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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봉골레나 바지락 술찜이나

2018 Honfleur, France

 "띠링"

 핸드폰이 부르르 하고 진동했다. 며칠 전 회사 복지포인트로 예약한 광화문의 한 스테이에서 보내온 안내 사항이었다. 조식 시간과 체크인/체크아웃에 대한 설명, 그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는 의례적인 문장이 적혀있었다. 어딘가 여행 갔을 때 말고는 혼캉스*를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영혼 없는 문자 속 '행복한 시간'이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설레고 있었다.


 어머니가 왜 혼자가냐고 물어봤을 때, 뭐라도 이유를 말해야 될 것 같아서 '육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거창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비웃으셨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냥 아무런 방해받지 않고 나뒹굴고 싶어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입사하기 전에는 따로 시간 내지 않고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충분했으나, 지금은 퇴근 후 유튜브로 멍 때리는 시간 말고는 특별히 혼자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그만큼 맘껏 나뒹굴며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으로 날아온 행복이라는 단어 때문에 갑작스레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하면 1박의 일정 동안 '행복한 시간'을 만들 수 있을지 말이다. 그리고 그 거창한 계획은 이러했다.

  - 광화문 SFC빌딩 지하에서 맛있는 와인과 올리브, 맥주를 살 거고 운동 후에 욕조에 몸을 담가 책을 읽으며 술을 마실 거다.  

  - 그럼 배고프니까 광화문 주변에서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는 청계천 앞의 한 파스타 집에서 봉골레를 먹을 거다.

 - 그리고 집에 와서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다시 자고 일어나서, 다음 날 계획은 내일 세우자.


 며칠 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일요일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려마시고 늘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광화문으로 향했다. 계획대로 SFC 지하에서 맛있는 와인과 맥주를 한참 동안 고민해서 구매하고, 숙소에 가서 짐을 풀었다. 가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헬스를 한 뒤, 욕조에 누워 술을 마시며 책을 읽었다. 읽다가 지겨우면 평소 좋아하던 NBA 농구 경기 하이라이트를 봤다. 그러다가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바로 전날까지 어머니와 제주도 여행에 다녀왔다.), 애매한 시간에 달콤한 잠에 빠졌다.


 일어나 보니 저녁 8시, 밥 먹을 시간이었다. 역시나 계획대로 청계천의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비가 살짝 내리는 청계천 주변으로 아마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보이는 커플들이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맛있는 걸 먹으러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어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쁘고 풋풋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얼마 전 헤어진 여자 친구가 생각날지도 모를 것 같아서, 문을 벌컥 열고 파스타를 찾았다.

 "내 파스타 어디 있어요? 당장 주시죠?"하고 뱃속에서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곤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식사되나요?”

 그런데 이게 웬걸, 예상외의 답변이 날아왔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카페밖에 안 해요. 식사는 어렵습니다."


 분명 밤 12시까지는 운영을 하고, 모든 파스타는 생면으로 만든다고. 그리고 저녁에는 원하는 메뉴로 셀프 코스 메뉴를 즐길 수도 있다고 인터넷에는 소개되어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그런 걸 종업원에게 따지는 편이 아니라, 의문을 안은 채로 그렇게 터덜터덜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아까는 커플과 함께 산뜻해 보였던 청계천에 어느덧 어둠이 내려와 기괴하게 생긴 조형물과 함께 음침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음침한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주변 이탈리안 식당에 전화를 돌려봤지만 일요일의 광화문. 아는 사람은 다 알 테지만, 답이 없다. 

 직장인 고객이 많은 까닭인지 맛집은 물론 밥집 대부분이 일요일을 휴무로 정해놓았다. 아쉬운 마음에 따릉이를 타고 서촌의 구석을 누볐지만, 역시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배고픈 방랑자를 반겨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감을 이미해서요..."하는 말을 몇 번이나 듣고 길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는데, 세종문화회관 뒷골목 이층에 위치한 작은 가게 창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메뉴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지락 술찜'

 '어? 바지락 술찜은 면만 들어가 있으면, 사실상 봉골레랑 같은 거 아닌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전거를 전봇대 옆에 던져두곤, 이층에 날아가듯 올라가서 바지락 술찜을 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창밖을 구경하며 생맥주를 마셨다. 목이 마른 건지 배가 고픈 건지 음식이 채 나오기도 전에,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잔이 비어갈 때쯤, 그동안 찾아 헤맨 나의 봉골레 아니, 바지락 술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마저도 살짝 변형된 바지락 술찜이어서 얼핏 보면 나가사키 짬뽕 같았지만, 면을 입에 넣는 순간 행복감이 입안을 맴돌았다. 아저씨의 인심 덕인지 술 없이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 나와서, 어쩔 수 없이 소주도 시켰다.

 '이 참에 한 번쯤 혼술도 해보지 뭐.'


 밖에서 홀로 기다리던 자전거가 외로울 것 같아 소주병을 빠르게 비우고 거리로 나왔다. (따릉이를 1시간 내에 반납해야만 해서 술을 마시는데 시간제한이 있었다.) 

 식당 근처 역 입구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서, 조심히 들어가라며 자전거와 작별을 고하곤 광화문 거리를 거니는데, 비가 그친 광화문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뱃속에는 봉골레가 없었지만, 상쾌하고 선선한 공기와 바지락 술찜의 따뜻한 온기 덕에 '행복한 시간'과 어설프게나마 어울리는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내가 먹은 바지락 술찜처럼,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최고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상황에 맞게 '최고의 것'은 아니더라도 '최선의 것'은 늘 존재하며, '최고의 것'은 비교하자면 끝도 없는 것 같다. 

 

 큰돈을 모아 호화 여행을 떠나는 것도, 돈 없이 침낭을 들고 배낭여행을 떠나는 것도 각자 나름대로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서로의 행복을 비교해서 "내가 돈을 더 많이 썼으니까, 내가 더 행복했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행복의 무게는 단순하지 않다.

 그저 퇴근길에 편의점 맥주 한 캔으로 그 날의 힘든 것들을 날리는 사람도 있으며, 발렌타인 30년 산 한 샷 들이키며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행복한 시간'에 대해 우리는 종종 더 나은 것, 혹은 SNS에 올라온 자랑이 될 만한 것과 비교하며, 스스로 느낀 행복한 감정을 깎아내리려는 경우가 있다. 

 가령 길에서 노을만 보고도 행복한 사람이 인스타에 올라온 롯데타워 레스토랑에서의 노을을 보고, 자기가 느낀 감정이 거짓 행복이라 치부하는 게 그것이다. 

 사소한 것에 큰 감정을 느낀 것은 조금 더 민감도가 높은 최신형 센서를 몸에 보유한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길가에서 느낀 행복감이 더 클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 외에는 그 어떤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한들 행복에 크기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적어도 행복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고 입만 아-하고 벌려 행복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으면 좋겠다.

 봉골레나 바지락 술찜이나.



혼캉스* : 호텔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호캉스를 혼자 즐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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