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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발리 서핑캠프에서 배운 것

2019 Changu, Bali, Indonesia
2019 Surf in Bali (BGM: Anderson paak - Make it better)

 오늘도 꿈을 꿨다. 작년 여름, 발리에 다녀온 이후로 자주 꾸는 꿈이 있다. 햇빛을 가둔 100피트 정도 높이의 코랄 빛 파도가 머리 위로 덮치는 꿈이다. 실제로 발리에서 만났던 파도는 100피트는 아니었으나, 강원도에 거주하는 녀석들보다 힘이 세고 키가 컸다. 서핑 후 마사지받는 동안 온몸 구석구석에서 외친 외마디 비명이 동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서 마침내 ‘아!’ 하고 입 밖으로 소리 내게 했을 정도니깐.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저 멀리 라인업Line up이라는 이름을 가진 파도타기 좋은 위치까지 나가야 하는데,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붉은 천을 이용해 성난 황소를 피하는 투우사처럼, 파랗게 성이 난 파도를 요리조리 피하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좋은 파도와 조우할 수 있게 된다. 낮은 파도는 그냥 파도 위로 넘어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본능적으로 ‘이 파도가 날 부숴버릴 것만 같아’라고 느껴지는 파도가 다가오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기술이 하나 있다.


 거북이가 몸을 뒤집는 모습과 비슷해서 터틀롤turtle roll이라고도 부르고, 에스키모인이 만들어내 에스키모롤Eskimo roll이라고도 부르는 기술이다. 바다를 장판 삼아 서핑 보드와 몸을 김밥처럼 돌돌 굴려, 수면 아래에서 잠시나마 파도를 피하는 기술이다. 잠잠한 수면 아래에서 ‘왜 화가 난 걸까?’하며 성난 파도의 기분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난 파도가 물밀듯이 밀려오면 이 기술을 반복적으로 사용해야만 하는데, 이 때는 숨을 ‘헙!’ 들이마셨다가 파도가 지나갈 때까지 잠시 숨을 참고 다시 수면 밖에서 ‘헙!’하고 숨을 몰아쉬기를 반복해야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여행 일정 중 대부분을 짱구Changu라는 지역에서 보내며 다른 지역에 대한 호기심을 어느 정도 포기한 것은 서핑캠프를 통해 서핑 고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는데, 정작 나는 ‘숨쉬기의 달인’이 되어만 가고 있었다.

(짱구Changu를 잠시나마 소개하자면 발리는 지역별로 각양각색의 천국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 짱구Changu는 힙스터들의 성지, 세상 힙이란 힙은 다 갖춰 놓은 곳. 거기다가 서핑에 최적화된 서퍼들의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이다.)


 서핑의 달인이 아닌 ‘숨쉬기의 달인’이 되어가는 내 모습을 보고 어떤 날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보드 위에서 여유롭게 화려한 기술을 보여주는 멋있는 서퍼들과는 달리, 보드 아래서 허우적대는 꼴이라니. 파도가 얄밉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났다.

 분노조절 장애의 병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서핑 여행자의 하루 일과를 나열해 보자.


 서핑을 하기 전 날 밤, 매일 열리는 화려한 파티와 여성들에게 눈은 돌아가지만 모두 다 해변에 남겨두고 이른 취침을 택한다. 

 서핑 강습은 물때가 좋고 한적한 새벽 여섯 시 경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서핑이 여섯 시에 시작되면 서퍼들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찰랑이는 머릿결을 소유한 캠프의 오너 파르코Parco 형의 손 끝에서 시작된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의 삼박자 비트에 맞춰 몸을 일으켜 세우고, 헝클어진 머리와 비몽사몽 한 정신머리로 서핑을 하기 위한 연료를 주입한다. 드립 커피, 각종 과일 잼, 그리고 방금 구운 따뜻한 토스트.

 삼박자 기상에 맞춰 다시 세 가지 음식을 먹는 동안 머릿속은 온통 파도에 대한 생각뿐이다.

 ‘어제는 졌지만 오늘은 반드시 이긴다. 파도 자식아!’

 자연에게 도전하는 것이 멍청했다는 사실은 대략 두 시간 뒤에 다시 깨닫게 된다.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캠프에 돌아오면 끝이 아니라 그 날에 라이딩에 대한 리뷰가 계속된다.

 하루하루 자신이 파도를 탄 모습의 영상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투쟁가 혹은 몸개그의 능력을 지닌 개그맨 둘 중 하나⏤ 을 보며 고쳐야 부분을 조언받고, 지상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이 일과들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름 아닌 리뷰 시간이다. 그 날의 파도를 향한 자신의 오만함을 되돌아보고 뉘우치는 시간이며, 이를 통해 한층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것을 가장 많이 지적받았을까? 바로 ‘숨쉬기’였다. 수많은 에스키모 롤로 숨 쉬는 능력은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올랐으며, 누워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숨 쉬는 게 문제라고?


 그런데, 나는 서핑하는 내내 전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파도를 따라잡기 위해 손을 힘껏 당기는 동작, 간질거리는 파도를 손으로 눌러 몸을 일으켜 세우는 동작, 파도의 힘을 받아 라이딩하는 동작. 아무리 영상을 클로즈업해도 숨 쉬는 모습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그저 파도가 좀비라도 된 마냥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구 내달릴 뿐이었다.


 사실 ‘숨쉬기’라는 것은 특별한 재능이 아닌, 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동작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느 순간부터 숨 쉬는 방법을 잃어가고 있다.

 나이가 들고 직장이든 학교든 어디서부턴가 비롯된 압박으로부터 쫓기게 되면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숨을 들이마시는 게 어색해졌다가 내뱉는 것마저 어설퍼지면 나중에는 입으로 숨을 뱉었는지 코로 들이마셨는지 헷갈리게 된다. 결국에는 턱 밑으로 숨이 ‘턱’하고 걸려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게 되는 이른바 무기력의 상태까지 도달하게 된다.


 서핑에서도 제대로 된 숨쉬기가 필요하듯,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간단한 이 숨쉬기 능력을 되찾으면, 우리는 빼앗긴 여유와 평화를 되찾을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음해세력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게 된다. 서퍼들처럼 말이다. 대표적인 음해세력은 직장상사의 험담과 막말을 예로 들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숨 쉬는 것에 대한 충고를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의 ‘숨쉬기 달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진행했다. ‘여유롭게 숨 쉬자’는 말을 서핑을 하는 내내 생각했고, 격렬한 서핑 동작 속에서도 내 호흡을 느끼려고 애썼다.

 결국 캠프 막바지에는 파도를 타며 코 끝에 스치는 간지러운 바람과 향긋한 바다내음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숨쉬기의 달인’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숨 막혔던 직장상사 앞에서 숨의 여정 ⏤코로 들어와 폐에서 잠시 뒹굴다가 다시 되돌아 나가는.⏤ 을 느끼며 의도적으로 숨을 여유롭게 내뱉었다. 이제 더 이상 불편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직장 상사가 무서워봤자 발리의 그 거대한 파도만 할까.


 글을 쓰다 보니, 요즘 꿈에 거대한 파도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알겠다. 발리에 다녀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숨 쉬는 방법과 여유를 잃어가다 보니, 발리에서 기념품으로 사 온 드림캐쳐Dream Catcher*가 햇빛에 반짝이는 아름답고도 거대한 파도를 선물로 주는 가보다.



드림캐쳐 Dream Catcher*: 동그란 틀에 거미줄 모양의 뜨개질, 깃털로 구성된 드림캐쳐는 좋은 꿈을 가져다준다는 미신이 있다. 깃털은 좋은 꿈을 가져다주고 거미줄은 악몽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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