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국이잖아.
경선은 이십여 년 전에 끌어왔던 케리어를 꺼내 필요한 것만 넣었다. 먼지 덮인 가방을 탁탁 털어내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끄니 툭, 맥없이 끊어진다. 이십여 년의 짐이 결국 단출한 가방 두 개로 채워진다. 사실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지만 헛헛함이 차올라 구멍이 몇 개는 뚫린 듯했다.
"금방 돌아올 거지?"
......
경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수년 전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힐 무렵 경선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언니들에게 전해 들었다. 처음 겪는 국제적 고립과 봉쇄가 개인의 자유를 이토록 위협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녀는 답답함에 발만 동동 거리며, 영영 고향에 가 닿지 못할 것 같은 마음만 커져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때부터 그녀의 한국행 계획은 이미 실행된 건지도 모른다.
경선의 자매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예상처럼 서로 떨어져 산 거리와 시간만큼 낯선 마음도 켜켜이 쌓였다. 반가움에 시작된 자리에서 한두 잔 술을 들이켜니 원망과 눈물만 안주처럼 남았다. 코로나 전부터 운영이 어렵다던 경선의 형부 동식의 사업체는 결국 폐업을 했다. 도와줄 수 있냐고 물기 묻은 목소리로 애원하는 듯한 꺼내는 언니에게 미안해서 어쩌질 못했다.
"처제, 그러는 거 아이다. 미국 가서 정착했으면 암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형편이 나았을 텐데, 우리보다야 낫겠지! 안 그래? 동서 목회는 어떻노?"
동식은 치수의 교회가 불탄 사연은 알지 못했고. 술힘을 빌어 큰언니를 대변하기로 작정한 듯 서운함을 연거푸 말하며 토해냈다. 경선은 전에 같으면 이렇게 까지 말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의 고비들을 겪어낸 거친 얼굴과 흰 머리에서도 한 눈에 볼 수 있었기에 동식의 삶도 이해해주고 싶었다.
"동서도 말이야, 장모님 내가 그렇게 모셔도 전화 한번이 없노!"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가 묻어나는 형부, 경선은 큰형부를 결혼 전부터 무척 따랐다. 투박하지만 속정이 깊은 형부를.
"형부, 언니랑 엄마 가까이서 모시느라 고생많으셨어요, 지난 번에 드리고...죄송했어요. "
저절로 움추러든 경선은 각자의 형편이라는 것이 타인이 쉽게 가늠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경선은 생각했다. 다시 돌아온 한국 생활에서 그 공백처럼 비어버린, 어쩐지 환대받지 못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도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긴 세월 짝사랑 했던 곳이었으니까.
첫 출근에서 교사다운 모습을 보여주려 주로 단정한 치마와 셔츠 위주로 옷을 골라 입고 거울에 이리저리 비추어보았다. 스무 명 남짓의 교사들 앞에서 인사를 하느라 둘러보니 한눈에 보아도 자신의 딸과 비슷한 여선생들이 대다수였다. 여기저기서 박수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못했다.
퇴사한 교사의 수업을 그대로 이어받게 돼 첫 수업은 빠르게 다가왔다. 첫 수업에는 팀장이 함께 수업 동행을 해주었다. 처음 방문하는 집에서 허둥대는 자신의 옆에서 재빠르게 교재를 찾아주며 어깨를 살짝 토닥여주며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팀장은 밖에 나가 어머니와 상담을 하며 자신에게 올 시선을 살짝 가려주었다. 경선은 손에 진땀이 났고, 허둥대며 수업을 하고 나와 인사를 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의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밝은 목소리를 내보려 여러 번 거울에 미소를 지어보았다가 어쩐지 경선은 마스크를 쓰고 들어가는 게 편할 거라 판단하고 그것을 넓게 고쳐 쓰고 벨을 누른다.
"선생님 어서 오세요."
친절하게 인사를 해주시는 젊은 어머니들과 달리 개구쟁이 꼬마들은 책상밑, 옷장 안, 거실 커튼 뒤로 숨어들어 선생을 깜짝 놀라게 해 줄 마음으로 숨죽였다.
"얼른 나와, 선생님 오셨잖아."
" Hello, 유진! Have a seat. Now let’s sing together. "
방문한 집에서 몇 가지 쉬운 문장으로 인사를 영어와 그에 맞는 신나는 영어 노래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네다섯 살 된 아이들은 경선이 말하는 영어 발음만 듣고는 다른 질문들을 쏟아낸다.
"선생님 한국사람이에요? 미국사람이에요? "
" 선생님 저 쉬 마려워요."
" 엄마, 물! 물! "
말도 없이 후다닥 방문을 열고 뛰어 나가는 아이도 있다. 예의 바른 아이 그렇지 않은 아이, 예측을 하고 왔지만 현장은 놀랍도록 라이브방송을 켠 듯한 상황이 펼쳐진다. 목덜미가 후끈하다. 가방 속 부채를 꺼내 부친다.
"그래, 얼른 다녀와."
아직 초등 입학 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다니는 5세 전후의 친구들은 수업에서 대다수가 이렇다. 평균 40분 영어 수업은 파닉스, 그림책, 놀이수업이다. 경선은 혼자 쇼의 호스트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때 똥, 똥을 외치고 나간 유진이 급하게 경선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