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조경선(15화)

by 김작가

토요일 오후 경선은 떨리는 마음으로 복지관 문을 열었다. 사회복지사로 보이는 여자직원이 두 손을 모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처음 오셨다고 들었어요. 어르신들께 책 읽어드리는 방은 2층이에요. 조용하고 햇빛 잘 들어서 좋답니다.”


작은 강의실처럼 꾸며진 방에는 이미 서너 명의 어르신이 자리에 앉아 있다. 건너편에는 경선을 맞이했던 직원이 미소를 지어 힘을 보탠다. 가방 안에는 자신이 고른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소박하고 짧은 시가 어르신들께 어울릴 것 같았다.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였다. 연분홍 조끼를 걸친 노인이 경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선생님이 오늘 우리한테 책 읽어준다 했지?”


“선생님이 아니고요, 그냥… 책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경선은 짧게 본인 소개를 하고 앞에 놓인 작은 탁자에 책을 펼쳤다. 육십이 다되어 책을 읽어주는 봉사라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어르신들, 오늘은 시 몇 편 읽어드릴게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짧지만 마음이 푸근해지는 시입니다.”


경선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또렷했고, 방 안에는 잠시 잔잔한 정적이 흘렀다. 어느 순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한 어르신이 큰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 시, 옛날에 라디오서 들은 거 같네, 허허허.”


"우리 서로 한번 마주 볼까요?"


경선이 환하게 웃으며 요청했지만 어쩐지 본인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군가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이란, 경선이 미국 생활에서 느껴보지 못한 마음이었다. 치수, 다은에게도 그런 마음이 들어 올 자리가 없었다고 느끼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슨 눈물일까, 참회의 눈물 아니면 연민.

우물쭈물거리는 경선을 보더니 눈치 빠른 한 노인이 불쑥 말한다.


“그게 뭐 어렵다고? 이정애 여사님 나 좀 봐봐요! 하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마주 본다. 그녀들의 얼굴엔 이미 쪼글쪼글하고 깊고 얕은 주름들이 사방으로 나있다. 무참하리만큼 제멋대로 새겨진 주름들을 보고도 민망하지 않게 오히려 서로를 위로하듯 당당하게 웃자 여기저기서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진다.


" 허허허, 아니 이렇게 웃기만 해도 좋은 거야.” 시를 읽다가 이야기가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6.25 때 남한으로 피난 온 이야기까지 나오자 결국 누군가는 눈물을 훔친다. 구석의 한 노인은 웃음기를 거두고 이내 창밖을 바라본다. 흐릿한 노인의 시선을 경선은 따라가 보며 그녀가 어느 때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걸지 가늠해 보았다.


봉사가 끝난 후, 경선은 사회복지사에게 물었다.


“혹시 다음에도 와도 되나요? 책 읽어드리는 이 시간이 참 좋아서요."


어디서든 주목받고 사랑받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도 좋았지만 생에 뒷전으로 밀려나 성가심과 걱정거리로 전락하는 노인들에게 자신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홀로서기에 파란 등이 하나씩 켜지는 느낌이 좋아 미소가 절로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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