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주키 Mar 27. 2021

수영, 그 억눌림에 대하여

2019 Suluban Beach, Jimbaran, Indonesia

수영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스무 살 때였다.

바다와 물을 좋아하지만,

수영이라는 능력을 내 몸에 미리 장착하지 않아 몇 차례 죽을 고비가 있었고

성인이 되었으니 스스로를 무언가로부터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강습 첫날,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과 함께 "음-파, 음-파"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생각보다 민망했지만,

뭐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 얼굴만 알고 지내던 여동창들도 그 기초반을 수강했더라.

10여 년 만에 팬티 차림으로 만나, 가릴 거라곤 물안경밖에 없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그 후론 수영을 배우지 않았다.


수영이란 것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회사에 입사해서 행복할 줄만 알았던 내 삶에서 몇 가지 힘든 일들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남들에게 말하기도 힘든 고민,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 우연히 회사 동료를 따라 수영장에 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속해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파도들을 감당하며.

멍-때리다 보니 어느 순간 수영장에서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물가에선 늘 좋은 노래나 들으며 태닝을 하거나,

혹은 개헤엄이나 치며 주변의 비웃음을 사던 사람이 처음으로 수영을 하려고 하니,

이상하게도 숨이 목에 '턱'하고 걸렸다.


큰 파도도 없는 잔잔한 실내 수영장에 몸을 담궜을 뿐인데,

횡격막을 아래로 늘어트리는 일이 생각보다 버겁고 서러웠다.


물속에서의 답답한 그 순간.

물의 무게로 나를 짓누르는 그 순간들.


물리 시간에 배웠던 그놈의 '력(力)'이라는 돌림자를 가진 친구들이

⏤물 위로 나를 올려 보내려는 친구들과 물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친구들

마음껏 내 몸을 좌지우지했다.


그 덕에 정신이 없어, 고민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억누르는 물의 압박을 견디며

계속해서 내 몸뚱아리를 앞으로, 더 앞으로 띄우는 일; 수영을 계속하게 되었고

이 투쟁 같은 일들이 내 힘든 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인생에서의 큰 고민, 짙게 깔린 고통 때문에 내 몸은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이 짓눌려있었고

나의 상황은 마치 고민과 고통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한 곳에 정박할 수밖에 없는 닻(Anchor)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무 살의 나에게는 배울 기회를 허락하지 않던 수영이란 놈은

이제야 나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었고,


아무리 짓눌리고 아파도 나는 한 곳에 정착하는 닻(Anchor)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의 힘을 받아 계속에서 전진하는 돛(Sail)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내가 원한다면 몸을 힘껏 펼쳐 어디든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어쨌든 결국 나는 수영을 좋아하게 되었다.

뭐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전 08화 계속,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