는 투명한 바다의 속살, 그리고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에 비친 바다와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서핑과 바다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친 파도를 올라타는 것은 짜릿한 무언가가 몸에서 흘러나와 확실한 쾌감을 주지만, 잔잔한 바다를 즐기는 것도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바다를 지긋이 바라보는데 저 멀리서 파도가 왔다. 좋은 파도였다. 강한 패들링Paddling으로 파도의 속도를 따라잡고, 간질거리는 파도를 향해 귀를 가져다 대자 파도가 말했다.
“그래 그거지! 그게 바로 서핑과 바다, 그리고 네 인생을 즐기는 현명한 자세일걸?’
원할 때마다 파도를 만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달과 지구 사이를 부유하는 무수히 많은 불순물들. 그것을 관리하는 지구의 여신만의 할 수 있는 영역이다.
파도가 없다고 실망하기보다는 바다의 포근한 품에 슬쩍 안겨보거나,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올 파도의 모습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바다를 대하는, 그리고 삶을 대하는 현명한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다니까, 다 괜찮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