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다. 그런 만큼 상황도 다양하고 이유도 다양하다. 물론 주변에는 이런 유형이 꽤 많다. 그런데 난감할 때가 있다. 혼자 우는 거야 통곡을 하든 말든 내 머리카락을 뜯어내든 말든 상관없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전주곡 없이 갑자기 폭발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날도 그랬다.
예닐곱 지인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간 날이다. 거리에서 한 남자가 난데없이 두들겨 맞는 오프닝 씬부터 스토리가 흥미진진할 거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이어 주연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가 질퍽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영화 속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모두 벼랑 끝에 선 존재들이다. 진흙탕처럼 질척거리는 생존의 틈바구니에서 희망이라곤 쉬 건지기 힘든 인생 여정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전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강태식(최민식 분). 그는 지난날의 영광과는 달리 사업을 벌이다 허구한 날 날려만 먹고 집안에서는 무능력자로 구박이나 받으며 이혼당할 처지에 놓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들을 보는 게 유일한 행복이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그가 택한 돈벌이는 '인간 샌드백'. 분풀이가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받고 일부러 맞아주는 역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양아치 양상환(류승범 분). 삥 뜯고 패싸움하는 게 일상다반사인 그는 우연히 어떤 폭력 사건에 휘말려 거액의 합의금이 필요한 상황이 된다. 결국 강도 행각을 벌이다 철창신세를 지고 마는데. 교도소 안에서도 주먹다짐을 이어가며 행패를 부렸다. 이를 눈여겨본 권투부 사범이 그에게 권투를 권한다.
과거에 잘 나갔으나 지금은 몰락해 버린 강태식에겐 재기가 필요하고, 양상환은 자신 때문에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뵙기 위해 신인왕 타이틀이 절실하다. 이 둘은 마침내 결승전에서 맞붙는다.
이제 영화는 종반부다. 매 라운드마다 피 튀기는 접전이 이어진다. 거의 누아르급이다. 비등비등한 판세로 봤을 때 누가 이길지는 알 수가 없다. 뻘겋게 눈이 부어오르고 코피가 터져 피범벅이 된 몰골로 상대를 가격하는 사이 경기는 최종 라운드까지 접어든다. 그래도 승부는 가려야 할 터. 분위기가 최고조로 달아오르면서 모두 승자의 주인공이 드러나는 순간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 한 방만 정통으로 맞으면 쌍코피가 터지며 쓰러져버릴 찰나.
갑자기 화면이 슬로 모션으로 바뀌면서 노래가 흐른다. 우리에게 '연가'로 잘 알려진 Pokarekare Ana.
하필 그때 터져버렸다.
링에서 격돌한 두 주인공의 코가 아니라 내 눈물샘이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한마디로 눈물의 쓰나미. 전주곡이라도 울렸다면 모르겠으나 이렇게 터질 줄이야 나인 들 어찌 알았겠는가. 옆 자리의 지인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선수에게 링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 인생의 밑바닥이었고 그들이 날린 펀치는 어떻게든 다시 살아보려고 뻗은 최후의 발버둥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내지른 주먹은 상대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너무 애잔했던지, 나는 한참을 울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기의 승자가 누구였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앤딩 크레디트가 오를 때까지 멈출 수 없던 나의 두 눈은 마치 저 링의 선수들에게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붉게 충혈돼 부풀어 있었다. 불이 들어온 객석에서 눈을 뜨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런데 묻지 않아도 될 때, 아니 아무 말이 필요 없을 때 꼭 그걸 묻는 사람이 있다. 그날 함께 있던 지인도 그랬다. 왜 그렇게 많이 우냐고 말이다. 갑자기 울보가 된 남자가 딱해 위로의 말을 건네줄 수는 있겠다. 그 정도 측은지심은 나도 이해하니까. 그러나 눈물은 달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기다려주는 것이다. 제발 가만히 있어 주기를 바랐으나 그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불현듯 내 주먹이 울기 시작했다.
영화 <주먹이 운다>. 이 글을 쓰며 정말 17년 만에(2005년 상영) OST인 Pokarekare Ana를 다시 들어보았다. 그때의 감성이 살아나 살짝 눈물이 고였다. 아마 그때는 내가 사는 게 많이 힘들었나 보다. 따지고 보면 전주곡 없이 갑작스레 터지는 눈물 뒤에는 꼭 그런 사연이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