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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주키 Mar 27. 2021

실력 없는 버스커만이 살아남았다

2014 Praha, Czech

 

 소파에 앉아서 잠시 TV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 앉은 자세가 어색하게 느껴졌던 건 다른 매체들 때문에 좀처럼 TV 프로그램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나면 핸드폰으로 찾아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딱히 특별한 컨셉의 프로그램은 아니다. ‘실력파 보컬들이 외국에 나가서 버스킹을 한다’라는 한 줄 요약이 가능한 ‘비긴 어게인’이다.

 늘 들어온 유명한 노래인데도, 장소가 바뀌어서인지 그 노래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한국에서는 이미 정상급 가수ㅡ아마도 콘서트 티켓의 암표가 몇십 만원대에 거래되는ㅡ라고 하더라도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는 그저 거리 위 버스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거리의 사람들은 이들이 어떤 타이틀을 가지고 있을지 알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정상급 가수들이라 하더라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에게 기존 프레임을 벗는 행위, 즉 계급장과 이름 앞의 많은 수식어를 떼고 청중들에 다가가는 행위인 버스킹은 큰 도전일 수밖에 없다.


 버스킹에서의 청중은 일반 콘서트장과는 달리 처음부터 청중이 아니라 행인을 청중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듯, 뒤돌아 자리에 멈춰 서야만 음악이 된다. 그들은 걸어가던 방향으로 튀어나가려는 온몸의 관성을 역행하려는 노력 끝에 청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청중이 되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싱거운 무대를 보여준다면, ‘에잇, 가던 길 마저 가자!’라며 다시 행인으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뻔한 공연으로는 바쁜 현대인을 한자리에 붙잡아두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 정상급 가수들처럼 노래를 잘하지 않는다면 더욱이 그렇다.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거리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여행을 하며 스쳐 지나간 수많은 버스커들 중 내 기억 속 원톱이 있다. 그가 가장 강렬했다.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Vaclav Namesti에서 만난 버스커였는데, 그는 어디선가 기타를 메고 갑작스레 등장했다. 기타 케이스나 전용 멜빵도 없이, 어디서 구해온 지 모를 자유로운 끈으로 기타를 묶어 어깨에 둘러맸다.

 형식을 벗어난 기타 끈과 함께 금발로 된 머리칼, 피부 속 주근깨가 투명하게 반짝였고, 그가 멘 기타 몸통에는 낙서인지 싸인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글씨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겉모습으로는 노래를 듣지 않아도 이미 소울 가득한 인디 감성의 실력파 가수처럼 보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노래 한 소절을 시작했고, 나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실력파는 아니구나.'

 여행자에게 소중한 시간을 이 실력도 없는 버스커에게 투자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그에게 조금은 다른 점을 발견하고 다시 멈춰 섰다.


 기타를 메고 왔으면 연주를 해야지, 기타를 치긴 하는데 기타 줄을 튕기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기타 몸통을 리듬에 맞게 (내리)치고 있었다.(이럴 거면 나무판자나 드럼을 가져오지!)

 어쨌든 색다른 그의 모습에 행인 하나 둘이 관성을 거슬러 청중이 되었고, 묘한 마력에 사로잡혀 주변 상점에서 맥주를 사 오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사실 그 버스커에게는 딱히 몇 명의 청중이 있는지 중요치 않아 보였으나, 내가 신경이 쓰여 그의 마지막 곡인 비틀즈의 Hey Jude 연주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청중들에게 그가 기타를 칠 수 있는지 아닌지는 딱히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는 거리 위 경쟁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아우라를 풍기며, 주변 공기마저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남들과는 다른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라하의 버스커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남들과는 다른 아우라'라는 말을 한 단어로 바꾸면, '독자성'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독자성이라는 단어는 독특성과는 달리 특출남의 의미는 조금 덜하며, 남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라하의 버스커가 그렇듯 남들과는 다르지만, 눈치 보지 않고 멋있게 지켜나가는 것이 바로 독자성이다.


 그동안 대량생산과 복제의 시대 속에서 미술이나 음악 등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독자성이 있는 것들만이 살아남아왔다. 그렇게 이미 역사 속에서 독자성의 힘은 증명되어 왔다.

 독자성은 갖고 싶다고 다 가질 수도 없고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들과는 다르게 그 누구보다 빠르게(아 빠르게는 아니지.) 어쨌든, 대중이 어떤 평가를 하든 조용하고 묵묵히 자신만의 것을 사랑해야만 독자성을 얻을 수 있다.


 독자성이라는 단어를 거창하게 표현해놓고 나도 그게 있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 또한 남들과 다른 것을 좋아한다.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인 ‘너 쟤랑 비슷한데?’라는 말이 들려오는 순간 유치한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첫 기억을 떠올려보면, 유년시절 생각이 난다. 울트라맨 주인공들 중 인기가 많았던 빨간색이나 파란색 옷을 입은 히어로가 아닌, 등장도 자주 하지 않는 회색이나 금색 히어로를 좋아했던 기억이 남들과 다르다고 느꼈던 첫 기억이다. 아마도 다른 것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가진 누군가로부터 독자성 비스무리한 것을 물려받진 않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것을 숨겨야만 할 때도 있었고, 비주류라는 단어가 생겨나면서 같지 않은 것을 이상한 종족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하지만, 어떤 영화나 책의 주인공들은 아무리 평범하다 하더라도 남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고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수의 전유물이 아닌 것을 좋아하며, 간혹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며 나누는 이야기가 재밌었고 때론 무리에 섞이지 않고 혼자 싸우는 느와르 영화 속 주인공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후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수가 좋아하는 것이 아닌 특이한 것들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나는 민트 초코 좋아해’, ‘난 고수 매니아야’, '나는 독립영화를 좋아해.'와 같은 말이었다.

 대학 시절에도 공대생이었지만, 휴학을 하고 친구들과 잡지를 만든다던지,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다던지.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것을 만들거나 증명하기 위한 뻘짓(?)을 참 많이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또다시 나만의 독자성을 숨겨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취업시장에 뛰어들어 처음으로 자기소개서라는 것을 쓰고, 취업에 성공한 선배들에게 첨삭을 요청했다. 열정적이었던 모습을 쓰라길래, 친구들과 잡지 사업을 했던 열정적인 나의 에피소드를 적었는데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사업을 했다는 건, 회사에 다니다가 나갈 확률도 높다는 거야. 심지어 전자회사 지원하는 애가 잡지 사업이라니. 어휴..."

 내가 봐도 그때 자기소개서는 기업에 입사하기 위한 게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 보물을 찾아 떠나는 해적단 입단을 위한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나의 이런 모습 조차 원하는 기업이 있다면 뽑겠지 뭐.


 고집부려 낸 자소서는 선배들의 말대로 취업시장에서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어쩔 수 없이 선배들의 말을 들어 남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이미 합격한 자기소개서를 바탕으로 다시 작성했다. 그렇게 하고서야  원하는 기업의 합격 문자를 받기 시작했고, 그런 성공에 힘입어(?) 독자성이라는 단어를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회사에 들어와 몇 년이 지나고 나니 독자성이라는 단어가 괜스레 떠올랐다. 엔지니어지만 남들과는 달리 엔지니어 업무는 남들과 별다를 것 없이 하지만 PPT자료를 잘 만든다거나, 인사팀으로 들어왔지만 영상 제작을 잘해서 굳이 외주를 주지 않아도 된다면 직장 상사나 회사 경영자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 내가 잊고 있던 독자성은 분명 예술 분야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심지어 연애를 할 때, 이성을 끌리게 만드는 데에도 독자성이 쓰이는 것 같다.


 그동안 사회에 발을 담그기 시작할 때부터 사회가 원하는 팔각형의 스탯Stats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남들은 그저 나를 팔각형을 가지고 평가했고, 나 또한 팔각형 모양의 자를 가지고 나 자신과 남들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채울 수 있는 것은 그 팔각형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팔각형 밖에서 자유 곡선을 그릴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사진을 붙여 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남들과 획일화된 모습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명확히 만들 수 있는 팔각형 밖의 무언가가 필요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완벽한 팔각형을 원한다면, 그것도 물론 의미 있는 일이지만.)


 또한 사회가 원하는 팔각형 스탯 대부분이 언제든 노력하면 누구나 채울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독자성을 추구하며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들도 원한다면 언제든 그 팔각형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독자성을 추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전자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사회에 나와서 채우기 시작한 팔각형 비슷하게 생긴 것과 나만의 무기를 하나 더 가지고 있으니,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시절, 다르다는 자부심으로 어깨가 뾰족해졌을 때, 한 후배가 써준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선배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할 때, 눈 안에 푸른 바다가 보여요.'


오늘은 보물을 찾는다는 해적단을 위해 썼던, 철없던 자기소개서를 읽고 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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